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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사랑, 하고 말해보면 눈길을 쓸고 있는 한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세상 모든 집과 거리, 사람들이 하얗게 지워진 곳에 한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길을 내는 것이지요. 싸락싸락 사락사락. 사납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이 금세 길을 지우고, 그 한 사람의 비질도 끝이 없습니다. 발자국을 지우면서 길 없는 길을 쓸고 가는 한 사람의 쓸쓸한 뒷모습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구나.'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막막한 어느 아침이었나. 속이 텅 빈 항아리에서 쨍, 하고 터져나오는 마른 울림과도 같이 속말을 중얼거린 순간이 있었습니다. 서서히 녹아가는 눈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흘러내릴 일만 남은 눈사람의 기분. 좀 더 가벼워지고 유연해진 느낌. 서영은의 일곱 번째 장편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그 아침의 기분을 고스란히 되살려 주는군요.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애가 탄 나머지 양쪽 턱 밑으로 땀이 흘러 갓끈을 맨 것처럼 보이던 그 남자는 이 집의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는 생이 만든 신기루였을까. (22쪽)
이제는 '녹아내리는 눈사람'의 마음으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도 들끓는 열정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던 그런 시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사랑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황망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외로움은 떨쳐낸다고 떨궈지는 게 아니라는 것, 사랑은 외로워서 하는 것도 외롭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외롭다는 것도 몰랐고요. 그 시절에 이 소설을 만났다면 아마도 못내 거북하고 답답했을 것 같네요. 사랑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 순진하게 우기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녀는 살그머니 책상 서랍을 당겨보았다. (...) 상체가 뒤로 젖혀지도록 서랍을 앞으로 잡아 뺀 그녀는 잡다한 것들이 가득 들어찬 속을, 손을 넣어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쓰다 만 볼펜들, 커터칼, 연필, 캡슐에 든 알약들, 건전지, 명함, 압핀과 클립이 들어 있는 상자, 메모첩 등등이었다. 그 메모첩 표면에, 신문에서 오려낸 1989년도 미스 모스크바로 뽑힌 라리사 리티체프스카야의 수영복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노인이 서랍을 열 때마다 그 반라의 요염한 미인 사진에 눈도장을 찍었을 것을 생각하며, 불현듯 예전에 전처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그 말이 말로서가 아니라, 아릿한 슬픔으로 전이되었다. (108쪽)
이 소설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참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랑(또는 사람)의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쓰다 만 볼펜들", "커터칼", "연필", "캡슐에 든 알약", "건전지", "명함", "압핀", "클립" 같은... 오래된 책상 서랍 속에 감춰둔 잡동사니 같은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끄집어 내는데요. 겉은 그럴싸해도 속은 참을 수 없이 하찮은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 존재의 고독, 그 고독한 인간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보아버린 이의 휘휘한 목소리가 떠도는 눈송이처럼 소설 전반을 휘감고 있습니다. 간을 하지 않은 희멀건 죽을 한입 한입 떠 먹는 심정으로 소설을 읽었습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투명해서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힌 순간을 지나기도 하면서요.
그녀는 자신이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이 집의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피상적인 집 안의 구조는 대강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잇었으나, 이 집은 첩첩이 안으로 잠긴 많은 문을 숨기고 있어, 그 깊이가 얼마만한 것인지 알 수 없엇다. 그것은 그녀가 태어나기 삼십 년 전부터 그가 살아온 세월의 깊이이기도 했다. (25쪽)
온순하지만 주관이 뚜렷한 여성 호순은 서른 살 연상 박선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박선생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유부남. 죄의식과 이상한 갈망 사이를 오가며 호순은 박선생과의 관계를 이어갑니다. 호순과 박선생, 박선생의 아내 방선생의 미묘한 심리를 통해 "온갖 잡동사니들로 무거워져 침몰하고 있는 배"와 같은 인간의 내면을 묘파해 보이는 이 소설은 김동리와의 인연을 풀어 쓴 자전적 소설인데요.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삼 년 동안의 결혼 생활이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맨발로 눈밭을 걷자던 낭만적인 연인은 결혼과 동시에 여러 개의 잠긴 문을 감추고 있는 대저택의 괴팍하고 인색한 노인이 되어버립니다. 한낮에도 무거운 커튼을 쳐놓아 바깥의 눈을 차단하고, 밤에는 도둑이 들까 봐 집 지키는 아주머니를 따로 고용하고, 아내마저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박선생. 소설 곳곳에는 박선생에 대한 호순의 온기 있는 시선이 느껴지는데요. 사람과 사랑의 환멸에 절망하던 호순은 박선생의 마음에 감춰진 황량한 그늘을 알아채게 되고 사랑보다 짙은 연민의 정을 품게 됩니다. 짧고도 긴 삼 년의 결혼 생활에서 호순은 박선생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넓은 "뜰"의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으면서 마음을 지켜나갑니다.
그는 늘 배가 고파 울어대는 아기, 배가 고파서 아버지가 마시다 둔 약주 대접에 남은 술지게미를 먹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아이, 국수를 한 그릇 더 받아 책상 서랍 속에 감춰두려고 밥 짓는 형수의 마음을 일부러 불편하게 한 소년, 동네에 찾아온 엿장수가 소년의 머리에 가마가 두 개 든 것을 보고, 너는 이담에 크면 두 집에 갓을 벗어놓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 울었다는 그 소년. (25 ~26쪽)
몇 년 전 경주에 있는 동리 문학관에 들렀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한여름이었고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한 내부는 어둑했습니다. 옅은 빛 속에 떠오른 김동리와 '그의' 여인들 얼굴이 꿈결인 듯 가물거립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의 얼굴도 흐릿하게 흩어지고 당시 느꼈던 기분만이 도렷하게 되살아 나네요. 외딴 숲에 전시된 죽은 사람들의 생애를 지켜볼 때 밀려들던 허망하고 쓸쓸한 마음.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은 몇 가닥으로 내달리는데,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차분했습니다. 사랑은 둘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혼자만의 일이라는 것. 마음 있는 생물에게 주어진 가장 쓸쓸한 숙제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