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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5
토머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에너지를 측정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실험실 안에 낭만적 사랑에 감염된 두 남녀를 몰아넣고 현실적으로 이용가능한 장치를 모조리 사용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이 뿜어내는 기이한 기운들을 납득가능한 무엇인가로 치환해서 읽고 싶었다. 물론, 이런 결심이 자다가 일어나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이 어리석고 기괴한 실험을 하고야 말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는, 매번 누군가, 친구건, 선배건, 후배건, 내가 권장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말리기까지 한 연애로부터 고통받고, 그 고통을 나와 함께, 유독 나와 함께 나누려고 할 때,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마다 나는 귀찮음을 넘어 매번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사랑따위가 실제하느냐? 실제하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얼마나 대단하냐? 그것이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에너지냐? 4천만의 사랑 에너지로 원자력 발전소 하나는 갈아치울 수 있냐? 뭐, 이런 비아냥거리는 물음을 달고 살았었다.
그렇지만, 고백하자면, 난들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홍역처럼 무덤까지 따라간다는 그 사랑, 낭만적인 사랑의 기운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또 다시 고백하자면, 내앞에서 오만가지 추태를 부렸던 녀석들보다 그 끝이 난들 우아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정도와 할 수 없는 정도까지 땡겨와서 철저히, 누구보다도 나를 괴롭혔다.
여튼, 이 책의 주인공, 테스, 그녀를 내 무릎에 올려놓고, 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해 곱씹었다. 그냥 사랑도 아닌 낭만적 사랑! 자, 그럼 그냥 사랑이 아닌 낭만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여러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중에도 으뜸은 [나와 온전히 결합할 수 있는 타자가 이 지구상에 오직 한 사람만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낭만적 사랑은 지구를 탈탈 털어 나오는 단 한 사람과 오직 한 번만 나눌 수 있는 기가찬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오호~ 이런 무자비한 환상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마도 신화려나, 여튼 정확한 근원을 알 수 없으나, 이런 환상이 어떤 바이러스 보다 무섭게 떠돌고 있음은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낭만적 사랑의 결실을 결혼이라고 단정짓는 철딱서니 없음 역시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흠결없는 사랑, 낭만적 사랑을 지향하는 마음은 낭만이라는 단어로는 도무지 연상할 수 없는 무자비함을 품고 있다. 그것은 평생에 단 한 번 오직 그대여야 한다,는 미명하에 타자의 어떤 결함도 인정하지 않는 옹졸함과 유치함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나는 서로에게, 특히 여성에게 부과되는 순결에 대한 강박이 이 유치함과 맞물린다고 본다. 그러니, 낭만적 사랑을 꿈꾼 클레어가 테스의 고백을 듣고, 그렇게나 싸한 얼굴로 그녀를 떠난 것을 어찌 이해할 수 없겠는가. 그의 유치함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오히려 테스옆에 달라붙어 본인도 죽이고, 그녀도 죽이는 진상을 떨지 않고 일찌감치 짐싸서 떠나는 클레어에게 내심 박수를 치고 싶었다. 1라운드만 하고 끝내는 것, 그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기에 말이다.
이제 알렉을 보자. 알렉은 모든 독자에게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갖고 싶은 여인을 강제로 취했고, 어느 정도 애원은 했다고 하지만 방치했고, 뒤늦게 나타나 다시 그녀를 자신의 삶에 끌어들여 테스를 죽음으로 인도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알렉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럴 수 있다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고, 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누구나의 바램과는 무관하게, 그것 자체가 열병이고 변덕스럽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사랑에 자꾸 도덕적인 무엇을 부과하려는 것이 우스운 일이 아닌가 싶다. 언제부터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책임졌단 말인가. 사랑이 연애로, 연애가 결혼으로, 결혼이 부부를 만든다는 공식은 적어도 1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도식이다. 오히려 그렇게 한 번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고 나를 온통 책임져 달라고 말하는 것이 염치없는 짓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순결을 거래하게 만드는 일은 아닐까 싶다. 뭔가 그 정도의 희귀한 상품쯤은 내주어야 내가 너를 평생 구제하겠노라. 뭐 이런.
어쩌다가 이렇게 삐딱한 마음을 다 털어놓는지 나도 모르겠으나, 나는 알렉도, 테스도, 클레어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다. 알렉은 끓어오는 열병으로서의 사랑을 어찌 할 수 없었고, 테스는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클레어가 더 좋은 것 같기는 하고, 클레어는 낭만적 사랑에 드리워진 흠결을 참을 수 없고.
물론 작가가 테스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사랑만은 아니다. 종교, 사회, 교육, 자본, 노동자 계급에 대해 조목조목 건드리면서 끊임없이 아젠다를 던져주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끊임없이 테스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이유는 정녕 모르겠다. 아름다움이 무슨 희귀한 병도 아닌데, 그것이 비극을 이끌어낸 단초나 되는 것처럼 집요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안쓰럽기 까지 했다. 21세기,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은 순결에 대한 강박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더 심한 시절이다. 그런데 이런 고전, 지푸라기를 뒤집어 쓰고도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다고 노래하는 이 책, 아~ 이 책을 어쩌란 말이냐. 나는 무엇보다 테스의 아름다움이 목놓아 싫었노라고. 심지어 그 부모보다 싫었노라고 외치고 싶다. 아름다운 것은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이 불량스러운 암시.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천수를 누릴 것 같은 나의 삶은,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