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차예요! 저기, 빨간색 자동차. 저 여자 보여요? 예쁘죠. 가슴도 크고. 침 흘리지 마요. 저 여자,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 여성으로 위장한 외계인이라고요. 지구에 잠입한 목적이요? 먹고 살려고요. 사는 게 다 그런 거죠. 근데 무슨 외계인이 이래요. 너무 인간적이잖아. 초능력도 없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한다나 봐요. 알겠어요? 저 여잔 지금 일하고 있는 거라고요. 좋은 품질의 고기를 고르듯이 남자들을 선별해서 사냥하죠. 여자는 관심 없어요. 고기 맛은 남자가 끝내준다나. 사냥한 짐승(남자)은 농장에서 얼마간 사육되고 도살당해요. 끔찍하다고요? 촌스럽게 왜 그래요. 당신은 고기 안 먹고 살아요? 가공 처리된 고기는 저 여자 고향으로 보내져 비싼 값에 팔려나가죠. 저 여잔 하급 노동자인 셈이에요. 가장 밑바닥에서 죽어라 일만 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지요.
이설리는 자신의 희생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기분이어서, 돌아가 일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를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 일은 좋은 치료제였다. (본문 중에서)
이설리는, 저 여자 이름이 이설리에요, 자기 삶에 회의를 품기 시작해요. 하루 대부분을 도로 위에서 짐승들 사냥이나 하면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봐요.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짐승들 신상 파악하랴 비위 맞추랴, 외계인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발정난 짐승이 달려드는 건 또 어떻고요. 부자놈들이 뭘 알겠어요. 고상한 철학이나 지껄여대는 돼지 새끼들! 애써 사냥해 온 짐승들이 불쌍하다고 풀어주지를 않나. 진짜 못해먹겠는데, 일 안 하면 어떡해요,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설리는 오늘도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도로 한편에 세워진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아주 끔찍한 잔혹성에 토대를 두고 있더군요." "당신은 잔혹성이 뭔지도 몰라요." 이설리는 자신의 몸 안팎에서 이루어진 그 모든 난도질을 떠올리며 말했다. (...) "나는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의 내면이에요." 암리스는 계속 밀어붙였다. "아, 제발 부탁이에요, 암리스. 나에게 그런 헛소리는 통하지 않아요." (본문 중에서)
아브라크 농장의 짐승(남자) 사육 시스템, 잔혹한 도축 장면, 부잣집 도련님 암리스와 이설리의 팽팽한 대립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워요. 남 일 같지 않거든요. 이건 SF의 탈을 쓴 르포 같은 분위기.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는 있겠는데요. 환상적인 SF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백퍼센트 실망할 것 같네요. 더럽게 현실적이거든요. 매혹적인 여성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남자를 사냥한다니까 뭔가 특별한 로맨스라도 숨어 있지 않나 기대하는 분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사냥만 해요. 뭔가 있겠지, 있을 거야, 그러면서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데. 죽어라 사냥만 해요. 소설의 상당 부분이 도로 위를 달리는 이설리의 짐승 사냥 과정에 할애되거든요. 특별한 사건도 흥미로운 대화도 없는 먹이 사냥의 반복. 이 무의미한 반복을 지켜보는 독자는 지루하고 고통스럽지만, 뭔가 있겠지, 하는 희망을 버리지도 못한 채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도로" 위를 달리게 되는데요. 끝내 도착한 곳은... 아. 공허! 지독한 공허감! 이게 다예요. 끝없는 허기를 잊기 위해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는 이설리와, 이를 지켜보는 독자의 지루한 희망이 만나 완성되는 한 편의 부조리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