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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술시간, 정물화를 그린다. 쟁반 위의 과일 몇 개, 똑같은 것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했고, 색을 입혔다.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확인한 바에 의하면 50명의 그림은 달랐다. 같은 것을 혹은 비슷한 것을 바라보는데, 어찌 그들의 그림은 다른 것일까? 그들은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것을 보기 때문을 아닐까.
촘스키와 푸코의 토론을 지면으로 확인하면서 비슷한 의문이 생겼다. 두 학자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왜 다른가? 억지스러울지 모르나 50명의 그림이 조금씩 혹은 제각각이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까? 그렇다면, 두 분의 어르신은 보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발화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네덜란드, 1971년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 '인간성'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언어와 정치의 관계, 담론분석에 있어 권력의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오간다. 팔은 안으로 굽을 때 자연스럽다고 했던가. 내 마음대로 안으로 굽는 팔에 해당하는 푸코의 입장에 훨씬 많은 밑줄을 긋는다.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이다.
"진리는 권력과 무관하다거나 권력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그 기능과 역사가 의심스러운 신화에 따르면, 진리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보답이고, 오래 견딘 고독의 자식이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제약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주기적인 효과를 유도합니다. 각 사회는 진리의 체계가 있고, 진리의 '일반 정치학'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받아들여 진리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담론 유형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우리가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둔 셈이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정의'의 개념에 대해 내 안으로 굽는 팔인 푸코는 다시 이렇게 주장한다.
"제가 보기에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 경제 권력의 지배 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소쉬르가 언어를 기호라고 했을 때, 내가 소쉬르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의'의 정의로 가장 알맞은 것이라고 나 역시 합의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알아서 열광적으로.
여튼, 이 주장에 관해 촘스키는
"저는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당신이 그 근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곤란해질 겁니다.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진정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까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라고 응수한다. 이렇게 두 어르신의 입장 차이를 놓고 보는 일은 한 번도 제대로 궁리해보지 못한 논제들을 끙끙거리며 생각해야 한다는 귀찮음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흥미롭다. 잠시 내 성향이 의심스러운 대목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촘스키는 뭔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사회를 진단한다면, 푸코는 철저히 현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따라서 촘스키를 관념론과 연결지을 수 있다면, 푸코는 경험론에 줄을 댈 수 있겠다.
이쯤되면 무엇을 말하든 두 어르신은 흥미진진하게 대립각을 세우겠지만, '인간성'과 '사회의 진보'라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방점을 찍고 있는 두 어르신 덕분에 독자는 위의 주제들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셈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선행학습이 없다면 쉽게 읽힐 책이 아닐 수도 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혹여 이 책을 읽으실 분들 중에 나와 같이 선행학습이 부재하다면, 책의 1장부터 읽지 말고 2장부터 6장까지 촘스키와 푸코가 각각 주장한 내용을 먼저 읽고, 마지막으로 1장을 읽으면 훨씬 수월하게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읽었다. 몰랐으니까. 무지는 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