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회분 4호묘 벽화

대목 신영훈씨가 쓴 '고구려'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것은 오호묘 4회분 벽화였다. 운 나쁘면 출입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이 벽화를 보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무덤이 있는 떼무덤에 갔다. 다행이 출입이 허용되었다.
오호묘는 하늘에서 보면 다섯 개의 커다란 무덤이 동서로 길게 배열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다섯 개의 대형 투구를 엎어놓은 것 같아서 오회분이라고 불린단다. 그 중 4호분 벽화를 보았다.
답사를 가기 전, 땅위 세계와 중간 세계, 천상 세계로 나뉘어져 표현되었다는 이 곳 벽화를 찍은 사진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 몇 백년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빛깔이 선명하고, 그림 속 사물들이 살아숨쉬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래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다른 세상의 그림책을 동시에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겠구나'
그런데 아쉽게도 무덤안에 들어갔을 때는 습기가 차서 그림의 형태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일제시대, 발굴하고 무덤 위를 시멘트로 마감하는 바람에 습기가 차서 그림 대부분이 빗물처럼 흘러내는 물방울에 지워지고 있었다. 참담했다.유적이 부실하게 보존되거나 방치되고 있는 현장을 볼 때마다 답답한 마음만 더한다.
*태왕릉
버스에서 내려 태왕릉까지 가는 길 양 옆으로 우산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넓은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태왕릉으로 가는 길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걷기 좋았다. 그런데 저만치 우산나무 사이로 태왕릉을 보는 순간 그만 기분이 씁쓰레해졌다. 우리가 태산같이 여기는 ‘광개토대왕’의 능이 여기저기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무덤)
철제 계단을 밝고 태왕릉 위를 올라갔다.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돌들은 제 자리를 잃고 이저저리 흩어져 뒹굴고 있었다.

(답사객들이 밟고 다니는 윗등은 거의 허물어지고 묘석도 이리저리 흩어져 뒹굴고 있다)

(무덤 가장자리에 선 거대한 호석)
무덤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서 있는 거대한 호석의 규모로 보나 무덤의 밑둘레를 눈어림 해 보았을 때 왕릉급 무덤은 틀림없어보이는데 볼썽 사나울 정도로 초라해서 당혹스럽다.
태왕릉의 고분 형태는 제단과 배총을 갖춘 계단 적석총이다. 태왕릉에서는 일찍이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고,주변의 왕릉급 고분 가운데 광개토왕비와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고분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최근에 이곳에서 ‘호대왕(好大王)이라 새겨진 청동방울이 발견되기도 하여, 고분의 주인공이 광개토왕일 것이라는 확신을 더해주고 있다고 한다. 무덤 위를 오르는 철제 계단이라도 좀 걷어내서 무덤이 더 이상 흐물어지는 것을 막았줬으면 좋겠다.
통구평야지대의 비교적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이 무덤에 서서 앞 산을 쳐다보면 압록강 너머 북한의 민둥산이 보인다. 바로 뒤 중국의 용산은 수풀이 우거져 푸르름을 더하는데 북한의 산야는 꼭대기까지 개간해서 밭을 일구고 있다. 착찹하다.

*광개토왕비
상상했던 것보다 큰 규모에 놀라고 중국이 비각을 세우기 전 천 몇 백년을 비바람 맞으며 난들에 서 있었는데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글자들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잠시 눈을 감고 비각 없이 통구평야에 우뚝선 모습을 상상해 보니 가슴이 벅차다.

광개토대왕비는 받침돌 위에 높이 6,39미터에 불규칙한 사각기둥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응회암의 자연석을 약간 가공해서 1,800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다.
답사를 가기전에 ‘위성으로 보는 고구려의 도성’이라는 책을 보니 이 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안전하게 관리하게 위해, 왕이 서거한 2년 뒤인 414년에 그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첫 단락은 처음부터 제 1면 6행까지로 고구려의 기원 전설및 왕조 초기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둘째 단락은 7행부터 제 3면 8행 15자까지로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주변지역에 대한 정벌 활동 등 훈적에 관한 기사를, 세 번째 단락은 그 다음부터 끝까지로 왕릉의 수묘를 위한 수묘인 숫자와 그 출신지 및 관련 법령을 기록하고 있단다. 그러고 보니 이 비는 하나의 역사서다.한자를 제대로 읽고 해석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장군총

거대하고 당당하다. 이제껏 봐 왔던 적석총 무덤들과는 달리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이있다. 그런데다 적석총 4면에 각각 3개의 거대한 호석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키고 있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덤을 지키는 거대한 호석과 퇴물림 기법, 모서리 부분의 아름다운 우동, 고구려 탑의 특징인 85도의 기울기- 함께 답사하신 분 중에 각도기를 가져오신 분이 있어 재어보니 86도 정도가 나왔다-등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고구려인들이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무지무덤인데 이것이 3,4세기 고구려 중기로 오면서 돌무지무덤에 3,5,7단식으로 층수가 증가하면서 계단식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군총은 그 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길눈이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곳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한다는데 ‘피라미드’와 비교할 수 없는 고구려 인들만의 탁월한 건축기법이 군데군데 숨어있다고 했다. 장군총을 쌓아올라간 기울기가 고구려 목탑 기울기(85°)와 같고 면과 면이 만나는 곳을 우리의 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는 우동(처마)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벽 쌓는 기술이 탁월했던 고구려인들의 건축기법을 이 무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돌계단을 올릴 때마다 끝단부분을 도드라지게 홈을 새겨 위 단의 돌들이 밀려 나오지 않게 했다.천 몇 백년동안 무너지지 않고 당당하게 품위를 지켜올 수 있었던데는 이렇게 놀라운 건축기법이 숨어있었다.
무덤 꼭대기에 묘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제각 기둥을 박은 흔적이 네 귀퉁이에 남아있다고 한다. 목수 신영훈이 고구려 유적직를 답사하고 쓴 책을 보니 그 상상도가 나와 있었는데 3층 누각을 올린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지금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각이 얹힌 모습을 상상해 보니 그림이 달라진다. 무덤 네 귀퉁이 방향에 배총이 있었다는데 고인돌 무덤 같이 생긴 배총이 지금은 한 개만 남아있다.

집안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을 돌아보니 막연했던 고구려사가 조금씩 구체성을 띄고 다가온다.
내일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인으로 답사를 간다. 그래서 3시경 답사를 끝내고 환인으로 출발했다. 지름길은 공사중이라 돌고돌아 네댓시간을 달려 환인에 닿았다.시내 한 가운데를 파헤쳐 큰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시내가 어수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