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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0
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어느 가수의 노래였는지, 시인의 글이었는지, 혹은 드라마 대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저 무슨 위로가 마땅하지 않을 때, 가벼이 등 토닥이며 쓰기에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무런 고민없이 내뱉었던 무책임한 그말이 참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았을 때는 내 자신 [아플 만큼 아프고도 여전히 그만그만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무엇이든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하고 볼일이다.
여튼,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의 작품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읽으며, 저 문구가 떠올랐던 이유는 주인공 캉디드의 스승인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놀라운 언술때문이었다.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나! 요즘 유행하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생 역정 누가누가 제일인가] 경합이라도 벌이는 것 같은 주인공들의 상황앞에서도 끊임없이 [최선의 세계]를 운운하는 철학자라니, 또 그것을 무슨 진리로 받들어 [스승이 말씀하시길, 세상은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읖조리는 주인공을 어찌할 수 있을까. 또 한 번 어머나!
그러나 이 철학 꽁트는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그렇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대략 그렇게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을 떠드는 사람은 한 번 의심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생각으로 밀고나간 [믿음]은 헛것이자 공포라는 것.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게 더 최악의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검둥이 해적들한테 백번 겁탈당하는 것, 한쪽 엉덩이를 잘리는 것, 불가리아인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것, 종교 화형식에서 죽도록 매 맞은 다음 교수형당하는 것, 교수형당한 후에 다시 해부당하는 것, 그리고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 이라는 상황속에 모든 주인공들을 한 번씩 담근 후 묻는다.
"낙관주의가 뭔데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볼테르는 말한다.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즉,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믿는 것은 광기다.
이 철학 꽁트를 더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치의 낙관주의를, 루소를, 더 나아가 종교전쟁을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기괴한 역사를 알면 더욱 흥미진진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몰라도 찾을 수 있는 재미는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발견한 최선의 세상 3곳]이라던가, [몰락한 여섯 왕들과의 식사] 라던가, [알고도 당하는 사기는 무엇무엇이더라]던가, [사랑이라는 기막힌 환상은 누구를 위해 뻥을 치나]등. 그 재미는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다. 모든 세계문학전집이 라면냄비 받침으로 존재하려고 인쇄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 무릎을 치게 하는 작품도 간혹 있다. 이 책이 그렇다.
21세기, 낙관도 비관도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절을 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비아냥이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초석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내가, 암울한 시절을 살아낸 사상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책을 읽는 내내 낄낄거렸다. 그저 낄낄거렸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느끼는 허무함에 대한 또다른 조롱일 것이다. 역시나 내 한심함은 강에 유람선 띄우려는 이들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역사적 사명을 띄고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허무와 냉소로 좋은 시절을 다 보낼 일이 아니다. 진득하니 끈기있게 때로는 오기스럽게 무엇이든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도 하지만, 찾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공부]의 목적은 [행동]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는 어딘지 세련되지 못한 주인공의 발언이 오늘 나를 깨운다. 또다른 계몽이자 볼테르의 재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