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선생님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요즘 볼만한 영화들이 많길래 약속 장소를 서면 CGV로 정해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학생들 수업을 끝나고 나니 6시 20분, 허겁지겁 약속 장소로 가서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메종 더 히미코’를 보기로 했다  ‘게이샤의 추억’을 보려고 했는데 너무 늦게 만나 밥 먹고 나서 이야기 할 시간도 없이 바로 영화를 봐야 돼서 시간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해서 보았다


  일본 영화는 웬지 ‘성적인 느낌’이 강해 이상하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는 한 선생님의 말을 귓전으로 들으며 영화를 봤다. 게이들의 이야기였다. 요즘 부쩍 동성애를 다룬 영화가 많이 상영되고 있다. 왕의 남자, 중국에서 상연 금지 당했다던 브로크백마운틴.


  메종 드 히미코는 히미코라는 사람이 만든 게이들의 양로원이다. 결혼을 했지만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가족의 등져야했던 사람들도 있고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피해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게이에 대해 편견이 많은 모양이다. 옆 마을에 사는 중학생들조차 지나 다니면서 양로원 건물에 낙서를 하고 게이를 보면 괴상한 볼거리라도 생긴듯이 히히덕 거리며 지나다닌다. 그리고 히미코에서 지내던 한 게이가 쓰러져 가족들의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게이임을 알게 되면 자식들이 충격을 받고 모셔가지 않을 까봐 끝까지 게이임을 밝히지 않고 보낸다.


  그런데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이라는 사실만 다를 뿐 보통 사람들과 똑 같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은 변태(?) 취급을 하곤 해서 수많은 게이들이 세상과 격리되어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었다.  주인공 사오리가 용서할 수 없다던 게이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동정으로 동정에서 연민으로 바꾸어 갈 때 그 영화를 보고 있던 나도 게이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오랜만에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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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와 그 인근에 있는 유적지를 보러 가다-

   21,22일 청주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방학 내내 종종 걸음을 치는 바람에 21일 독립 기념관을 둘러 보려던 계획은 날아가고 오후 늦게 도착해서 청주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22일 백제 문화권 답사에 참가 했다. 눈을 흘기며 아쉬워 하는 친구가 태워준 차를 타고 청주 롯데 마트 앞에서 아침 일찍 일행들을 만나 답사지로 출발했다.

  처음 간 곳은 정송강사.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정철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관동별곡,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일부가 유물 전시실에 걸려 있다. 관동별곡에 나오는 "연추문 돌아드니 경회...."구절을 보고 현주는 경복궁 답사 해설사 과정을 들을 때 들은 얘기를 해 준다. 대신들이 궁궐을 드나 들 때 궁궐 정문이 아니라 연추문을 통해 돌아들어가 임금을 뵈었단다. 정철 선생의 영정을 보니 오래전에 송강정에 갔을 때 내가 떠올렸던 정철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나는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 모습을 떠올렸는데, 영정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딱 ’정치인‘ 같은 모습이다. 사당 뒤에는 묘소도 있는데 늦게 온 회원들 때문에 답사가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사당만 둘러 보고 왔다. 그리고 원래 묘소는 경기도에 있었는데 후대에 정철과 같은 서인이던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현재의 자리로 묘소를 이전하고 사당도 건립을 했다고 한다. 사당이 있는 곳은 한 눈에 봐도 명당자리 같다. 추운 날인데도 볕이 발라 따뜻하다.


                           정송강사를 답사하고 있는 사람들
 

두 번째로 간 곳은 조선 인조 때의 명신 최명길의 묘소. 이 분은 청나라가 우리 나라를 침입했을 때 안으로는 명을 섬기더라도 겉으로 청과 손을 잡자고 했던 주화론을 주장했던 분이다. 이 곳에는 묘가 3기가 있다. 가운 큰 무덤이 최명길 선생의 묘고 오른쪽 왼쪽에 본처와 첩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 있다.묘 양쪽에는 각각 문인석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는데 망주석에 새겨진 조각이 독특하다. 오른쪽에 새겨진 것은 다람쥐(왼쪽 조각은 도마뱀 같기도 하다)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고 왼쪽 망주석은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이다. 현주와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궁리를 하다가 미륵 부처님의 손 모습을 보면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추측만 했다


                양쪽 회색 묘 가운데 약간 밝은 누런색을 띤 묘가 명신 최명길의 묘
 점심 식사를 하기 전에 한 군데를 더 들렀다. 청주 박물관, 예전에 친구랑 친구 아들래미 윤수랑 함께 왔던 곳이다. 그때는 대충 쓰윽 훑어보고 왔는데 이번 답사에서 귀중한 유물들을 보고 왔다.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미륵보살반가석상).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것을 이 곳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는데 사각은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碑像)형태이다. 이 유물들을 만든 연대가 백제가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는 673년으로 추정되고 있어 백재의 석조미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한다.

먼저 계유명전시아미타삼존석상(우리 나라 문화재 이름은 너무 어렵다.)뒷면에는 거울을 설치하지 않아 새겨진 조각을 알 수 없지만 앞면과 양 옆면에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 새겨진 조각은 약간 훼손 돼긴 했지만 백제인들의 예술 수준을 가늠하기에는 어렵지 않다.앞면의 조각을 보면 커다란 연꽃 대좌에 설법할 때는 부처님 모습의 본존불이 앉아 계시고 양 옆에 각각 협시보살 한 분과 인왕상이 새겨져있다. 협시보살에 목에 건 구슬 모습이 뚜렷하게 보일만큼 조각이 섬세하다. 협시보살과 본존불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다. 부처님 뒤로는 불꽃 무늬가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본존불과 첫째 불꽃사이에는 다섯분의 작은 부처가 앉아있다. 그리고 그 뒤 불꽃 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불꽃 밖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작은 사각 돌덩이에 수많은 

이야기를 아름답게 새겨넣은 백제인들의 솜씨가 놀랍다.다른 회원들이 다른 유물들을 보려 이동할 때 나는 혼자 남아 이 불비상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우리 조상들은 진정한 멋을 아는 분들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

점심을 먹고 청주 중심가에 생뚱맞게 서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을 보러 갔다.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그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고,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주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고 한다. 당간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우리 나라에서만 독특하게 유행한 것이라는데 불교가 전래 되기 이전 우리 나라의 재배원리였던 소도 신앙과 융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단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철당간은 이곳과 안성 칠장사, 공주 갑사 3군데에만 남아 있어 보기 드문 유적이란다. 

 

용두사지는 이미 상가가 들어선 자리 밑으로 들어가고 보물로 지정된 철당간만 서 있다. 옆에 청주 백화점이 있는 번화가라 시끌벅적하다. 앞 점포 엠프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해설하시는 분 말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데 지금은 20개만 남아 있다. 세 번째 철통 표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동기와 과정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광종 13년에 만들어진 것이란다. 철당간의 규모로 보아 아주 큰 사찰이었던 모양인데 시내 중심가 자리를 잡고 있어 터 조차 매몰되고 없다. 그리고 그 근처 중앙공원 내에 있는 병마절도사 영문과 망선루를 답사했다. 영문은 청주읍성 안에 있던 병마절도사 영으로의 출입문인데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오인되어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단다. 이 문의 원래 이름은 정곡루로 추정된단다. 공원에 몇백년 된 나무들이 많다. 그런데 50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는 구멍이 숭숭 뚫린 곳에 시멘트로 메워져 있다. 은행나무가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구멍으로 벌레가 들어가서 나무를 갉아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란다. 

  무심천변(내의 이름조차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에 있는 용화사에 갔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사찰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고려시대 석불로 추정되는 유물 7기와 새로 조성된 석불 3기가 안치되어 있다. 그래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법당 안이 꽉 찬 듯한 느낌이 든다.이곳에 고려시대 석불 7기가 안치되게 된 설화가 재미있다. 1901년 엄비의 꿈에 청주에서 7체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해서 꿈을 깬 후 청주를 찾아가 서북쪽 냇가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집을 지어준 것이 용화사라고 한다.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설화들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곳에 안치된 석가모니불의 얼굴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백제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후덕한 인상의 미륵 같다. 둥글넙적한 옆집 할머니 같기도 하고 옆집 아주머니 같기도 한 친근한 얼굴을 하고 계신다. 

  

              

  (용화사에 모셔진 고려시대 유물들로 추정되는 석불상 7기와 새로 조성돈 3기위 불상들)

흥덕사지와 흥덕사지 근처에 지으진 고인쇄박물관을 들렀다. 이 곳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냈단다. 아쉽게도 한 권은 찾을 수 없고 한권은 프랑스의 루브로 박물관 동양 유물실에 보관되어 있지만. 1월 경상도 답사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스님들이 지업에 종사하기 힘들어 절 문을 많이 닫았다고 한다.그래서 언양에 있는 간월사지 같은 절이 폐사가 되었다는데.이곳은 폐사지가 된 까닭은 아직 밝혀 지지 않았고 다만 아파트 지을 터를 고르다가 우연히 흥덕사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공양 시간을 알리는 징 모양의 종) 발견되어 이 곳에 흥덕사지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인쇄박물관에서 금속활자를 만들고 글자를 찍어내는 과정들을 둘러보고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제고분들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는 신봉동 백제고분군에 가기로 했으나 시간이 늦어 생략하고(다행히 친구 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안 둘러봐도 그다지 아쉽지는 않다. 다음에 친구집에 올 때 둘러보기로 했다.) 정북동 토성을 보러 갔다. 논밭 한 가운데 정사각형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한강 주변에 조성된 풍납토성처럼 이 토성도 가까운 곳에 미호천이 흐르고 있단다. 여기서 보니 상당 산성이 바라다 보인다. 아래서 볼 때는 토성이 아니라 야트마한 언덕 같은데 위로 걸어보니 제법 높다. 토성이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해 보니 서기 108년정도 된다는데 2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유실이 되었다면 두 배정도의 높이가 되었겠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데도 불구하고 토성 안 쪽이 아니라 토성 위를 거닐었다. 줄줄이 서서 바람을 맞으며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논밭 가운데로 난 길을 따가 답사 가는 길에 본 정북동 토성)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추운 날씨였지만 부산처럼 바람이 쌩생불어 대지 않아 답사는 할 만 했다. 그리고 자주 접할 수 없는 백제 문화권의 귀중한 유물들을 볼 수 있어 뜻깊었다. 올 겨울 방학동안 일본의 유적지 답사를 계획 했었지만 못했다. 그렇지만 아쉽지는 않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답사를 두 번이나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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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와 울산 근처의 문화 유적들을 보러 가다-

1월 15일 통도사와 울산 근처에 있는 유적지 답사를 갔다.

첫 답사지는 통도사,이곳은 내가 몇 년 전 여름 휴가 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사찰 문화를 체험해 보게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곳이다. 그 때 마지막 날 섭의사 스님 안내를 받으며 사찰을 둘러 보았는데 오늘 길눈이의 설명을 들으며 보니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곳곳에 보물이 숨어 있다.


  성보박물관. 이 곳에 특별 전시 행사 중 하나로 우리 나라 사찰에 있는 괘불들을 한달에 하나씩 전시를 하고 있었다. 괘불은 야외에서 야단법석 같은 행사를 할 때 걸쳐놓고 의식을 행하던 대형 부처님 걸개 그림으로 1월달에는 청도 적천사 괘불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 해 가을 범어사 산사 축제 프로그램 중 범패 한마당 공연할 때 보제루 앞 마당에 내 걸렸던 괘불이 생각난다. 괘불 양쪽으로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상여 앞에 마을 사람들이 줄줄이 들고 가던 깃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괘불과 깃발들이 어우러져 약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기억. 내부 전시물들은 문화재를 해설해 주시는 법사 한분이 설명해 주셨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제법 꼼꼼하게 둘러 봤는데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는데  해설을 들으면서 보니 불교사상에 담긴 의미가 오묘하다. 감로탱에 그려진 그림들은 그냥 쓰윽 보고 지나치면 잘 모르겠는데 동 서 남 북으로 나눠 한 화면에 네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입체주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다양한 시점이 담겨 있는 것처럼.부처가 보리수 나무 밑에서 수행하는 장면, 부모가 보낸 사람들이 석가모니를 데려가기 위해 설득하는 장면, 해탈을 한 석가모니에게 녹야원에서 5제자가 처음으로 설법을 듣는 장면, 들을 수록 신기하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갔을 때 만나는 분들을 그려놓은 그림도 있다. 사람이 죽으면 35일째 되는 날에 염라대왕을 만나 재판을 받는데 자신이 그동안 죄지은 것을 파노라마처럼 비춰주는 거울이 있단다.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긴데도 새삼스레 그동안의 내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참 이기적으로 살았다. ‘덕을 쌓으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49제를 지내고 절에 올리는 까닭도 알았다. 49일째 되는 날 태산 대왕이  환생할 생물을 결정하신단다. 극진히 제를 지내면 살아 잘못했더라도 좀 봐주신단다. 저승에 가 보지 않을 사람들이 상상한 일이긴 하지만 암튼 죄 짓지 않고 잘 살아야겠다.


  극락전 벽에 반야용선이 그려져 있다.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 가는 장면. 벽화가 아주 많이 낡았다. 낡은 벽화가 지금 우리가 보기엔 좋지만 더 훼손이 되면 후대의 사람들은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손을 보면 은은한 맛이 없고 너무 조잡해 보인다. 훼손을 막기 위해 손을 보긴 봐야할 것 같은데 조잡 스럽제 않게 볼 순 없을까?


                극락전 벽에 그려진 반야용선

 

그리고 새로이 알게 된 사실, 부처님이 있고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부처님 제자 중 한 분이 탑으로 환생했다는 석가탑이 영산전 안에 탱화로 그려져 있다. 잠겨 있는 문을 누군가가 열어주어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가 봤다. 왼쪽 벽에 탱화가 있다. 밖에서 한 번 쓰윽 보고 지나쳤던 건물 속에 이런 보물이 숨어있다니! 그 뒤에는 통도사 봉밀탑이 있다. 석가모니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로 56억 몇천년 후에 나타날 부처를 맞이하기 위함이란다.


                     부처님 발우 모양의 탑
 오전 답사를 끝내고 경기식당에서 밥을 먹고 간 곳이 언양 간월사지, 이 곳은 가람의 배치나 탑의 위치로 보아 경주 장항리 폐사지와 아주 비숫하다. 큰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언덕빼기 같은 곳에 있다. 이곳도 교통의 요지였단다. 밀양, 청도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과 양산, 부산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길을 지나 이 앞에서 갈라졌단다. 다만 장항리사지에 있는 탑이 5층석탑인데 반해 이 곳은 3층 석탑이 양쪽에 있다. 하나는 바위 위에 하나는 평지에.그리고 간월사지 밖에 있던 연꽃좌대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작은 절간 안에 모셔져 있다. 목이 부러졌던지 기부스 한 것 처럼 부자연스럽게 복원을 해 놓았다. 무릎에 얹힌 손 모양도 시멘트를 발라 엉성하기 이를 데 없고, 후대까지 남겨질 문화유산을 복원하면서 .... 그리고 절 간 앞 마당 양쪽에 있는 노스님 모습의 돌부처, 부처님이 아니라 미륵 같다.아주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간월암 앞 마당에 계신 노승을 닮은 돌부처
 

그 다음 간 곳이 영축사지, 그런데 차를 댈 곳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인데 양 옆에 차를 빽빽하게 주차해 놓아 마주오는 차를 비키려니 아슬아슬하다. 결국 답사를 포기하고 망해사지 석조부도를 보러 갔다. 망해사 뒤편에 있는 이 부도는 ‘부도다 탑이다’를 놓고 논란 중이란다. 그러고 보니 부도가 아니라 탑 같은 느낌도 든다.부도 맨 밑에는 커다란 연꽃 8장을 새겼고, 그 위에는 16장을, 맨 위에는 24장을 새겼다. 이 부도는 신라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양쪽에 있는 두 부도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 그냥 봐선 잘 모르겠는데 보물찾기 하듯 꼼꼼하게 살펴보면 두어군데가 보인다.   망해사는 가까운 개운포에 사는 용왕을 위해 세운절이라고 한다. 헌강왕이 용왕을 위해 절을 세운 이후 용왕이 너무 기쁜 나머지 일곱번째 자식 처용을 헌강왕에게 주었단다.절 뒤 부도가 있는 곳에서 바라보니 멀리 개운포가 보인다. 개운포 앞 바다에는 처용이 걸어나왔다는 처용암이 있단다. 삼국유사의 처용 설화가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들런 곳이 오늘 일정에 없었던 청송사지 3층석탑, 구불구불한 논길을 한참 들어가니 작은 마을 입구에 탑 1기가 서 있다. 모습은 감은사지 탑과 비슷하다. 통일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청송사지 옆에서 왼쪽으로 논 밭을 지나 야트마한 산을 오르면 조선 시대 돌종 모양의 부도가 3기 있는 부도밭이 있다. 한 기는 바위 위에 그대로 얹혀 있고, 한 기는 좌대에, 한 기는 받침대 위에 좌대가 있고 그 위에 부도가 얹혀 있다. 좌대 밑에 받침대가 있는 부도는 처음 봤다.그런데 좌대도 없이 바위를 그대로 깔고 앉은 부도는 세월의 흔적이 아름다워 자꾸 눈길이 간다


                            -청송사지 아름다운 부도

  통도사와 울산 근교의 문화 유적들을 둘러보고 받은 느낌은 알려지지 않는 우리 나라의 유물들이 아주 많다는 것, 그리고 비슷한 듯 보이는 유물들도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물들은 볼수록 새록새록 사람의 눈길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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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감상글)

                                              ‘늑대왕 핫산’을 읽고

                                                               3학년 홍예린


  학교 공부가 끝나고 동생을 데리고 집에 왔다. 그런데 엄마께서 전화가 왔다. 더 늦을 것 같다고 했다. 강산이가 울며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덩달아 산하까지 울었다. 그런데 갑자기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벽에 붙은 늑대왕 핫산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곤 땅으로 사뿐이 내려와 타라는 듯이 얌점히 등을 들이댔다. 그래서 등에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서 엄마가 일하고 있는 회사로 데리고 갔다.

  내 생각에는 늑대왕 핫산이 벽 속에서 아이들을 보다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아이들을 엄마 회사에 데려다 주기 위해 온 것 같다. 그리고 늑대왕 핫산은 아빠의 혼인 것 같다.  산하와 강산이만 늦은 밤까지 있으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아이들이 너무 가엾어서 가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핫산이 떠났다. 바람이 불자 벽에 붙어있던 종이가 떼어지며 저 멀리 할랑할랑 날아갔다. 이제 마음이 조금 놓여서 아빠가 하늘에서 지켜봐도 될 것 같으니까 가신 것이다.  늑대왕 하산이 떠난 후에 강산이가 많이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하가 “늑대왕 하산은 늘 우리를 보고 있다.”고 달래서 울음을 그치고 “하산아, 잘가‘라고 편지를 써서 종이 비행기를 접어 날렸을 것이다. 늑대왕 핫산은 이렇게 하는 산하와 강산이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만 조금 흐뭇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핫산은 영원히 산하와 강산이 마음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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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글)

                                    '입체주의’ 를 읽고

                        -장 메칭거의 ‘뜨개질하는 여인’을 보고-

                                                                           3학년 홍예린 

 

글짓기 시간에 선생님께서 ‘입체주의’라는 책을 보여주셨다. 여기 나오는 그럼은 내가 이제까지 본 그림보다 돋보였다. 우리들은 차근차근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장 메칭거의 ‘뜨게질 하는 여인’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어떤 여자가 진짜  뜨개질을 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림의 분위기가 아늑하고 포근해서 좋았다. 하지만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어떤 여자가 탁자에 실을 놓고 혼자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앉아 있어서 그렇다.  내가 가서 말동무가 되어 주고 싶다. 그런데 여인의 표정은 눈웃음을 약간 띄고 있다. 꼭 모나리자처럼 신비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손은 뭔가를 끼고 있는 것 같다. 여인의 옷은 다른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서 오려 옷에 붙인 것 같다.

  나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그림에 이상한 점이 많다. 시점이 여러 방향이라서 어디서 그렸는지 모르겠고 각이 많다. 이것이 원래 입체주의 그림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이 검정색이고 뒤에 창문이 있는데 그 창문 안이 안 보이고 검정색이라서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배경이 신비롭다. 입체주의 그림은 정말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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