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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ㅣ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에쿠니 가오리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무렵에 쓴 산문들을 한데 엮은 책입니다. 순수와 치기, 감미로운 상심, 갈망, 우울... 같은 젊은 시절 특유의 정서가 잘 살아 있네요. 이제는 중년의 문턱을 훌쩍 넘긴 작가의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목소리는 오래 닫혀 있던 마음속 다락의 문고리를 슬쩍 열어젖힙니다. 건조하고 탁한 공기를 휘젓고 다니면서 아무렇게나 놓인 잊혀진 물건들을 쓸어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면서 흘려보내는 고요한 오후의 기분에 잠기게 되네요. 안녕, 하고 인사하는 파리한 손바닥 같은 햇살. 떠도는 먼지 가운데 동그랗게 앉아, 사락사락, 빛바랜 노트를 넘기는 마음. 이것은 아스라한 기억 저편의 이야기.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거나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이야기.
어린 시절이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모든 것이 ㅡ 보고 듣고 만지는 것 모두 ㅡ 하늘에서 내려온다.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이 아이들 위로 그저 내려온다. 비처럼. 눈처럼. 햇살처럼. ( 〈진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중에서 )
제목 하나만으로 선택하게 되는 책들이 종종 있죠. 이 책이 그랬는데요. 어떤 식으로든 유년의 정서를 다루고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한데 기대가 크게 빗나갔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유년시절'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머무는 마음의 풍경'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바로 그런 마음의 풍경'을 불러내고 있는데요. 끼익끼익 시간의 태엽을 풀면서 걸어나오는 우리 안의 아이. 그 아이를 품고 어른의 얼굴을 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결혼이란 참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가장 되고 싶지 않은 여자가 되고 마는 일이다. 서글프다. ( 〈밤의 육교에서〉 중에서 )
우리는 너무 일찍부터 어른 노릇을 해왔던 것 아닌가 하고 억울한 심정이 됩니다. "어리광을 피우거나 아부하지 않"고 "등뼈를 반듯하게 세우고 있"기 위해 온 마음을 집중하던... 어른스러움을 흉내내면서 헛되이 보낸 시절들을 돌아보게 되네요.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책의 표지를 눈물처럼 흐르는 문장이 마음을 적십니다. 책에 담긴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거창한 사건이나 무거운 철학을 담고 있지 않아요. 작정하고 쓴 글이 아니라 무심히 떠가는 구름의 마음으로 씌여진 글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만큼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스쳐가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순간들에 떠오른 환희나 환멸, 애증, 불안이나 안도감 같은 것들을 경쾌한 문장으로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짧은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거기에 혼자 있다. 지금까지 아무도 온 적 없는 곳, 아무도 본 적 없는 풍경. 그 끝없이 넓은 곳에 덩그러니 서 있고 싶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서 있고 싶어서지 (...) 솔직히 빨리 돌아가고 싶은 오직 그 한 마음으로 걷는다. 어쩌다 내가 이런 곳에 왔을까 하고 단박에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다. 헤엄도 치지 못하면서 다이빙을 한 꼴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발로 걷고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본 것만을 쓰고 싶어 그곳에 가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착각과 전제가 하나도 없는 곳에 있고 싶다. 그곳이 제아무리 황량해도 나는 역시 거기에 있고 싶다. ( 〈왜 쓰는가〉 중에서 )
알록달록 종합 선물셋트 같은 책입니다.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어요. 읽다 보면 절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편하게 읽힌다는 말이지요. 슬픈 사연마저도 참으로 경쾌하고 뒤끝 없이 개운하게 전달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그중에서도 좋았던 부분은 3장의 독서일기들이었는데요. 간결하지만 섬세한 책 이야기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말랑말랑하면서 단단하고 현기증나도록 달곰한 양갱 맛이 나네요. 양갱을 맛보는 기분으로 조금씩 아껴 읽었습니다. 마지막 한 글자까지 다 읽고 나서 조금 헛헛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