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빌리엔 & 오르바르 뢰프그렌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너머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골목 담장을 손끝으로 훑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유년의 어느 저녁들이 떠오르네요. 옅은 어둠이 자우룩이 번져가는 한갓진 길이 무료하고 조금 무섭기도 해서 가만 눈을 감아요. 손끝에 닿는 벽의 촉감에 기대 비척비척 나아가면서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거나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곡조에 노랫말을 붙여 부르다 걸음을 멈추고 감았던 눈을 반짝 떠요. 집까지 단번에 갔던 적은 없고 집과 가깝거나 멀찍이 떨어진 길 위에서 나는 다시 눈 감고 혼자만의 놀이에 골몰합니다. 눈 감아도 눈 떠도 어둠뿐인 길 위에서 혼자만의 내기. 아무도 모르게 희망과 실망이 반짝 피어나고 스러지고 또 반짝 피어나던 그 저녁의 귀갓길을 생각합니다. 그 은밀한 혼자만의 의식을 나는 퍽 즐겼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강박적이었던... 무료함과 불안감을 견디는 일종의 습관이었죠. 어떤가요. 누구에게나 이런 사소하고 은밀한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요.

 

    실제로 사람들은 극적이고 중요한 사건보다 소소한 일상행위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가 늘 행하지만 능동과 수동 사이에 자리한 행위이기에 쉽게 포착할 수 없을 뿐이다. 이들 행위에는 '눈에 안 띄는, 대수롭지 않은, 흥미롭지 않은' 등의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일상행위가 지닌 특별한 힘을 간과한 탓이다. (본문 중에서)

 

 

    너무나도 사소하고 은밀해서 의식조차 못했던 그런 일상의 순간들. 버스나 지하철 기차를 기다리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 우체국 대기줄이나 영화관 매표소 앞에 줄 서서 기다릴 때... 한마디로 강제 무위의 상태에 빠지는 순간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일상을 구축하고 지탱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무위의 순간들입니다.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책은 바로 이런 일상의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들(기다림, 일상적 습관, 공상)의 숨은 가치와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바니니는 기다림을 부동의 공허한 상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시간이 더디 흐르는 상태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경험한 기다림은 실상 변화의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림이 반드시 수동적이고 부차적인 일이란 법은 없다. 오히려 목표 지향적이고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평범한 시간들'로 이뤄진다고, 가능성을 제공하는 순간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도 시간낭비가 아닌 역동적인 행위일 수 있다. (본문 중에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사실 매우 광범위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무엇보다 너무 하찮은 주제라 이런 영역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책은 제가 알기로 처음입니다. 과연 얼마나 깊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열었는데요. 심도있고 흥미로운 사유와 방대한 연구자료들을 토대로 무위의 가치를 발굴해 나가는 과정이 감동적이기까지 할 정도네요. 계층, 연령, 국가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톨스토이와 사르트르부터 안네 프랑크, 무라카미 하루키 등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묘사하는 무위의 순간들을 재발견하는 맛도 쏠쏠하고요.

 

 

     오르한 파묵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생각을 말하면 25쿠루시 주마."라고 짓궂은 제안을 했을 때는, 공상 때문에 아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그 이면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특히 친한 사이일수록 이 문제는 힘겨루기 차원으로 번지기 쉽다. "왜 네 비밀을 나한테 털어놓지 않아?" 학교 친구, 직장 동료, 부부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공상 습관이 불만으로 이어질 때가 아주 많다. 따라서 타인의 공상은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볼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나'라는 존재가 환상에 비해 덜 흥미롭거나 덜 중요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쓸모 있는 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 시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매일 반복하는 몸이나 마음의 사소한 습관들... 실은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일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식들이라고. 우리를 타인과 연결해주고 괴로운 현실의 탈출구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우리 자신과 삶의 작은 부분들을 이끌어 가는 엄연한 (문화적) '행위'라고 이 책은 역설하고 있는데요. 한 폴란드 기자가 묘사한 가나의 시골 변두리 버스 정류장 풍경이 문득 떠오릅니다. 대화도 없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무엇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소변도 보지 않으면서 눈꺼풀과 입술에 달라붙는 날벌레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 목표지향적이고 속도지향적인 서구인은 가나인들의 기다리는 모습을 '심리적 수면 상태'에 비유했는데요. 오히려 저는 저 특별한 풍경이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열심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몰입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이 흘려버린 이야기를 줍고 있지. 당신이 모르는 노래를 듣고 있지. 당신은 평생 닿지 못할 해변을 달리고 있지.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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