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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같은 목소리
이자벨라 트루머 지음, 이지혜 옮김 / 여운(주) / 2014년 5월
평점 :
이상한 일이지. 사람이란 어떤 일들은 금세 잊어버리고, 어떤 일들은 영영 잊지 않아.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인지 나는 모르겠어.
ㅡ 영화 《사일런트 힐2 Silent Hill 2》 중에서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심리를 따라가는 이 작품은 언뜻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2013)을 연상케 하는데요. 뼈다귀를 숨긴 채 냄새만 풍기면서 독자를 개처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김영하의 방식에 비하면 이 소설은 단조롭고 착실합니다. 발병 초기인 2006년 봄부터 병세가 깊어지는 2014년 봄까지 순행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요.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신문을 읽으면서 소일하는 평범한 노년의 일상을 뒤흔드는 정서적 위기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어지러워진 머릿속으로 파고들어가 '기억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자벨라 트루머는 작품 의도에 대해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그프리트 그람바흐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 탄생한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인생담이나 병의 징후들, 가족 간의 대화 내용 같은 사실적 경험과 치매 환자의 의식 세계라는 상상의 산물을 결합하는 방식, 이른바 소설적 형식을 빌려 작가는 아버지의 붕괴된 세계를 재건하고 탐사합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그림자 같은 목소리’다. 힐데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고는 내게 뭐라고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도 그저 그림자 같다. (본문 중에서)
지그프리트 그람바흐가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날 최초의 병적 징후(가벼운 공황 발작)를 보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흥겨운 음악과 뒤섞이는 웃음 소리, 대화들, 술잔 부딪치는 소리... 복작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생일의 주인공은 이상한 괴리감에 사로잡힙니다. 숨통을 죄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는 동시에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것인데요.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림자 같은 목소리'는 지그프리트 그람바흐가 경험하는 끔찍한 괴리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방 안이 어둡다. 여긴 무슨 방이지? 창문 틈으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두 발을 바닥에 딛자 건너편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저건 누구지? 아니, 여기가 어디야? 나직이 ‘이봐요!’ 하고 불러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좀 더 큰 소리로 불러봤다. 그는 화가 난 듯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본문 중에서)
하필이면 생일날 최초의 발작을 시작한다는 소설적 설정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엄마의 자궁에서 내쫓긴 신생아의 불안과 치매 환자가 겪는 괴리감은 어떤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 같거든요. 지그프리트 그람바흐는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에 익숙한 세계로부터 추방당했다, 라고 소설을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서서히 자아가 무너져가는 치매 환자의 불안정한 의식 세계와 거리를 둘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언어능력과 현실감각을 상실한 주인공의 목소리는 뜻을 알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는데요. 이 '그림자 같은 목소리' 앞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이상한 괴리감과 마주하게 됩니다.
은식마나 조아서. 마시서 조아. 체고야. 애들이 마니. 벌서 바브라 힐데야. 누구? 여자들 노러오며다서. 그니까 무러보는거 안조아. 최고 꽃 다바라야? 다바라야? 수자세어서 내가. 많이. 각고 싶어 지금. 발간거이는 좋아. 조오오오아. 모두 가족 들어와 손주들이. 괘자는가바. 한스? 우리에서니야 드러바. 오꺼야? 오느래나? 으으으응...... 나도 가래 가고 시버. 나도....... 내가 마래서 누가 사람울 저하래 자기가 웃기서...... 하하 누가 사람 누가...... (본문 중에서)
얼마 전에 읽은 책 《나를 잊지 말아요》(문학동네,2014)도 떠오릅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경을 잘 그려낸 책이었는데요. 이처럼 치매 환자를 가족으로 둔 보호자의 고통을 다루는 책이 대부분이겠지요. 찢기고 뒤섞이고 흩어진 의식 속에, 아니, 어쩌면 의식 바깥에 있는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토로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이례적입니다. 치매 환자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운 점이 우선 놀랍고요. 작가의 아버지가 실제 치매 환자이고, 그런 아버지의 의식 세계를 상상으로 써 낸 이야기라는 것도 울림이 크네요. 이자벨라 트루머는 소설을 통해 '그림자 같은 목소리' 가 집어삼킨 아버지를 애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소설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녹아 있어요. 매혹적인 줄거리나 현란한 말발 없이도 독자의 마음을 잡아두기에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