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와 그 인근에 있는 유적지를 보러 가다-
21,22일 청주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방학 내내 종종 걸음을 치는 바람에 21일 독립 기념관을 둘러 보려던 계획은 날아가고 오후 늦게 도착해서 청주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22일 백제 문화권 답사에 참가 했다. 눈을 흘기며 아쉬워 하는 친구가 태워준 차를 타고 청주 롯데 마트 앞에서 아침 일찍 일행들을 만나 답사지로 출발했다.
처음 간 곳은 정송강사.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정철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관동별곡,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일부가 유물 전시실에 걸려 있다. 관동별곡에 나오는 "연추문 돌아드니 경회...."구절을 보고 현주는 경복궁 답사 해설사 과정을 들을 때 들은 얘기를 해 준다. 대신들이 궁궐을 드나 들 때 궁궐 정문이 아니라 연추문을 통해 돌아들어가 임금을 뵈었단다. 정철 선생의 영정을 보니 오래전에 송강정에 갔을 때 내가 떠올렸던 정철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나는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 모습을 떠올렸는데, 영정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딱 ’정치인‘ 같은 모습이다. 사당 뒤에는 묘소도 있는데 늦게 온 회원들 때문에 답사가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사당만 둘러 보고 왔다. 그리고 원래 묘소는 경기도에 있었는데 후대에 정철과 같은 서인이던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현재의 자리로 묘소를 이전하고 사당도 건립을 했다고 한다. 사당이 있는 곳은 한 눈에 봐도 명당자리 같다. 추운 날인데도 볕이 발라 따뜻하다.

정송강사를 답사하고 있는 사람들
두 번째로 간 곳은 조선 인조 때의 명신 최명길의 묘소. 이 분은 청나라가 우리 나라를 침입했을 때 안으로는 명을 섬기더라도 겉으로 청과 손을 잡자고 했던 주화론을 주장했던 분이다. 이 곳에는 묘가 3기가 있다. 가운 큰 무덤이 최명길 선생의 묘고 오른쪽 왼쪽에 본처와 첩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 있다.묘 양쪽에는 각각 문인석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는데 망주석에 새겨진 조각이 독특하다. 오른쪽에 새겨진 것은 다람쥐(왼쪽 조각은 도마뱀 같기도 하다)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고 왼쪽 망주석은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이다. 현주와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궁리를 하다가 미륵 부처님의 손 모습을 보면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추측만 했다

양쪽 회색 묘 가운데 약간 밝은 누런색을 띤 묘가 명신 최명길의 묘
점심 식사를 하기 전에 한 군데를 더 들렀다. 청주 박물관, 예전에 친구랑 친구 아들래미 윤수랑 함께 왔던 곳이다. 그때는 대충 쓰윽 훑어보고 왔는데 이번 답사에서 귀중한 유물들을 보고 왔다.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미륵보살반가석상).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것을 이 곳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는데 사각은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碑像)형태이다. 이 유물들을 만든 연대가 백제가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는 673년으로 추정되고 있어 백재의 석조미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한다.
먼저 계유명전시아미타삼존석상(우리 나라 문화재 이름은 너무 어렵다.)뒷면에는 거울을 설치하지 않아 새겨진 조각을 알 수 없지만 앞면과 양 옆면에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 새겨진 조각은 약간 훼손 돼긴 했지만 백제인들의 예술 수준을 가늠하기에는 어렵지 않다.앞면의 조각을 보면 커다란 연꽃 대좌에 설법할 때는 부처님 모습의 본존불이 앉아 계시고 양 옆에 각각 협시보살 한 분과 인왕상이 새겨져있다. 협시보살에 목에 건 구슬 모습이 뚜렷하게 보일만큼 조각이 섬세하다. 협시보살과 본존불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다. 부처님 뒤로는 불꽃 무늬가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본존불과 첫째 불꽃사이에는 다섯분의 작은 부처가 앉아있다. 그리고 그 뒤 불꽃 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불꽃 밖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작은 사각 돌덩이에 수많은
이야기를 아름답게 새겨넣은 백제인들의 솜씨가 놀랍다.다른 회원들이 다른 유물들을 보려 이동할 때 나는 혼자 남아 이 불비상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우리 조상들은 진정한 멋을 아는 분들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
점심을 먹고 청주 중심가에 생뚱맞게 서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을 보러 갔다.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그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고,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주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고 한다. 당간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우리 나라에서만 독특하게 유행한 것이라는데 불교가 전래 되기 이전 우리 나라의 재배원리였던 소도 신앙과 융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단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철당간은 이곳과 안성 칠장사, 공주 갑사 3군데에만 남아 있어 보기 드문 유적이란다.
용두사지는 이미 상가가 들어선 자리 밑으로 들어가고 보물로 지정된 철당간만 서 있다. 옆에 청주 백화점이 있는 번화가라 시끌벅적하다. 앞 점포 엠프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해설하시는 분 말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데 지금은 20개만 남아 있다. 세 번째 철통 표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동기와 과정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광종 13년에 만들어진 것이란다. 철당간의 규모로 보아 아주 큰 사찰이었던 모양인데 시내 중심가 자리를 잡고 있어 터 조차 매몰되고 없다. 그리고 그 근처 중앙공원 내에 있는 병마절도사 영문과 망선루를 답사했다. 영문은 청주읍성 안에 있던 병마절도사 영으로의 출입문인데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오인되어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단다. 이 문의 원래 이름은 정곡루로 추정된단다. 공원에 몇백년 된 나무들이 많다. 그런데 50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는 구멍이 숭숭 뚫린 곳에 시멘트로 메워져 있다. 은행나무가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구멍으로 벌레가 들어가서 나무를 갉아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란다.
무심천변(내의 이름조차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에 있는 용화사에 갔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사찰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고려시대 석불로 추정되는 유물 7기와 새로 조성된 석불 3기가 안치되어 있다. 그래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법당 안이 꽉 찬 듯한 느낌이 든다.이곳에 고려시대 석불 7기가 안치되게 된 설화가 재미있다. 1901년 엄비의 꿈에 청주에서 7체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해서 꿈을 깬 후 청주를 찾아가 서북쪽 냇가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집을 지어준 것이 용화사라고 한다.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설화들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곳에 안치된 석가모니불의 얼굴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백제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후덕한 인상의 미륵 같다. 둥글넙적한 옆집 할머니 같기도 하고 옆집 아주머니 같기도 한 친근한 얼굴을 하고 계신다.
(용화사에 모셔진 고려시대 유물들로 추정되는 석불상 7기와 새로 조성돈 3기위 불상들)
흥덕사지와 흥덕사지 근처에 지으진 고인쇄박물관을 들렀다. 이 곳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냈단다. 아쉽게도 한 권은 찾을 수 없고 한권은 프랑스의 루브로 박물관 동양 유물실에 보관되어 있지만. 1월 경상도 답사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스님들이 지업에 종사하기 힘들어 절 문을 많이 닫았다고 한다.그래서 언양에 있는 간월사지 같은 절이 폐사가 되었다는데.이곳은 폐사지가 된 까닭은 아직 밝혀 지지 않았고 다만 아파트 지을 터를 고르다가 우연히 흥덕사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공양 시간을 알리는 징 모양의 종) 발견되어 이 곳에 흥덕사지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인쇄박물관에서 금속활자를 만들고 글자를 찍어내는 과정들을 둘러보고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제고분들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는 신봉동 백제고분군에 가기로 했으나 시간이 늦어 생략하고(다행히 친구 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안 둘러봐도 그다지 아쉽지는 않다. 다음에 친구집에 올 때 둘러보기로 했다.) 정북동 토성을 보러 갔다. 논밭 한 가운데 정사각형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한강 주변에 조성된 풍납토성처럼 이 토성도 가까운 곳에 미호천이 흐르고 있단다. 여기서 보니 상당 산성이 바라다 보인다. 아래서 볼 때는 토성이 아니라 야트마한 언덕 같은데 위로 걸어보니 제법 높다. 토성이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해 보니 서기 108년정도 된다는데 2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유실이 되었다면 두 배정도의 높이가 되었겠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데도 불구하고 토성 안 쪽이 아니라 토성 위를 거닐었다. 줄줄이 서서 바람을 맞으며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논밭 가운데로 난 길을 따가 답사 가는 길에 본 정북동 토성)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추운 날씨였지만 부산처럼 바람이 쌩생불어 대지 않아 답사는 할 만 했다. 그리고 자주 접할 수 없는 백제 문화권의 귀중한 유물들을 볼 수 있어 뜻깊었다. 올 겨울 방학동안 일본의 유적지 답사를 계획 했었지만 못했다. 그렇지만 아쉽지는 않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답사를 두 번이나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