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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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이의 이름은 현주였다. 현주에게선 늘 이상한 냄새가 났다. 지하실에서 백 년 정도 썩은 미미인형의 머리칼에서 풍길 법한 냄새였다. 실제로 현주네 집은 볕이 잘 들지 않았다. 정신지체를 가진 현주 어머니는 청결 의식이 부족했다. 그 집에 놀러 가면 자주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눈에 안 띄는 뭔가 밟히고 깨졌다. 내 친구들과 나는 그런 현주네 집이 편했다. 마룻바닥을 다다다 뛰어다니고 종잇조각을 찢어 날리면서 집안을 마구 어지럽혀도 혼내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우리들 세상이었다. 현주는 우리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 했다. 우리보다 두 살 어린 그 아이를 앉혀 놓고 냄새 나는 머리칼을 빗겨주었다. 연분홍색 크레파스로 볼연지도 찍어주었다. 거울 속에서 현주가 배시시 웃으면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없었다. 우리는 두꺼운 이불로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러면 현주는 느릿느릿 이불을 걷어내고는 또 바보 같이 웃었다. 그 모양을 보면 이상하게 분하고 약이 올랐다. 화도 안 내고 울지도 않는 현주는 진짜 인형 같았다. 우리의 장난은 점점 심해졌다. 어느 여름 날이었다. 교회에서 놀던 우리는 예배실 구석에서 벽장을 발견했다. 구겨진 방석과 작은 알전구들, 뒤얽힌 전선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 처박혀 있었다. 벽장 안에 들어간 우리는 문을 닫고 귀신 놀이를 했다. 완전한 어둠과 정적이 우리를 삼켰다. 한참을 그 안에서 놀다 시시해진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현주도 우리를 따라 나오려고 했다. 그때 우리 중 누군가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벽장 미닫이문을 꽉 붙들었다. 쿵. 쿵. 쿵쿵쿵. 그 다음에 비명 섞인 울음이 들렸다. 닫힌 문 뒤에서 현주 인형이 울고 있었다. 우리는 사악하게 웃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예수 같은 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참회하기 시작했다. 어둠 저편에서 현주가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붙는 시커먼 그림자를 떨궈내려는 듯이 막 달렸다. 골목을 내달리면서 나는 알았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보다도 무서운 것이 나 자신이었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이 언제나 타인에게 공감하고, 절대로 물건을 훔치지 않고, 등 뒤에서 배신하지도 않고, 남의 부인을 탐하지도 않는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지 않고, 그래서 도덕규칙이 필요하다. 한편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고 돌보라고 명하는 수백만 개의 규칙을 만들 수 있지만, 우리에게 그런 성향 자체가 없다면 그런 규칙들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이 책에서 도덕성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도덕성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종교나 이성, 문명에 앞서 우리 안에 내재한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영장류들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영장류 친구들을 소개한다. 관절염에 걸린 동료를 도와 나무를 오르는 침팬지들, 자기보다 낮은 가치의 보상을 받은 동료 침팬지를 보고 자신의 먹이를 거부하는 침팬지, 강제 섹스를 거부하는 암컷을 도와 수컷을 내쫓는 보노보 암컷들. 실수로 인간을 물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침팬지... 그들도 우리처럼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고, 동료들과 공감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불공평한 제안을 거부했다.
 
​   ​나는 침팬지 사회가 예외 없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이 유인원들은 먹이에서 섹스까지, 털 고르기에서 싸움 지원까지 호의와 냉대의 사회적 경제를 만든다. 그들은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기대와 의무를 발전시키는 듯하다. 따라서 신뢰를 깨면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본문 중에서)
​    책에 의하면 도덕성은 하찮은 동기로부터 기원했다. 포도를 받은 침팬지는 오이를 받은 동료 침팬지를 보고 왜 같이 파업을 선언하는가. 달아오른 수컷 보노보는 매력적인 암컷 보노보를 왜 우두머리 수컷에게 양보하는가. ​프란스 드 발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들이 일정한 사회적 법칙을 준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법칙을 깨뜨린 침팬지(또는 보노보)는 무리로부터 처벌 받는다. 영장류의 도덕 법칙을 이끄는 궁극적인 동력은 "무리에 통합되려는 욕망"이었다. 고립되거나 배제되면 생존 가능성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영장류처럼 사회적 연대에 가치를 두는 무리동물이다. ​진화하면서 우리는 "관계의 가치", "협력의 이점", "신뢰와 정직의 필요성" 따위를 본성적으로 알게 되었다. 프란스 드 발은 이 '자연화된 윤리학'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이 외부의 고상한 원칙(신성한 존재나 이성적 법칙)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창조론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양극성 유인원bipolar apes'이다. 기분이 좋을 때면 보노보처럼 친절하고, 기분을 잡치면 침팬지처럼 지배하려 들고 폭력적이 된다. (본문 중에서)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도덕성은 "불멸의 인간 본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조직하는 방식에 달렸다는 것이다. ​종교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프란스 드 발'은 "신의 비존재에 집착하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을 비난한다. 종교가 도덕성의 원천은 아니지만, 도덕성 단련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어딘가에 속하고, 함께 생활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우리의 욕구가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본문 중에서)
    한 편의 잘 만들어진 교양 다큐를 보고 난 기분이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책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세속적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과 도덕성에 관한 흥미로운 이론들, 종교와 과학의 역할에 대한 순수한 고찰까지 이 한 권의 책에 잘 녹아있다. 아. 영장류 친구들의 사진도 실려 있다. 내 시선은 오래 그들에게 머물렀다. 그들의 커다란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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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 발발....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하다가 침팬지 폴리틱스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현주 씨 보고 싶네요. 잘 있으려나요 ?
 
겪어야 진짜 - 어른의 어른 후지와라 신야가 체득한 인생배짱
후지와라 신야.김윤덕 지음 / 푸른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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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기자 김윤덕이 후지와라 신야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매끄럽게 읽힌다. 비교적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데도 부담스럽지 않다. 한국 아줌마다운 솔직한 질문과 신야의 넉살이 잘 버무러졌다. 기막히는 호흡이다. 다섯 시간 동안 이루어진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대화, 이런 공감, 이런 경이! 반짝, 환해지는 세계. 어딘가 넓고 깊어졌다는 기분이다.
  
   구두닦이를 했을 때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봤지요. 직업으로서도 아주 비천한 일이었습니다. 앉은 자세에서 노동하는 업종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젊은 시절, 세상의 가장 낮은 관점에서 세상을 올려다 봤습니다.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도쿄 시부야 거리를 걷다 보면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을 보면, 나는 이들이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 것 같습니다. (본문 중에서)
 
 
    신야의 민낯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한 권의 책에 모든 것이 담겼다. 규슈남아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부터 그 자신 곡절 많았던 사연들이 술술 풀려나온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는 솜씨가 놀랍다. 웬만한 소설보다도 재미있다. 편안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지혜로운 일본인 할아버지는 슬픔을 자랑하지 않는다. 젠체하지 않는다. 나는 여행지마다 애인들이 있어요.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무슨 자랑거리라도 말하는 아이처럼, 슬쩍 고백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진맥을 하더니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임종하실 것 같다"고 일러주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아버지의 인생을 정말로 축복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버지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카메라를 가져왔습니다. "아버지, 자, 치즈"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 물론 지금은 내가 선승인 양 죽음에 대해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당장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하고 발버둥칠지도 모르지요(웃음). 그건 여러분이 너그럽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도 사람이니까요. 하하! (본문 중에서)
 
 
   사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신야는 이 책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크게 두 가지 관점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찍을 것인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찍을 것인가. 첫 번째 방식은 사진 찍는 사람의 자아가 개입되는데, 이 경우 사진 찍는 쪽이 주체가 된다. 후자의 경우 이와 반대로 피사체가 주체가 된다. 이 대립되는 관점이 신야 세계관의 기본 골격이라고 보면 되겠다. 신야는 피사체를 주체로 하는 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는 왼쪽 눈을 렌즈에 대고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시력이 약한 왼쪽 눈이 좀 더 죽음 쪽에 가깝다고 여겨서라는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야말로 생명력 있는 삶이라는 역설로 들었다. 그는 생명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자연과 교감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눈앞의 현실을 묵묵히 살아낸다. 한마디로 야성적이다. 
 
   너무 이성적으로, 머리로 살려고 하지 말아요. 때때로 우리의 불행은 너무 많이 생각하는 데서 옵니다. 단순하게 사세요. 몸이 느끼는 대로, 야성을 지나치게 억누르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돼요. (본문 중에서)
      
   지난 밤, 티븨에서 조영남을 봤다. 늙었단 말 하지 마. 젊어서, 늙으면...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두 살 난 아이나 나나 지금이 가장 늙었어! 무슨 말 끝에 흥분해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이었는데, 자꾸만 나는 저 일본의 '규슈남아'가 떠올랐다. "늙었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당신은 늙기 시작한 겁니다." 나이 듦이 서글프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신야의 대답이다. 말에는 영혼이 담겨 있어서 그 말을 뱉는 순간 어휘들이 살아 움직인다나. (늙었다는) 생각에 갇히면 진짜 늙는다는 말일 것이다. 늙는다는 건 무엇인가. 무감해진다는 것이다. 신야는 사십 중반이 된 형이 더 이상 집 없는 고양이를 쓰다듬지 않아서 슬펐다고 고백한다. 어릴 땐 둘이 함께 고양이를 쓰다듬던 형이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의 중역은 집 없는 고양이를 만지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무감해진다는 건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야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걱정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평범합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아주 작은 것까지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평범함 속에 보물들이 잔뜩 묻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진짜 생명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사진을 통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인간성의 결여는 심각한 사회 문제들을 낳고 있다. 신야는 크고 작은 사회 문제들에도 관심이 크다. 부모와 반목하고 거리를 떠도는 십대 청소년들과 안전제일주의에 사로잡힌 청년들, 일본 대지진 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날카로운 현실 비판의 토대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었다. 다시, 조영남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단순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살라는 것이다. 동년배인 신야를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역시 책에서 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순간을 살라는 말은 사실 신선한 가르침은 아니다. 그런데 신야는 이 가르침을 말로 하지 않고 전생애를 통해 보여준다. 
 
   여행은 자기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는 뜻이지요. (본문 중에서)
 
   신야는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진 찍는 쪽의 마음이 렌즈 너머 상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사진 찍는 쪽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피사체도 마음을 허락하고 활짝 열어보인다는 것이다. 신야는 이 책에서 말보단 행동하는 삶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여러 번 무너졌다.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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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
미헬 파버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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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차예요! 저기, 빨간색 자동차. 저 여자 보여요? 예쁘죠. 가슴도 크고. 침 흘리지 마요. 저 여자,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 여성으로 위장한 외계인이라고요. 지구에 잠입한 목적이요? 먹고 살려고요. 사는 게 다 그런 거죠. 근데 무슨 외계인이 이래요. 너무 인간적이잖아. 초능력도 없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한다나 봐요. 알겠어요? 저 여잔 지금 일하고 있는 거라고요. 좋은 품질의 고기를 고르듯이 남자들을 선별해서 사냥하죠. 여자는 관심 없어요. 고기 맛은 남자가 끝내준다나. 사냥한 짐승(남자)은 농장에서 얼마간 사육되고 도살당해요. 끔찍하다고요? 촌스럽게 왜 그래요. 당신은 고기 안 먹고 살아요? 가공 처리된 고기는 저 여자 고향으로 보내져 비싼 값에 팔려나가죠. 저 여잔 하급 노동자인 셈이에요. 가장 밑바닥에서 죽어라 일만 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지요.
 
 
    이설리는 자신의 희생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기분이어서, 돌아가 일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를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 일은 좋은 치료제였다. (본문 중에서)
 
 
    이설리는, 저 여자 이름이 이설리에요, 자기 삶에 회의를 품기 시작해요. 하루 대부분을 도로 위에서 짐승들 사냥이나 하면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봐요.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짐승들 신상 파악하랴 비위 맞추랴, 외계인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발정난 짐승이 달려드는 건 또 어떻고요. 부자놈들이 뭘 알겠어요. 고상한 철학이나 지껄여대는 돼지 새끼들! 애써 사냥해 온 짐승들이 불쌍하다고 풀어주지를 않나. 진짜 못해먹겠는데, 일 안 하면 어떡해요,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설리는 오늘도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도로 한편에 세워진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아주 끔찍한 잔혹성에 토대를 두고 있더군요." "당신은 잔혹성이 뭔지도 몰라요." 이설리는 자신의 몸 안팎에서 이루어진 그 모든 난도질을 떠올리며 말했다. (...) "나는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의 내면이에요." 암리스는 계속 밀어붙였다. "아, 제발 부탁이에요, 암리스. 나에게 그런 헛소리는 통하지 않아요." (본문 중에서)
 
  
     아브라크 농장의 짐승(남자) 사육 시스템, 잔혹한 도축 장면, 부잣집 도련님 암리스와 이설리의 팽팽한 대립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워요. 남 일 같지 않거든요. 이건 SF의 탈을 쓴 르포 같은 분위기.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는 있겠는데요. 환상적인 SF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백퍼센트 실망할 것 같네요. 더럽게 현실적이거든요. 매혹적인 여성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남자를 사냥한다니까 뭔가 특별한 로맨스라도 숨어 있지 않나 기대하는 분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사냥만 해요. 뭔가 있겠지, 있을 거야, 그러면서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데. 죽어라 사냥만 해요. 소설의 상당 부분이 도로 위를 달리는 이설리의 짐승 사냥 과정에 할애되거든요. 특별한 사건도 흥미로운 대화도 없는 먹이 사냥의 반복. 이 무의미한 반복을 지켜보는 독자는 지루하고 고통스럽지만, 뭔가 있겠지, 하는 희망을 버리지도 못한 채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도로" 위를 달리게 되는데요. 끝내 도착한 곳은... 아. 공허! 지독한 공허감! 이게 다예요. 끝없는 허기를 잊기 위해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는 이설리와, 이를 지켜보는 독자의 지루한 희망이 만나 완성되는 한 편의 부조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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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같은 목소리
이자벨라 트루머 지음, 이지혜 옮김 / 여운(주)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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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지. 사람이란 어떤 일들은 금세 잊어버리고, 어떤 일들은 영영 잊지 않아.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인지 나는 모르겠어.

 

         ㅡ   영화 《사일런트 힐2 Silent Hill 2》 중에서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심리를 따라가는 이 작품은 언뜻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2013)을 연상케 하는데요. 뼈다귀를 숨긴 채 냄새만 풍기면서 독자를 개처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김영하의 방식에 비하면 이 소설은 단조롭고 착실합니다. 발병 초기인 2006년 봄부터 병세가 깊어지는 2014년 봄까지 순행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요.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신문을 읽으면서 소일하는 평범한 노년의 일상을 뒤흔드는 정서적 위기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어지러워진 머릿속으로 파고들어가 '기억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자벨라 트루머는 작품 의도에 대해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그프리트 그람바흐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 탄생한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인생담이나 병의 징후들, 가족 간의 대화 내용 같은 사실적 경험과 치매 환자의 의식 세계라는 상상의 산물을 결합하는 방식, 이른바 소설적 형식을 빌려 작가는 아버지의 붕괴된 세계를 재건하고 탐사합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그림자 같은 목소리’다. 힐데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고는 내게 뭐라고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도 그저 그림자 같다. (본문 중에서)

  

   지그프리트 그람바흐가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날 최초의 병적 징후(가벼운 공황 발작)를 보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흥겨운 음악과 뒤섞이는 웃음 소리, 대화들, 술잔 부딪치는 소리... 복작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생일의 주인공은 이상한 괴리감에 사로잡힙니다. 숨통을 죄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는 동시에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것인데요.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림자 같은 목소리'는 지그프리트 그람바흐가 경험하는 끔찍한 괴리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방 안이 어둡다. 여긴 무슨 방이지? 창문 틈으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두 발을 바닥에 딛자 건너편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저건 누구지? 아니, 여기가 어디야? 나직이 ‘이봐요!’ 하고 불러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좀 더 큰 소리로 불러봤다. 그는 화가 난 듯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본문 중에서)

 

     하필이면 생일날 최초의 발작을 시작한다는 소설적 설정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엄마의 자궁에서 내쫓긴 신생아의 불안과 치매 환자가 겪는 괴리감은 어떤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 같거든요. 지그프리트 그람바흐는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에 익숙한 세계로부터 추방당했다, 라고 소설을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서서히 자아가 무너져가는 치매 환자의 불안정한 의식 세계와 거리를 둘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언어능력과 현실감각을 상실한 주인공의 목소리는 뜻을 알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는데요. 이 '그림자 같은 목소리' 앞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이상한 괴리감과 마주하게 됩니다.

 

    은식마나 조아서. 마시서 조아. 체고야. 애들이 마니. 벌서 바브라 힐데야. 누구? 여자들 노러오며다서. 그니까 무러보는거 안조아. 최고 꽃 다바라야? 다바라야? 수자세어서 내가. 많이. 각고 싶어 지금. 발간거이는 좋아. 조오오오아. 모두 가족 들어와 손주들이. 괘자는가바. 한스? 우리에서니야 드러바. 오꺼야? 오느래나? 으으으응...... 나도 가래 가고 시버. 나도....... 내가 마래서 누가 사람울 저하래 자기가 웃기서...... 하하 누가 사람 누가...... (본문 중에서)

  

 

    얼마 전에 읽은 책 《나를 잊지 말아요》(문학동네,2014)도 떠오릅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경을 잘 그려낸 책이었는데요. 이처럼 치매 환자를 가족으로 둔 보호자의 고통을 다루는 책이 대부분이겠지요. 찢기고 뒤섞이고 흩어진 의식 속에, 아니, 어쩌면 의식 바깥에 있는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토로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이례적입니다. 치매 환자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운 점이 우선 놀랍고요. 작가의 아버지가 실제 치매 환자이고, 그런 아버지의 의식 세계를 상상으로 써 낸 이야기라는 것도 울림이 크네요. 이자벨라 트루머는 소설을 통해  '그림자 같은 목소리' 가 집어삼킨 아버지를 애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소설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녹아 있어요. 매혹적인 줄거리나 현란한 말발 없이도 독자의 마음을 잡아두기에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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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노먼 F. 매클린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소개하는 책은 영화의 원작이 된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 1992, 미국》과 두 편의 중, 단편을 싣고 있어요. 노먼 매클린이 말년에 써 낸 이 책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집인데요. 국내에서는 이 책이 첫 완역본입니다. 표제작을 제외한 두 편의 소설은 노먼 매클린이 청년 시절 산림청에서 임시 노동을 했던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산림청 관리와 벌목 일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이어지는데요. 특징을 잘 살려낸 인물 묘사와 삶의 희비극을 재치있게 다루는 솜씨가 지루함을 상쇄합니다. 두 편의 소설에는 크게 한탕 잡으려는 노름꾼들이 등장하는데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노름빚에 쫓겨 죽임을 당하는 동생 폴의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씌었다는 공통점 외에도 책에 실린 세 편의 소설들은 숨은 의미나 내용 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요. 연작 소설로 읽어도 무방해 보입니다.

    표제작 《흐르는 강물처럼》은 다소 밋밋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화자인 '나'가 가족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요. 소설적 긴장감이 없는 평면적인 구성이 답답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소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플라이 낚시 기술에 관한 묘사 역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데요. 이 부분은 크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낚시 기술은 이해를 요하지 않거든요. 낚시는 그저 이야기의 미끼일 뿐이니까요. 

  

   시인들은 '시간의 점(点)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영원을 순간으로 압추기켜 놓은 그 시간의 점을 실제로 체험하는 사람은 낚시꾼들이다. 온 세상이 물고기였던 순간이 있었으나 갑자기 그 물고기가 사라져버렸으니 그거야말로 시간의 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 도망친 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장남인 노먼과 동생 폴은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성장합니다. 아버지는 형제에게 '아름다움'만이 타락한 본성을 구원한다고 가르칩니다. 힘과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신의 리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요. 열렬한 낚시꾼이었던 아버지는 낚시야말로 신의 리듬을 구현하는 아름다운 동작이라고 확신합니다. 원칙적이고 감정 표현에 인색한 아버지는 플라이 낚시를 통해 두 아들과 교감을 나누는데요. 똑같이 아버지에게 낚시를 배운 두 아들은 전혀 다른 성향을 보입니다. 아버지에게 배운 네 박자 리듬을 벗어나지 않는 노먼과 달리 동생 폴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리듬을 타고 물고기를 낚아올립니다. 폴의 삶을 움직이는 리듬은 충동과 직관입니다. 본성에 충실한 그의 삶은 신의 대리자인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타락이지요. 타락한 폴은 그 자신의 본성 때문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폴의 죽음과 그를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태도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나는 거기 앉아서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렸으며, 마침내 흘러가는 강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만이 남았다. 강물 위에서 더위의 아지랑이들이 서로 춤을 추었고, 이어 서로 관통해 나가더니 다시 서로 손을 잡고서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마침내 강물을 바라보던 자는 사라져버리고 거기에는 오로지 강물만 남았다. (본문 중에서) 

 

     노먼 매클린은 이 소설에서 '강물'과 '낚시'라는 소박한 미끼를 던져서 삶의 의미들을 멋지게 포획합니다. 단단하고 유려한 문장에서 솟구쳐 오르는 생의 이미지들! 부서지는 햇살과 물고기, 젖은 돌멩이들. "영혼과 기억"과, 침묵, 그리고 말씀... 노먼 매클린의 '강물'에는 많은 것들이 잠겨 있습니다. 강물의 침묵 또는 말씀을 낚아올리는 것은 읽는 이 각자의 몫으로 남는데요. 여기에 바로 이 소설의 매력 아니, 마력이 있습니다.

​    낚시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낚시 행위 그 자체를 이 세상과 별도로 떨어진 하나의 완벽한 세계로 만들고 싶어한다. 나는 그 세계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때는 내 팔에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내 목구멍 속에 있고, 또 어떤 때는 깊숙한 곳 그 어디라는 느낌만 들 뿐 구체적으로는 어디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많은 낚시꾼들이 그 세계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면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좋은 낚시꾼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이 소설을 통해 노먼 매클린은 탁월한 낚시꾼임을 증명합니다. 단조롭게 흐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낚시의 진정한 의미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제 막 미끼를 물고 수면 위로 튕겨져 나온 물고기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제야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강물은 아주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참을 강둑에 서 있게 됩니다. 그래요, 완전히 낚이는 것이죠. 

   ​ 모든 것은 하나로 융합되고 그 속으로 하나의 강이 흐른다. 강은 세상의 대홍수에 의해 조성되었고, 시간의 근원에서 흘러나와 돌들 위로 흘러간다. 어떤 돌들에는 태곳적의 빗방울이 새겨져 있다. 그 돌들 아래에는 말씀들이 있고, 그중 어떤 것은 돌들의 말씀이다. (본문 중에서)

    ​"나는 언제나 강물 소리에 사로잡힌다." 소설은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크고 아름다운 물고기를 낚아 올린 낚시꾼의 기분이 이렇겠지요. 이 한 문장을 건져올리기 위해 그토록 많은 미끼가 필요한 거였구나.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흐르는 강물처럼》은 말보다는 음악에 가까워 보입니다. 말을 보탤수록 이 소설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여기까지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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