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슬픔의 노래』을 읽고 

 

하이타니 겐지로가 쓴 『태양의 아이』, 미셀 깽이 쓴 『처절한 정원』은 역사는 강물과도 같아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흘러나온 강이 현재를 넘어 미래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정찬의 중편 소설 ‘슬픔의 노래’도 이 두 작품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슬픔의 노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80년대와 연결되어 있다. 아우슈비츠와 광주라는 비극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소설을 근간을 이룬다. 유 기자가 구레츠키와의 인터뷰에서 묻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며, 새로운 슬픔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지금 과거의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거의 슬픔보다 현재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라고. 이 물음에 구레츠키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 흐르는 강을 자를 수만 있다면 당신의 말이 옳다, 하지만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은 강이 아니다. 과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흘러들어간다. ....과거의 슬픔은 곧 현재와 미래의 슬픔이다. 다만 그 슬픔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는 길목에서 새삼스럽게 ‘광주 사태’환기 시키는 이 소설을 쓴 까닭을 알 수 있다. 광주 사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지금까지도 슬픔의 강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슬픔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

  유기자가 이어서 구레츠키에게 묻는다.

  “그럼 슬픔의 강변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가란 살아 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사람이다.  ......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른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볼 수 있는 자다. 그의 눈은 강의 흐름을 본다, 예술가는 들을 수 있는 자다. 그의 귀는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예술가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하는 자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은 과거처럼 세계를 재현에 있는 것이아니라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잊혀진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존재는 모든 것의 근원이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존재의 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참 모습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그 역할을 예술가들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찬 또한 언어를 통해 존재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광주 이야기를 하기 위해 폴란드의 아픈 역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이 소설의 미학이 드러난다. 인물간의 대화와 진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고뇌와 깊이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 한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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