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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들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저 신경질적인 얼굴. 입술을 더듬는 불안한 손길. 책날개를 장식하는 작가 사진을 보았을 때,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떠올렸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나이도 같습니다. 1949년생. 올해로 예순을 조금 넘겼군요. 소설의 화자이며 주인공인 프랑시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이 예순 살의 남자가 보여주는 지독한 염세주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를 연상케 합니다.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연못 주위를 빙빙 돌다 사라져 버린 좀머씨가 세상을 부정하는 방식이 '은둔'이었다고 하면 프랑시스의 그것은 '냉소'입니다.
다시 희망을 가진다는 건 끔찍한 거라네. (본문 중에서)
프랑시스의 삶은 십 년째 정체 상태입니다. 한순간 수액을 빼앗긴 식물처럼 시들한 삶을 연명하고 있어요. "나를 내버려 두시오!" 하면서요. 그런데 좀머씨의 평화(?)는 프랑시스에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자신 존경 받는 작가이면서 유명 여배우를 딸로 두었기 때문이지요. 냉소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딸 알리스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관심병 환자입니다. 프랑시스는 상식을 뛰어넘는 딸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하고, 딸은 그런 아버지를 향해 자기밖에 모르는 추잡한 인간이라 공격합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아버지와 딸의 반목. 그 불안의 뿌리는 어머니의 죽음에 있습니다. 십 년 전, 프랑시스와 그의 딸 알리스는 눈앞에서 불 타 죽어가는 아내(어머니)와 딸(언니)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 끔찍한 사고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갈등을 남기게 되는데요. 살아남은 두 사람, 아버지와 딸은 이 깊은 상처와 분노의 불길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애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해결되지 못한 애도에 대해서. 이 남자의 문제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부정을 저질렀고, 부인과 그가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순간에 부인이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평생토록 용서받지 못한 사람, 그것에 대해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딸과의 관계로 옮아간다. 도덕적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납득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ㅡ 필립 지앙, <앵로퀴티블>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시스의 상처는 용서 받지 못한 자의 자책에서 빚어집니다. 끝내 용서 받을 길 없다는 절망은 자조로 이어지고요. 연못가를 빙빙 돌던 좀머씨처럼 그는 자기 주위를 배회하는 자,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는 자가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삶. 이 불가능한 씨름에 기진맥진하는 늙은 남자를 위무하는 것은 글쓰기입니다. 십 년째 제대로 된 글을 써보지 못한 그는 다시 소설에 매달립니다. 자기 주위만 빙빙 돌던 불안한 이 남자에게 글쓰기는 해결되지 못한 갈등과 상처로부터의 은둔이며, 그래서 구원이 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장 실행 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각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끝없이 으르렁대는 불안한 늙은이의 정서를 거칠게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의 원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Impardonnables'입니다. 소설의 등장인물과 그들 간의 다양한 갈등 관계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프랑시스와 알리스의 관계 이외에도 알리스와 그의 남편 로제, 동성애자가 된 안 마르그리트와 그런 엄마를 부정하는 아들 제레미, 프랑시스의 두 번째 아내 쥐디트와 제레미의 불륜 등 인물들 간의 갈등 상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애는 장갑을 껴요."
"장갑을 끼다니 무슨 소리요?"
"날 만져야 할 때, 그애는 장갑을 껴요."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무덤덤한 어투로 그런 끔찍한 말을 하곤 했다. 제레미가 집 앞에 있을 때면 그녀는 창가 그늘에서 몰래 아들을 훔쳐보았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자신을 만질 때 장갑을 끼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대해 놀랍도록 온화한 목소리로 자문하면서. (본문 중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팽팽한 갈등 구조가 숨이 막힙니다. 가족 간의 불화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수없이 많은데요. 암울함의 정도에 상관 없이 화해나 희망, 그도 아니면 자아의 성장이라는 판에 박힌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독자나 관람객 입장에서는 마음 편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 소설에 구원은 없습니다. 끝이 없다고 할까요.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또 다른 갈등이 싹틉니다. 우... 이건, 배신이야 배신! 끝까지 화해를 거부하는 작가 필립 지앙은 영화 《베티블루(37.2 Le Matin, Betty Blue 1986,프랑스)》의 원작자입니다. 불 타는 방갈로와 그보다 더 뜨거운 여인 베티의 고삐 풀린 청춘. 굉장히 강렬한 영화였죠. 당시 삼십대였던 작가는 이제 예순을 넘겼습니다. 자기 안에 들끓는 뜨거운 불길을 서슴없이 내뿜던 베티와 달리 상처 입은 늙은 짐승과 같은 프랑시스의 소심한 분노와 절망은 작가가 거쳐온 세월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