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사랑, 하고 말해보면 눈길을 쓸고 있는 한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세상 모든 집과 거리, 사람들이 하얗게 지워진 곳에 한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길을 내는 것이지요. 싸락싸락 사락사락. 사납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이 금세 길을 지우고, 그 한 사람의 비질도 끝이 없습니다. 발자국을 지우면서 길 없는 길을 쓸고 가는 한 사람의 쓸쓸한 뒷모습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구나.'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막막한 어느 아침이었나. 속이 텅 빈 항아리에서 쨍, 하고 터져나오는 마른 울림과도 같이 속말을 중얼거린 순간이 있었습니다. 서서히 녹아가는 눈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흘러내릴 일만 남은 눈사람의 기분. 좀 더 가벼워지고 유연해진 느낌. 서영은의 일곱 번째 장편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그 아침의 기분을 고스란히 되살려 주는군요.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애가 탄 나머지 양쪽 턱 밑으로 땀이 흘러 갓끈을 맨 것처럼 보이던 그 남자는 이 집의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는 생이 만든 신기루였을까. (22쪽)

 

   

     이제는 '녹아내리는 눈사람'의 마음으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도 들끓는 열정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던 그런 시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사랑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황망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외로움은 떨쳐낸다고 떨궈지는 아니라는 것, 사랑은 외로워서 하는 것도 외롭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외롭다는 것도 몰랐고요. 그 시절에 이 소설을 만났다면 아마도 못내 거북하고 답답했을 것 같네요. 사랑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 순진하게 우기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녀는 살그머니 책상 서랍을 당겨보았다. (...) 상체가 뒤로 젖혀지도록 서랍을 앞으로 잡아 뺀 그녀는 잡다한 것들이 가득 들어찬 속을, 손을 넣어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쓰다 만 볼펜들, 커터칼, 연필, 캡슐에 든 알약들, 건전지, 명함, 압핀과 클립이 들어 있는 상자, 메모첩 등등이었다. 그 메모첩 표면에, 신문에서 오려낸 1989년도 미스 모스크바로 뽑힌 라리사 리티체프스카야의 수영복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노인이 서랍을 열 때마다 그 반라의 요염한 미인 사진에 눈도장을 찍었을 것을 생각하며, 불현듯 예전에 전처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그 말이 말로서가 아니라, 아릿한 슬픔으로 전이되었다. (108쪽)

 

 

    이 소설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참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랑(또는 사람)의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쓰다 만 볼펜들", "커터칼", "연필", "캡슐에 든 알약", "건전지", "명함", "압핀", "클립" 같은... 오래된 책상 서랍 속에 감춰둔 잡동사니 같은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끄집어 내는데요. 겉은 그럴싸해도 속은 참을 수 없이 하찮은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 존재의 고독, 그 고독한 인간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보아버린의 휘휘한 목소리가 떠도는 눈송이처럼 소설 전반을 휘감고 있습니다. 간을 하지 않은 희멀건 죽을 한입 한입 떠 먹는 심정으로 소설을 읽었습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투명해서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힌 순간을 지나기도 하면서요.

   

    그녀는 자신이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이 집의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피상적인 집 안의 구조는 대강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잇었으나, 이 집은 첩첩이 안으로 잠긴 많은 문을 숨기고 있어, 그 깊이가 얼마만한 것인지 알 수 없엇다. 그것은 그녀가 태어나기 삼십 년 전부터 그가 살아온 세월의 깊이이기도 했다. (25쪽)

 

 

     온순하지만 주관이 뚜렷한 여성 호순은 서른 살 연상 박선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박선생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유부남. 죄의식과 이상한 갈망 사이를 오가며 호순은 박선생과의 관계를 이어갑니다. 호순과 박선생, 박선생의 아내 방선생의 미묘한 심리를 통해 "온갖 잡동사니들로 무거워져 침몰하고 있는 배"와 같은 인간의 내면을 묘파해 보이는 이 소설은 김동리와의 인연을 풀어 쓴 자전적 소설인데요.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삼 년 동안의 결혼 생활이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맨발로 눈밭을 걷자던 낭만적인 연인은 결혼과 동시에 여러 개의 잠긴 문을 감추고 있는 대저택의 괴팍하고 인색한 노인이 되어버립니다. 한낮에도 무거운 커튼을 쳐놓아 바깥의 눈을 차단하고, 밤에는 도둑이 들까 봐 집 지키는 아주머니를 따로 고용하고, 아내마저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박선생. 소설 곳곳에는 박선생에 대한 호순의 온기 있는 시선이 느껴지는데요. 사람과 사랑의 환멸에 절망하던 호순은 박선생의 마음에 감춰진 황량한 그늘을 알아채게 되고 사랑보다 짙은 연민의 정을 품게 됩니다. 짧고도 긴 삼 년의 결혼 생활에서 호순은 박선생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넓은 "뜰"의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으면서 마음을 지켜나갑니다.

 

 

    그는 늘 배가 고파 울어대는 아기, 배가 고파서 아버지가 마시다 둔 약주 대접에 남은 술지게미를 먹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아이, 국수를 한 그릇 더 받아 책상 서랍 속에 감춰두려고 밥 짓는 형수의 마음을 일부러 불편하게 한 소년, 동네에 찾아온 엿장수가 소년의 머리에 가마가 두 개 든 것을 보고, 너는 이담에 크면 두 집에 갓을 벗어놓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 울었다는 그 소년. (25 ~26쪽)

 

   
     몇 년 전 경주에 있는 동리 문학관에 들렀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한여름이었고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한 내부는 어둑했습니다. 옅은 빛 속에 떠오른 김동리와 '그의' 여인들 얼굴이 꿈결인 듯 가물거립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의 얼굴도 흐릿하게 흩어지고 당시 느꼈던 기분만이 도렷하게 되살아 나네요. 외딴 숲에 전시된 죽은 사람들의 생애를 지켜볼 때 밀려들던 허망하고 쓸쓸한 마음.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은 몇 가닥으로 내달리는데,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차분했습니다. 사랑은 둘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혼자만의 일이라는 것. 마음 있는 생물에게 주어진 가장 쓸쓸한 숙제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폭력과 학대, 위선과 모순으로 얼룩진 유년기의 기억이 한 인간을 파괴해 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을 고스란히 옮긴 자전소설입니다. 충격적인 내용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놀랍도록 서늘하고 차분하게 이어지는 어조입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에조차 감정이 배제된 느낌이랄까. 자기 감정과도 철저히 거리를 두고 있는 한 남자의 담담한 고백이 읽는 이의 마음을 왈칵 뒤흔드는 것입니다.

 

 

   나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 내가 가치 없는 존재라는 비참함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블랙홀을 뱅뱅 돌며 계속해서 추락했다. 어디에도 도킹하지 못한 채. 나에게는 낙하산도, 착륙장도, 터널 속 한 줄기 빛도, "사랑해"라는 속삭임도 없었다. (291쪽)

 

 

     '고백'보다는 '고발'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아동학대 희생자인 안드레아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폭력의 내부를 추적하고 폭로합니다. 폭력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차 대전 당시 나치친위대 대원으로 활동했던 아버지 프란츠 사버 알트만은 전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인데요. 전쟁의 악몽을 경험한 그는 평생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립니다. 마음이 고장난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 보금자리, 가정을 또 하나의 전쟁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남편의 멸시와 폭력에 무기력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차 복수를 꿈꾸는 안드레아스,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면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형들과 누이. 끊임없는 육체적 정신적 학대에 질린 가족들은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마는데요. 안드레아스는 시종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어조로 폭력의 광기가 한 가정을, 인간을 어떤 식으로 파멸시키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병이 든다. 그래서 전쟁 후 집으로 돌아온 남자들은 이성을 잃었다. 누군가는 말을 잃었고, 누군가는 기쁨을 잃었다. 미친 듯이 악을 쓰며 잠에서 꺠어나는가 하면,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고, 두려움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친구들이 죽는 환영을 보았다. (23쪽)

 

 

    안드레아스가 나고 자란 '알트외팅' 역시 위선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입니다. 변태 성욕에 사로잡힌 수도사들, 여제자의 몸을 강제로 탐하는 선생, 폭력을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어른들. 부모와 선생, 그리고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성장한 안드레아스는 오랜 시간을 비정상적인 죄책감과 애정결핍, 바닥을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립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하고 집을 뛰쳐나온 이후,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번 돈 모두를 마음 치유를 위해 써 왔다고 하는데요. 다양한 방식의 심리치료와 명상, 여행을 하면서 이엄이엄 흘러온 그가 마침내 닿은 탈출구는 '글쓰기'였습니다. 삶의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해줄 유일한 도구, 그것은 바로 언어였다"고 책의 말미에서 안드레아스는 고백하고 있는데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응시하는 안드레아스의 '용감한' 태도는 안드레아스 자신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모종의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정택진 소설
정택진 지음 / 해냄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처럼 만난 세 친구가 재미삼아 바다낚시에 나섰다 배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합니다. 해무는 짙고 사리 때라 물살도 거세서 지나는 배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 꼼짝없이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만 것인데요. 뒤집힌 배 위에 고립된 세 친구가 죽음에 직면해 나누는 대화가 이야기의 결을 이루는 이 작품은 이외수문학상 수상작입니다. 중편소설이고요. 정통소설의 얼개에 충실한 이 소설은 다소 밋밋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는데요. 그 밋밋함을 상쇄하는 것이 구성진 남도 사투리입니다. 물에서 막 건져올린 물고기처럼 팔딱이는 어휘들이 생생한 현장감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배는 결을 타야 안 합디여! 근데 왜 그랬습디여? 끌고 가면서 천천히 털어내믄 될 것인디 뭐가 급하다고 줄을 짤렀습니여. 긍께 이 꼴이 돼부렀지라우. 안개 궂은 바다에서 살아날 방법이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겄소마는, 해나 살어나거든 앞으로는 결을 잘 타시요이. (본문에서)

      

     남도의 투박한 정서가 녹아 있는 사투리는 읽는 묘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데요. 뫼얍다, 기알쳐내다, 족대기다, 실래기치다, 비깜하다, 뽈세... 대화는 물론 바탕글에까지 사투리(또는 옛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부록으로 어휘 정리가 되어 있을 정도인데요.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일부 어휘는 부록에도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고요. 안개에 가려진 길을 더듬더듬 걸어가는 심정이 되어버립니다. 그 뜻을 찾아보거나 짐작해 보면서 어휘에 붙들려 있다 보니 아무래도 이야기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네요.

 

     학원강사를 시작하면서 정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개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전라도'를 지우는 일이었다. (...) 그쪽 냄새를 풍겨서 좋을 게 없었다. 그 냄새의 시작이 일명 '껭껭이투'였다. 사람들은 그쪽 말투를 그렇게 불렀다. 정삼은 피를 간다는 심정으로 그 피에 묻어 있는 말투를 바꾸었다. (본문에서)

 

     앞서 소개한 대로 이야기 구조는 단순합니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고향 친구 치영 수열 정삼은 오랜만에 만나 들뜬 기분에 바다낚시를 나갑니다. 바위인지 뻘인지 뭔가에 꽉 걸린 그물을 처리하다 사고로 배가 뒤집힙니다. 뒤집힌 배 위에 몸을 실은 세 사람은 구조에의 희망과 죽음의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지난 삶을 돌아보는데요. 어망 작업을 하다 손가락을 잃고 아버지마저 잃은 수열,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경험한 치영, 강남 유명 학원 재벌 정삼. 저마다 다른 삶의 곡절을 겪은 세 남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현 세태를 투영하는 한편 삶과 죽음이라는 다소 묵직한 사유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광주를 보면서 치영은, 죽음에 대한 그때까지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겉멋 든 것이었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도 관념적인 것도 아니었다. 갯가에서 낚아 올린 볼락이 숨이 끊어져 뻣뻣하게 굳어지듯, 명절 때 추렴으로 잡아진 돼지가 이리저리 토막쳐져 이 집 저 집으로 나누어지듯, 죽음은 극히 일상적이고 흔한 일이었다. (본문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짜임새와 문장, 풍부한 사투리 어휘, 해학이 잘 녹아 있는 이 소설은 남도의 해풍에 실려온 신선한 바닷내음 같은 거친 질감을 자랑하는데요.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내달리는 빤한 이야기 구조가 긴박감을 떨어뜨리고 있는 점, 삶과 죽음, 역사적 비극 같은 주제를 직설 화법으로 다루는 방식 등이 결과적으로 너무나도 익숙하고 빤한 이야기를 낳았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쿠니 가오리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무렵에 쓴 산문들을 한데 엮은 책입니다. 순수와 치기, 감미로운 상심, 갈망, 우울... 같은 젊은 시절 특유의 정서가 잘 살아 있네요. 이제는 중년의 문턱을 훌쩍 넘긴 작가의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목소리는 오래 닫혀 있던 마음속 다락의 문고리를 슬쩍 열어젖힙니다. 건조하고 탁한 공기를 휘젓고 다니면서 아무렇게나 놓인 잊혀진 물건들을 쓸어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면서 흘려보내는 고요한 오후의 기분에 잠기게 되네요. 안녕, 하고 인사하는 파리한 손바닥 같은 햇살. 떠도는 먼지 가운데 동그랗게 앉아, 사락사락, 빛바랜 노트를 넘기는 마음. 이것은 아스라한 기억 저편의 이야기.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거나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이야기.

 

    어린 시절이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모든 것이 ㅡ 보고 듣고 만지는 것 모두 ㅡ 하늘에서 내려온다.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이 아이들 위로 그저 내려온다. 비처럼. 눈처럼. 햇살처럼. ( 〈진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중에서 )

 

 

     제목 하나만으로 선택하게 되는 책들이 종종 있죠. 이 책이 그랬는데요. 어떤 식으로든 유년의 정서를 다루고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한데 기대가 크게 빗나갔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유년시절'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머무는 마음의 풍경'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바로 그런 마음의 풍경'을 불러내고 있는데요. 끼익끼익 시간의 태엽을 풀면서 걸어나오는 우리 안의 아이. 그 아이를 품고 어른의 얼굴을 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결혼이란 참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가장 되고 싶지 않은 여자가 되고 마는 일이다. 서글프다. ( 〈밤의 육교에서〉 중에서 )

 

 

     우리는 너무 일찍부터 어른 노릇을 해왔던 것 아닌가 하고 억울한 심정이 됩니다. "어리광을 피우거나 아부하지 않"고 "등뼈를 반듯하게 세우고 있"기 위해 온 마음을 집중하던... 어른스러움을 흉내내면서 헛되이 보낸 시절들을 돌아보게 되네요.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책의 표지를 눈물처럼 흐르는 문장이 마음을 적십니다. 책에 담긴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거창한 사건이나 무거운 철학을 담고 있지 않아요. 작정하고 쓴 글이 아니라 무심히 떠가는 구름의 마음으로 씌여진 글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만큼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스쳐가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순간들에 떠오른 환희나 환멸, 애증, 불안이나 안도감 같은 것들을 경쾌한 문장으로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짧은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거기에 혼자 있다. 지금까지 아무도 온 적 없는 곳, 아무도 본 적 없는 풍경. 그 끝없이 넓은 곳에 덩그러니 서 있고 싶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서 있고 싶어서지 (...) 솔직히 빨리 돌아가고 싶은 오직 그 한 마음으로 걷는다. 어쩌다 내가 이런 곳에 왔을까 하고 단박에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다. 헤엄도 치지 못하면서 다이빙을 한 꼴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발로 걷고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본 것만을 쓰고 싶어 그곳에 가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착각과 전제가 하나도 없는 곳에 있고 싶다. 그곳이 제아무리 황량해도 나는 역시 거기에 있고 싶다. ( 〈왜  쓰는가〉 중에서 )

 

 

    알록달록 종합 선물셋트 같은 책입니다.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어요. 읽다 보면 절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편하게 읽힌다는 말이지요. 슬픈 사연마저도 참으로 경쾌하고 뒤끝 없이 개운하게 전달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그중에서도 좋았던 부분은 3장의 독서일기들이었는데요. 간결하지만 섬세한 책 이야기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말랑말랑하면서 단단하고 현기증나도록 달곰한 양갱 맛이 나네요. 양갱을 맛보는 기분으로 조금씩 아껴 읽었습니다. 마지막 한 글자까지 다 읽고 나서 조금 헛헛한 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빌리엔 & 오르바르 뢰프그렌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너머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골목 담장을 손끝으로 훑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유년의 어느 저녁들이 떠오르네요. 옅은 어둠이 자우룩이 번져가는 한갓진 길이 무료하고 조금 무섭기도 해서 가만 눈을 감아요. 손끝에 닿는 벽의 촉감에 기대 비척비척 나아가면서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거나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곡조에 노랫말을 붙여 부르다 걸음을 멈추고 감았던 눈을 반짝 떠요. 집까지 단번에 갔던 적은 없고 집과 가깝거나 멀찍이 떨어진 길 위에서 나는 다시 눈 감고 혼자만의 놀이에 골몰합니다. 눈 감아도 눈 떠도 어둠뿐인 길 위에서 혼자만의 내기. 아무도 모르게 희망과 실망이 반짝 피어나고 스러지고 또 반짝 피어나던 그 저녁의 귀갓길을 생각합니다. 그 은밀한 혼자만의 의식을 나는 퍽 즐겼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강박적이었던... 무료함과 불안감을 견디는 일종의 습관이었죠. 어떤가요. 누구에게나 이런 사소하고 은밀한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요.

 

    실제로 사람들은 극적이고 중요한 사건보다 소소한 일상행위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가 늘 행하지만 능동과 수동 사이에 자리한 행위이기에 쉽게 포착할 수 없을 뿐이다. 이들 행위에는 '눈에 안 띄는, 대수롭지 않은, 흥미롭지 않은' 등의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일상행위가 지닌 특별한 힘을 간과한 탓이다. (본문 중에서)

 

 

    너무나도 사소하고 은밀해서 의식조차 못했던 그런 일상의 순간들. 버스나 지하철 기차를 기다리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 우체국 대기줄이나 영화관 매표소 앞에 줄 서서 기다릴 때... 한마디로 강제 무위의 상태에 빠지는 순간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일상을 구축하고 지탱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무위의 순간들입니다.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책은 바로 이런 일상의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들(기다림, 일상적 습관, 공상)의 숨은 가치와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바니니는 기다림을 부동의 공허한 상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시간이 더디 흐르는 상태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경험한 기다림은 실상 변화의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림이 반드시 수동적이고 부차적인 일이란 법은 없다. 오히려 목표 지향적이고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평범한 시간들'로 이뤄진다고, 가능성을 제공하는 순간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도 시간낭비가 아닌 역동적인 행위일 수 있다. (본문 중에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사실 매우 광범위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무엇보다 너무 하찮은 주제라 이런 영역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책은 제가 알기로 처음입니다. 과연 얼마나 깊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열었는데요. 심도있고 흥미로운 사유와 방대한 연구자료들을 토대로 무위의 가치를 발굴해 나가는 과정이 감동적이기까지 할 정도네요. 계층, 연령, 국가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톨스토이와 사르트르부터 안네 프랑크, 무라카미 하루키 등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묘사하는 무위의 순간들을 재발견하는 맛도 쏠쏠하고요.

 

 

     오르한 파묵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생각을 말하면 25쿠루시 주마."라고 짓궂은 제안을 했을 때는, 공상 때문에 아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그 이면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특히 친한 사이일수록 이 문제는 힘겨루기 차원으로 번지기 쉽다. "왜 네 비밀을 나한테 털어놓지 않아?" 학교 친구, 직장 동료, 부부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공상 습관이 불만으로 이어질 때가 아주 많다. 따라서 타인의 공상은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볼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나'라는 존재가 환상에 비해 덜 흥미롭거나 덜 중요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쓸모 있는 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 시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매일 반복하는 몸이나 마음의 사소한 습관들... 실은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일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식들이라고. 우리를 타인과 연결해주고 괴로운 현실의 탈출구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우리 자신과 삶의 작은 부분들을 이끌어 가는 엄연한 (문화적) '행위'라고 이 책은 역설하고 있는데요. 한 폴란드 기자가 묘사한 가나의 시골 변두리 버스 정류장 풍경이 문득 떠오릅니다. 대화도 없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무엇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소변도 보지 않으면서 눈꺼풀과 입술에 달라붙는 날벌레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 목표지향적이고 속도지향적인 서구인은 가나인들의 기다리는 모습을 '심리적 수면 상태'에 비유했는데요. 오히려 저는 저 특별한 풍경이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열심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몰입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이 흘려버린 이야기를 줍고 있지. 당신이 모르는 노래를 듣고 있지. 당신은 평생 닿지 못할 해변을 달리고 있지. 끝도 없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