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분들이 밀양 손씨 고택을 다녀와서 한번 가봐라고 권했다.그래서 방학 하면 한 번 가봐야지 하다가 24일날 다녀왔다. 손씨 고택은 후손 중 장손(손영배) 한 분이 서울서 직장 생활을 정리하시고 내려와서 한정식 집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식사도 할 겸 갔다.

 

밀양향교라고 쓰인 푯말을 보고 들어가니 느낌이 좋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도 이곳이 명담임이 느껴진다. 손씨 고택 주변에도 고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손씨 고택 뒤편 밀양 향교 풍화루가 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하고 손씨 고택을 둘러봤다. 300년쯤 된 집이라는데 사대부가의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사진을 찍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카메라가 고장나서 사진을 못찍고 눈에 담았다.


  집안으로 들어가 먼저 ‘십이지 한정식’을 운영하고 계시는 주인 아주머니께 식사를  하고 집안을 좀 둘러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식사는 예약 손님 꽉 차서 안된단다. 미리 알았더라면 예약을 하고 왔을 텐데.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일부러 오늘 답사 겸 식사도 할 겸 먼길을 찾아 왔다고 하니 그럼 사랑채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동네 유적지들보고 와서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그래라고 하셨다. 마을에 고택에 몇 채 남아 있어 그 중 답사가 허용된 곳 한 곳을 들러 둘러보고 향교를 둘러봤다. 향교 맨 위 건물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밀양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풍화루에 올라가 둘러보니 마루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있다. 향교를 다 둘러보고 다시 손씨 고택을 갔더니 도저히 식사 준비는 안 될 것 같단다.그래서 집만 둘러봤다.


  그런데 안채와 사랑채 기둥이 둥글다. 사가에서는 둥근 기둥을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알고보니 왕가의 며느리를 본 덕분에 둥근 기둥을 세울 수 있었단다. 사랑채와 안채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윗 사랑채는 규모도 크고 여느 고가에서 볼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수많은 바깥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ㅁ’자로 되어 있고 중앙에 마당이 있다. 만석군 집안 답게 곳간의 규모도 크다. 안채를 보고 나와 사랑채를 한 번 더 둘러봤다. 사랑채 뒤에는 뜰이 있다. 아름드리 나무가 두어 그루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을 지을 때 심은 나무 같다.

 

  집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계셔서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흐뭇했지만 생활하시기가 많이 불편하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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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국어 교과서에 실린 옛이야기 바로 보기
                                                                                       (네이버 지지맘 홈피에서 퍼왔어요)

 이송희


1. 옛이야기의 세계

  옛이야기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면서 나는 놀란 게 참 많다. 옛이야기는 그저 권선징악의 교훈만 드러내는 우화 같은 이야기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옛이야기는 자아실현이라는 인간 보편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고, 철저하게 약자와 못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동물과 인간, 현실과 초현실의 세계를 경계 없이 넘나들며, 묘사 없이 간결하게 전개되는 깔끔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옛이야기는 천우신조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면서 부정의 눈으로 보고, 여자가 남자 때문에 신분상승하는 이야기로 쉽게 단정해 버리고, 사실이 아닌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면서 치워 버린다. 그러면서 교훈을 날것으로 담고 주입하는 우화는 아이들에게 꼭 들려 주어야 할 이야기로 알고 있다. 이번에 초등 국어 교과서에 실린 옛이야기를 살펴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초등 국어 교과서에 적지 않은 옛이야기가 실렸는데, 옛이야기의 문학성과 본질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우화로 떨어뜨리는 것 투성이었다.

2. 교과서 옛이야기의 흐름

○권선징악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이야기들
  옛이야기는 권선징악의 주제를 등장인물의 삶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의 진실을 절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초등 국어 교과서에 실린 옛이야기에는 가난하고 힘없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복받는다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이는 이야기가 없었다. 뚜렷하게 선과 악을 맞세워 선이 복받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고, 어떤 이야기들은 선악의 개념조차 헷갈리게 만들고 있었다. 또 이야기를 함부로 고치거나 재화하여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거나 이야기의 맛을 빼앗고, 그 주제를 의심케 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2학년 1학기)는 본디 백성의 마음을 잘 드러낸 좋은 옛이야기이다. 백성의 소리는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고, 진실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우리 겨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통쾌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이 이야기는 임금이 백성 말을 잘 들어 귀가 커진 것으로 둔갑했다. 옛이야기에서 재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재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권선징악의 주제가 백팔십도 뒤바뀌어 힘없는 백성이 아닌 권력자가 복을 받고, 백성을 억압한 죄를 용서받기도 한다. 교과서에 실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부자가 된 머슴>(3학년 1학기)은 3년 동안이나 열심히 일한 복동이와 길동이에게 새경을 주지 않으려는 주인의 속셈에 걸려들어 길동이가 새경을 받지 못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3년 동안 열심히 일한 복동이와 길동이에게 새경을 주지 않으려 느닷없이 가는 새끼를 꼬으라고 말하는 주인의 흉계는 가려지고, 길동이만 마지막에 꾀를 부리는 게으른 아이로 그려진다. 3년 동안 일한 대가를 주지 않으려 약은 꾀를 부리는 주인과 그 꾀에 걸려 끝내 새경을 받지 못하는 길동이 가운데 우리는 누구에게 벌을 주어야 하나?
  6학년 1학기 교사용 지도서 235쪽을 보면 보충자료로 <초등 학교에서 지도할 바람직한 설화 작품 내용>이라 해 놓고 그 한 가지로 '빈부,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 등이 무조건적인 대립 양상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기준으로 옛이야기를 골랐을 테니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교과서에 거의 실리지 않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전래동화에는 강하거나 부하거나 큰 존재에 대해 약하거나 가난하거나 작은 자가 잘 대비되어 있고, 이 대비에서 앞의 것은 어리석고 뒤의 것은 현명하여 마지막에는 반드시 뒤의 것이 이기도록 된다. 이것은 역사의 현실이 아니고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것을 권선징악으로 본다면, 세계의 위대한 문학의 고전들은 그 대부분이 필경 권선징악의 문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소망과 지혜가 담긴 교훈성이 있음으로써 전래동화는 오늘날까지도 문학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어린이를 지키는 문학≫, 이오덕, 백산서당, 1984, 26쪽)

이렇게 선악을 뚜렷이 맞세워 보여 주는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두 가치관 가운데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지 절로 깨닫게 된다. 자기 속에 있는 선악의 두 요소 가운데 어느 것을 키워 나갈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열심히 일한 길동이가 복을 받지 못하고, 부자는 새경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는 <부자와 머슴> 같은 이야기를 보면 아이들은 정신의 혼란을 겪게 되고 가치가 뚜렷하지 않은 세계에서 불안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약하고 힘없는 백성을 바보로 만들어 놓은 이야기
  교과서 옛이야기에는 약하고 힘없는 백성은 어리석게 그리고 양반이나 임금은 훌륭하게 그린 이야기가 많았다.<고지식한 농부>(6학년 2학기)에서는 농부를, 벼슬을 얻기 위해 삼 년을 서울에서 구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땅에서 뒹구는 바보로 만든다. 백성을 바보로 만드는 이야기의 한 예이다. 우리 이웃, 힘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일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무슨 꿈을 꿀지 걱정이 된다. <짧아진 바지>(3학년 2학기)는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아버지 말을 따른 딸들을 효녀라 칭찬하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는 봉건 시대에 나라와 임금에게 무조건 충성하기 바랐던 지배 이념을 그대로 드러낸, 지배자들이 퍼뜨린 이야기들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거나, 파묻거나 해서 복받는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에 속한다. 유교 사회에
서 효는 곧 충으로 연결되는 것이니까. 아버지 바지가 무릎밖에 가리지 못할 정도로 짧아지도록 아무 생각 없이 '바지를 줄여 달라'는 아버지 말만 기계처럼 따른 딸들을 효녀라고 칭찬할 수는 없다. 슬기로운 가장과 식구들이 서로 도와 집안이 화목하게 되는 이야기도 많은데 굳이 이 이야기를 실어 놓은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우리 겨레, 백성들의 정신과 바람을  간직한 참 우리 옛이야기에는 성실하게 일하는 백성들의 삶, 슬기로운 백성들의 삶이 나오지 이렇게 미련한 백성, 일하지 않고 횡재하려는 백성들의 삶은 나오지 않는다. 또 백성들은 무엇을 바라서 일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일한 대가로, 슬기롭게 생활한 대가로 복을 받는 것뿐이다.
  우리 옛이야기 가운데 <재주꾼 오형제> 같은 이야기는 저마다 재주를 가진 다섯 아이가 그 재주를 잘 살려 서로 힘을 모아 호랑이로 나타나는 악을 물리치는 이야기이다. 자기가 가진 재주, 힘을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줄 일이지 <고지식한 농부>처럼 일하지 않고 벼슬을 바라는, 바보 농부 이야기를 들려 줄 일은 아니다. 또, 아무 재주 없는 것 같은 이웃들이 어려울 때 저마다 가진 재주를 발휘하여 서로 존중하며 도와 악을 물리치는 이야기들도 많다. <할머니를 도운 달걀 자라 물개똥 송곳 멍석 지게> 같은 이야기는 아무 힘없는 달걀 자라 물개똥…같은, 우리 둘레에서 늘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웃)들이 저마다 숨겨진 힘을 써서 할머니를 도와 호랑이를 물리친다는 이야기이다. 늘 자기 곁에 있지만 귀함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이웃이 어려운 때에 이렇게 큰 힘이 된다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자기를 둘러싼 이웃, 자연, 사물의 고마움을 절로 깨칠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달걀 자라 물개똥…의 모습을 절묘하게 살려 낸 의태어의 맛과, '할멈 할멈 왜 울우?' '이 팥죽을 먹고 나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먹는다고 해서 운다.' '팥죽 한 그릇 주면 안 잡아 먹지.'하는 되풀이 구조에서 오는 이야기의 맛이 뛰어나 듣는 이들에게 상상과 즐거움을 흠뻑 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싣지 않고 사람들을 한낱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이야기들을 교과서에 실어 놓았다.

○교훈만 날것으로 주는 이야기
  교과서 옛이야기는 대부분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뜻에서 실어놓은 것 같았다. 대부분 이야기들이 그 의도가 뻔히 눈에 보였다. 그 중에 <욕심 많은 개>(1학년 1학기), <충성스러운 개>·<욕심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원숭이의 재판>(1학년 2학기), <금도끼 은도끼>·<부엉이 새끼>(2학년 1학기), <꽁쥐 빠진 메추라기>(2학년 2학기), <상길이와 박서방>(4학년 2학기) 같은 이야기들이 그 본보기이다. 어른은 아이들에게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도 주고, 책도 주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날것 그대로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푹 빠져 그 가운데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교훈을 날것으로 줄 때 아이들은 그 주입식 교육이 주는 버릇에 길들여져 결국에는 주체성없는 타율의 인간으로 자라게 될 테고, 문학 작품도 삶이나 철학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시대에 편승해 살
아가는 수단이나 방편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3. 옛이야기의 재미

  이번에 겨레아동문학연구회에서 교과서 옛이야기를 살펴보고 너무 막막해서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먼저, 우리 국민이라면 어린시절 누구나 꼭 보고 지나가는 초등 국어 교과서에 우리 겨레의 삶, 정서, 얼이 나타난 훌륭한 옛이야기는 거의 실리지 않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좋은 형제>(3학년 1·2학기) 같은 외국 우화는 두 번이나 실어 그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좋은 우리 옛이야기는 모두 빠뜨리고 있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콩쥐팥쥐> <재주꾼 오형제> <할머니를 도운 달걀 자라 송곳 물개똥 멍석 지게> <구렁덩덩 신선비> <버리데기> <도둑나라를 친 새신랑> <반쪽이> 그밖에 우리 겨레의 얼을 간직한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왜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았을까? 물론 <머리 아홉 달린 괴물>(도둑나라를 친 새신랑, 4학년 1학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6학년 1학기, 지도서 53쪽) 같은 이야기가 나오긴 한다. 그러나 쓰기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그림만 보여 주고 교사용 지도서에만 참고자료로 이야기가 실려 있고, 지도서에 실린 이야기는 대부분 재화를 잘못해 이야기 맛이 떨어졌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같은 이야기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교과서에 실린 이 이야기에서는 앞부분에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가진 것(떡)을 다 내 주고, 치마 저고리 속곳까지 벗어 주고, 팔다리까지 잘라 주고 마침내 줄 게 없어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부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모든 것을 다 내 주고 마침내 잡아먹히는 앞부분은 가진 것을 권력자들에게 모두 빼앗기며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백성들과 무수한 침략을 받아온 우리 겨레의 슬픈 역사를 보여 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백성들을 하늘이 거두어 만물을 비추는 해와 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말에 끊임없이 속아 어머니가 호랑이한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사건을 되풀이해 보여 주면서 절박한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이런 것이 이야기가 주는 맛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의 본질과 형식이 주는 맛은 하나도 살리지 않고 앞부분을 다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초등 국어 교과서 6년 전과정에 실린 옛이야기에 견주어 보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린 걸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거지의 아내>(5학년 1학기, 지도서 323쪽)를 보면 우리 겨레의 훌륭한 옛이야기 <버리데기>를 버리고 왜 이 이야기를 실었을까 싶다. 버리데기는 딸만 일곱 낳은 아버지한테 버림받지만, 그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애써 아버지를 살린다. 버리데기가 약을 구하러 가는 과정은 부모 품에서 벗어나 혼자 일어서려는 아이가 겪는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독립된 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아이의 성장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버리데기는 농경사회에 필요한 논일, 밭일, 들일을 성실하게 치러내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 독립된 한 사람으로 거듭나서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살리게 된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세상을 살아갈 때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스스로 하게 된다. <거지의 아내>는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돕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버리데기>와 선을 같이 하지만 이야기 과정이 치밀하지 않고, 무엇보다 딸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딸은 아무런 노력없이 금덩어리만 얻을 뿐이다. 이렇게 <버리데기>처럼, 옛이야기에는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면서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성장 과정을 비유로 나
타낸 이야기들이 많은데 교과서에는 이런 이야기들은 없고,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조차 거의 없었다.

4. 교과서 옛이야기에 대한 바람

  옛이야기는 어린아이들이 즐겨 듣는 문학이다. 글을 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부터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 맞는 이야기이다. 대부분 이야기들이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이야기에서 다루는 내용이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이고, 아이들의 자아실현을 이야기하는 것이 많으며, 이야기 구조 또한 어린아이들이 즐겁게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반복구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학년 교과서에는 옛이야기가 조금 실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한테 어울리는 우화류가 많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옛이야기가 많아진다는 사실도 뜻밖이었다. 아이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들을 옛이야기의 본보기로 실어놓으니 옛이야기는 시시한 말장난만 하고 교훈만 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옛이야기 하면 쓰잘 데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자라서 자기 아이들한테 또 엉터리 옛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맛본다. 사람이 개척해나갈 수 있는 삶터가 얼마나 넓은가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자아실현을 위해 얼마나 힘겨운 일들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지도 깨닫게 된다. 이런 좋은 우리 옛이야기가 초등 국어 교과서에 많이 실려 우리 아이들이 그 맛을 흠뻑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초등 국어 교과서 전 학년 전 단원에 걸쳐 옛이야기의 단원 목표나 학습 목표로 제시된 것도 보면 그림을 보며 이야기 꾸미기, 그림 보고 이야기 들으면서 줄거리 생각하기, 뒷이야기 이어쓰기, 묘사가 잘 된 부분 찾기 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아이들은 옛이야기에서 교훈과 줄거리만 얻어가지면 되는 것처럼 전과정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옛이야기는 간결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들려 줄 때는 아이들이 이 훌륭한 문학작품의 세계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묘사나 설명 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들려 주는 게 가장 좋고, 굳이 활동을 하려면 스스로 몸을 움직여 이야기 맛을 즐기게 하는 연극이 좋겠다.▣(이 글은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1999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이송희님은 우리회 옛이야기분과에서 활동하고 우리회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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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의 『슬픔의 노래』을 읽고 

 

하이타니 겐지로가 쓴 『태양의 아이』, 미셀 깽이 쓴 『처절한 정원』은 역사는 강물과도 같아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흘러나온 강이 현재를 넘어 미래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정찬의 중편 소설 ‘슬픔의 노래’도 이 두 작품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슬픔의 노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80년대와 연결되어 있다. 아우슈비츠와 광주라는 비극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소설을 근간을 이룬다. 유 기자가 구레츠키와의 인터뷰에서 묻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며, 새로운 슬픔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지금 과거의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거의 슬픔보다 현재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라고. 이 물음에 구레츠키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 흐르는 강을 자를 수만 있다면 당신의 말이 옳다, 하지만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은 강이 아니다. 과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흘러들어간다. ....과거의 슬픔은 곧 현재와 미래의 슬픔이다. 다만 그 슬픔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는 길목에서 새삼스럽게 ‘광주 사태’환기 시키는 이 소설을 쓴 까닭을 알 수 있다. 광주 사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지금까지도 슬픔의 강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슬픔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

  유기자가 이어서 구레츠키에게 묻는다.

  “그럼 슬픔의 강변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가란 살아 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사람이다.  ......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른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볼 수 있는 자다. 그의 눈은 강의 흐름을 본다, 예술가는 들을 수 있는 자다. 그의 귀는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예술가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하는 자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은 과거처럼 세계를 재현에 있는 것이아니라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잊혀진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존재는 모든 것의 근원이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존재의 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참 모습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그 역할을 예술가들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찬 또한 언어를 통해 존재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광주 이야기를 하기 위해 폴란드의 아픈 역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이 소설의 미학이 드러난다. 인물간의 대화와 진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고뇌와 깊이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 한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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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나온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일상성을 다룬 소설들이 현저하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소설도 이러한 특징을 지닌 소설의 하나로 불임여성과 그 남편이 주인공이다.

  첫장에 ‘아내의 상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그려져 있다.

  ‘아내는 상자를 많이 갖고 있다. 아내의 상자에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스쳐 지나간 상처들이 담겨 있다.그녀는 흉터를 지니듯이 방 귀퉁이에 상자를 쌓아간다’

  ‘규격화된 상자에 정리정돈을 잘한다.’ 웬지 박제화된 느낌이 든다. 아내가 상자에 뭔가를 쉬임없이 채워넣는 것은 자신의 가슴이 그만큼 공허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은데 ‘나’가 바라보는 ‘아내의 상자’는 대단히 피상적이다. 아내의 가슴 속에 켜켜히 쌓인 상자는 여전히 보지 못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일상의 평온을 즐기고, 짜여진 생활에 별다른 거부감을 갖고 있지도 않는, 증권 시세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현대인 도시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나’의 눈에 아내는 정리정돈을 잘하고 음식을 잘 만들고,외출을 잘 하지 않고 잠이 많다는 것과 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시시하다고 할 만큼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그러면서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아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부부의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아내를 잘 모른다. ‘나’가 알고 있는 것은 아내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내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려고 했다면 이 부부가 이렇게 공허하게 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서만 맴돈다는 것, 친구가 두 명 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 만의 성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스트레스가 많다. 그래서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것을 풀기보다는 깊은 잠에 빠져들며 순간적으로 그 감정을 모면하기도 한다.

아내도 잠을 통해 이상징후를 남편에게 알린다. 그러나 몸이 아플 때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심지어는 화가 났을 때 조차 잠을 자고 화를 내고 나간 뒤 문을 잠그고 깊은 잠에 빠져들어 열쇠공을 부르고 문을 부순 다음에 집으로 들어갔을 때도 잠을 자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그렇게 심각징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는 모든 게 말라 버려요. 시멘트 벽이 수분을 다 빨아들이나봐요. 이러다가 나   도 말라비틀어질 거예요. 자고 나면 내 몸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 몸이 삐거덕거리는 것 같다    구요.’

라고 소리치는데도 ‘나’는 실내 환기를 안해서 습도가 낮아진 거라고 가볍게 아내를 나무라며 안심시킨후 가습기를 사 들고 들어간다. 아내와 ‘나’가 얼마나 괴리된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부부가 모습은 현대인의 두 얼굴을 닮아있다. ‘늘씬한 포장 도로’를 보고 안도감을 느끼는, 규격화된 일상에 순응하면서도 그 곳으로부터 탈출하고 픈 욕망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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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이 책 너무 재미 없어요.”

  “응, 재미 없는 책이야. 생각을 많이 해야 이해되는 책이니까.”

  “이번 달은 좀 재미있는 책 해요.”

  “그래 재미있는 책 하자.”

  그러면서 수업 시작을 했던 책, '레의 모험'

  많은 생각을 하며 읽어야하는 책도 재미있다는 아이조차 재미없었다고 해서 수업 시작부터 조금 기운이 빠졌다.그러나 내가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라 활동지도 수준 높은 이 아이들과  딱 수업하기 좋게  만들었다.

  나의 색도 찾아보고, 레의 모험과 내가 살아가는 삶도 빗대보고, 내가 담고 싶은 색도 생각해 보고.

  그랬더니 반응이 아주 좋다.

  그렇게 시들하게 시작했던 아이들이 점점 책 속으로 빠져든다.

  “이 책 재미있지 않니? 레가 여행하는 과정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랑 똑같지?”

  “네. 재미 있어요. 그런데 책이 재미있는게 아니라 선생님이랑 하니까 재미있어요.”

 아~ 기분 좋다

  ‘바람은 모래 언덕의 모양이 바뀔 뿐, 이 세상은 그저 커다란 모래더미일 뿐이야.’

  로 시작하는 이 책 우리 인생이랑 참 많이 닮았다

  처음에 도대체 뭔 내용인지 모르겠다던 녀석이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제목을 붙인다.

   기특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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