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다빈치 art 18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이중섭을 보다 -

 

내가 이중섭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소’를 즐겨 그린 화가라는 것, 그림 그릴 재료를 살 돈이 없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것,부인이 일본인이었으나 끝까지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 한국에서 외롭게 죽어 갔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서양의 여러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 봐야할 일이 있어 관련 책을 찾다가 이중섭에 관한 책이 눈에 띄어 함께 읽었다. 이중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편린에 불과했다.

 

이중섭은 동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주도에 살 무렵에 그린 그의 그림 속엔 벌거벗은 건강한 아이들이 게와 물고기 어울려 즐거이 논다. 토끼풀이 사람보다 더 크고(토끼룰 1941년), 수염난 해님이 해를 불평하는 사람을 고소하다는 듯이 내려다는 보는 그림동화 같은(해를 불평하는 사람,1941년)그림도 있다. 많은 그림들이 형식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임 없이 마음의 눈에 비친 그대로 그림을 그렸다.


가족에 대한 사랑, 특히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

그림 속에는 그가 가족들과 함께 뒹굴며 살고픈 소망이 곳곳에 배여있고, 아내에게 쓴 편지에는 보고 싶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타고난 예술가였다

가난 때문에 약 한번 변변이 써 보지도 못한채 큰 아들을 잃었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지내며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슬픔,고통, 외로움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학창시절 이중섭이 소’를 즐겨그린 것을 시대 상황과 빗대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중섭이라는 화가를 떠올리면 ‘소’를 통해 우리 민족의식을 드러내려 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편지와 함께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을 실은 이 책은 이중섭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한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어떤 삶을 살다갔으며, 그러한 삶이 그의 그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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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답사 마지막 날이다. 아침을 일찍 먹고 햇살이 덜 내리쬘 때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추정되는 호산장성을 올랐다.

 

*호산장성

단동시내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30여㎞를 가면 고구려가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박작성을 만날 수 있다. 이 성을 ‘박작성’이라 추정하며 천리장성의 마지막 보루로 보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지금은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불린다. 중국은 이곳이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한다.과연 올라보니 고구려적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아래서 위를 본 모습)

(성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본 모습)

중국 정부는 지난 1990년 전후로 이 박작성 터에 중국식 호산장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명나라 때 세워진 천리장성의 일부분이라고 공언했다. 중앙 정부에서 직접 나서 자금을 지원하고 건축과 관련한 세세한 사항까지 챙겼다고 한다. 그래서 '박작성'을 구성하고 있던 돌들은 마을에 있는 집 담이나 밭 경계를 구분하는데 쓰이고 있다





호산장성을 내려와 마을에 있는 박작성 우물터를 보러갔다. 올 초까지 있었다는 우물조차 막아버리고 없다. 답사 기간 내내 어쩌구니 없는 일들을하도 겪어 이젠 쓴 웃음만 나온다.

 

 그런데  호산장성 아래 있는 마을 앞에  북한 땅이 손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다.


(중국에서 북한을 건너가는데 한발자국이면 될 정도로 가깝다는 표지석)

* 압록강변에서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가게된 이유중의 하나가 ‘압록강’을 보기 위함이었다. 경제 사정이 나빠진 북한에서 더 이상 생활하기 힘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밤을 이용해 건넌다는 그 강. 예상했던 대로 ‘압록강’을 바라보니 마음이 착찹했다.중국쪽에서는 자유로이 수영을 즐기며 왁자지껄한데 북한 쪽은 조용하다. 쇠퇴하고 있는 느낌이다.


(맞은편 단동에서 본 북한쪽 모습)


(압록강가의 단동모습)



(중조우의교, 북한을 오가는 기차가 다니는 다리, 그런데 밤이 되자 단동쪽에만 다리 불빛이 보여 북한쪽 다리는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6,25때 폭격으로 끊어진 채 단동쪽만 남아있는 압록강대교)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활기찬 모습의 단동 사람들과 아주 대조적이다. 단동거리에는 오가는 차량들로 분주하고 압록강변 주위에는 높은 건물들이 연방 건설되고 있는데 북한은 낮에도 회색 건물 몇채만 드문드문 보이고 사람들도 활기가 없어보인다. 더구나 밤엔 불빛 조차 보이지 않는다. 중조우의교도 단동쪽의 반만 불빛이 번쩍거리고 북한쪽 반은 불빛이 보이지 않아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6.25때 끊어진 철교도 북한쪽의 반은 끊어진채 그대로 방채되어 있다.

  환인에서 답사를 마치고 단동으로 들어올 때 일행 중 한 분이 피리를 연주해 주셨다. 압록강 너머 북한 마을을 바라보며 올 때였는데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집안의 태왕릉 앞에서 본 북한의 산야와 환인에서 바라다본 북한 만포 마을 앞에서 고기잡던 빼빼마른 북한 아이들도 눈에 자꾸 밟힌다.마음이 무겁다.


(환인에서 본 북한 만포마을, 산등성이 위까지 개간했다)

 호산장성에 갔을 때는 열발짝만 성큼성큼 걸어가면 건너 갈 수 있을 만큼 얕고 작은 개울 너머가 북한 빙산 마을이었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잡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통일 전망대를 갔을 때 북한땅과 경계지역에 겹겹이 둘러친 위압적인 철조망과는 비교도 안되는 낮은 담 같은 철조망이 경계를 구분하는 표시였다. 북한이 남한과는 웬수처럼 담을 쌓고 지내지만 옆 나라 중국과는 이렇듯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서운하다 못해 화가 났다.

(건너편이 북한땅이다. 옥수수밭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얼굴 표정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 답사 마무리

이번 답사는 둥북아 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는 일정이라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답사를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박물관에 공사 중이어서 발굴한 유적들을 보지 못한 점, 하고성자촌 같이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조차도 깡그리 사라지는 현장도 목격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고구려가 이번 답사로 인해 조금은 구체적으로 다가왔지만 남아 있는 유적들의 훼손이 심하고 고구려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적들은 해당지역 박물관에 전시하지 않고 엉뚱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를 해서 현장과 연계해서 보는 것 조차 방해하는 것을 보면서 고구려 역사는 우리 교과서상에서만 남아있도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들이나마 조작되고 사라지기 전에 정부에서 적극적인 대책을 모색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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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2007-10-1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는 숙제로하는데 ㅋ_ㅋ ㅁ♡_♡
 

*고구려의 첫번째 도성,환인

   환인은 집안 답사를 마치고 고구려의 첫번째 도성, 오녀산성과 하고성자를 보기위해 묵었던 도시다. 혼강이 시내를 감싸듯 흘러가고 있어 아침에는 강가에 환인 시내 사람들이 나와 운동을 한다. 모닝콜을 한 것처럼 어제와 같은 시간 5시에 눈이 떠져 대로를 따라 혼강가로 산책을 갔더니 사람들이 리더도 없는데 집단으로 줄을 지어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과 쿵후가 섞힌 듯한 춤인지 운동인지를 하고 있다.동작이 단순해서 나도 삼각스텝을 밟으며 몸을 풀고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오녀산성이 있는 오녀산에 오르면 환인 시가지와 혼강(졸본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비류수,삼국유사 '기이'편에 주몽이 미처 궁궐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라는 물가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고(高)를 성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어디쯤이었을까?)

오녀산성은 오녀산의 험준한 지형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식사하러 갔던 '고려성' 입구에서 본 오녀산성, 동쪽만 경사가 완만하고 서,북,남쪽은 절벽이다)



 서. 남. 북쪽은 천연 절벽을 활용하고 성벽을 쌓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동쪽과 동남쪽에 돌로 성벽을 쌓았다.


(오녀산성 내 남쪽 성벽)

산성을 드나드는 3개의 성문, 동문,남문.서문이 있다.


(오녀 산성 내 동문지, 바깥에서 보면 통로가 보이지 않는 문으로, 전시 연락병이 드나드는 문이었단다) 


(오녀산성 서문터, 주차장에서 천여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이곳에 닿는다)

산성안에는 집단 거주지, 장대와 저수시설 같은 것이 있었다는 유적지가 있었는데  집단 거주지 같은 곳은 발굴당시 유물들의 거의 싹 쓸어가고 유리판 몇 개로 지붕을 만들어 덮어놓고 표지석만 세워놓았다.발굴 된 유적들을 싹쓸어 갔으면 오녀산성아래 이곳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적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라도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을텐데...주몽신화를 읽으며 달떴던 마음이 민망할 지경이다. 

버스에서 내려 오녀산성을 오를 때 가파른 계단을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밑에서 보니 하도 까마득해 보여 경상도 처자들이 농담으로 이랬다. 적이 이곳을 치러 왔다가 지레 지쳐 대장한테 맞아죽을 각오하고 “마~(한숨한번 쉬고)가입시더.”이래서 전쟁도 못해보고 돌아갔을 것 같다고. 그런데 산성에 올라서니 성안은 산책로 같다. 평평한 평지거나 약간 비탈진 길인데다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더운 여름 한낮에도 걷기엔 그만이다.그래서 오녀산성 멀리서 가슴설레이며 봐야  제격이라고들 했다.

 

*하고성자 평원성

   집안의 환도산성과 국내성을 설명할 때 말했던것처럼 고구려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는 도성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고성자성은 오녀산성을 산성으로 하는 고구려 초기의 평지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그런데 성벽이 혼강과 접하고 있어 일찍이 홍수에 의해 유실이 되었다는데 그나마 남아 있는 성벽도 거의 훼손 되고 흔적조차 희미했다.


(
우리가 답사를 갔을 때는 다리를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중 한분이 고구려 사 연구하시는 분들과 올 4월에 왔을 때 약간의 성벽이 남아있었다던 그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그 분의 당혹스러워 하던 그 표정이 지금이 눈에 선하다.)

 

*상고성자고분군

 

  이곳은 하고성자유적지에서 동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하고성자 지역에 살았던 고구려 귀족들의 공동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0년대까지만해도 이곳에 200여개의 고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고분들을 파헤쳐 평지로 개간하는 바람에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지금은 겨우 20여기만 남아있다는데 20여기 조차도 대부분 옥수숫대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풀숲에 돌무더기들 몇개만 군데군데 보였다.






 ‘삼국의 형성’부분에 나오는 고구려사는 참 막연했다. 신라와 백제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친근했지만 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고구려 유적지는 늘 내 나라 조상들이 아니라 딴 나라 사람들 이야기를 배우고 있는 듯한 생경함이 들곤 했다. 그래서 고구려 유적지 답사에 참가했다. 중국식으로 왜곡되어진 것들도 있고, 훼손이 심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도 있어 아쉬움이 많았지만 답사전에 가졌던 그 막연함은 많이 가셨다.고구려 사람들은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이 내달리던 땅은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있지만 그들이 가졌던 기상은 우리가 이어받아 되살려야 되지 않을까,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등등의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환인 지역을 답사하고 내일 우리 나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네댓시간을 달려 단동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왼쪽에 압록강을 끼고 간다. 강 너머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런데 일행 중 누군가가 피리를 분다. 눈에 물기가 어린다. 기분이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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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회분 4호묘 벽화



   대목 신영훈씨가 쓴 '고구려'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것은  오호묘 4회분 벽화였다. 운 나쁘면 출입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이 벽화를 보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무덤이 있는 떼무덤에 갔다. 다행이 출입이 허용되었다. 
 

오호묘는  하늘에서 보면 다섯 개의 커다란 무덤이 동서로 길게 배열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다섯 개의 대형 투구를 엎어놓은 것 같아서 오회분이라고 불린단다. 그 중 4호분 벽화를 보았다.

  

답사를 가기 전, 땅위 세계와 중간 세계, 천상 세계로 나뉘어져 표현되었다는 이 곳 벽화를 찍은 사진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 몇 백년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빛깔이 선명하고, 그림 속 사물들이 살아숨쉬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래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다른 세상의 그림책을 동시에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겠구나'

그런데 아쉽게도 무덤안에 들어갔을 때는 습기가 차서 그림의 형태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일제시대, 발굴하고 무덤 위를 시멘트로 마감하는 바람에 습기가 차서 그림 대부분이 빗물처럼 흘러내는 물방울에 지워지고 있었다. 참담했다.유적이 부실하게 보존되거나 방치되고 있는 현장을 볼 때마다 답답한 마음만 더한다.

 

 *태왕릉 
 버스에서 내려 태왕릉까지 가는 길 양 옆으로 우산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넓은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태왕릉으로 가는 길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걷기 좋았다. 그런데 저만치 우산나무 사이로 태왕릉을 보는 순간 그만 기분이 씁쓰레해졌다.  우리가 태산같이 여기는 ‘광개토대왕’의 능이 여기저기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무덤)
철제 계단을 밝고 태왕릉 위를 올라갔다.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돌들은 제 자리를 잃고 이저저리 흩어져 뒹굴고 있었다.


(답사객들이 밟고 다니는 윗등은 거의 허물어지고 묘석도 이리저리 흩어져 뒹굴고 있다)

 (무덤 가장자리에 선 거대한 호석)

무덤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서 있는 거대한 호석의 규모로 보나 무덤의 밑둘레를 눈어림 해 보았을 때 왕릉급 무덤은 틀림없어보이는데 볼썽 사나울 정도로 초라해서 당혹스럽다.

 

  태왕릉의 고분 형태는 제단과 배총을 갖춘 계단 적석총이다. 태왕릉에서는 일찍이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고,주변의 왕릉급 고분 가운데 광개토왕비와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고분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최근에 이곳에서 ‘호대왕(好大王)이라 새겨진 청동방울이 발견되기도 하여, 고분의 주인공이 광개토왕일 것이라는 확신을 더해주고 있다고 한다. 무덤 위를 오르는 철제 계단이라도 좀 걷어내서 무덤이 더 이상 흐물어지는 것을 막았줬으면 좋겠다.

 

   통구평야지대의 비교적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이 무덤에 서서 앞 산을 쳐다보면 압록강 너머 북한의 민둥산이 보인다. 바로 뒤 중국의 용산은 수풀이 우거져 푸르름을 더하는데 북한의 산야는 꼭대기까지 개간해서 밭을 일구고 있다. 착찹하다.



 *광개토왕비

  상상했던 것보다 큰 규모에 놀라고 중국이 비각을 세우기 전 천 몇 백년을 비바람 맞으며 난들에 서 있었는데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글자들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잠시 눈을 감고 비각 없이 통구평야에 우뚝선 모습을 상상해 보니 가슴이 벅차다.

 광개토대왕비는 받침돌 위에 높이 6,39미터에 불규칙한 사각기둥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응회암의 자연석을 약간 가공해서 1,800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다.

 

 

  답사를 가기전에 ‘위성으로 보는 고구려의 도성’이라는 책을 보니 이 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안전하게 관리하게 위해, 왕이 서거한 2년 뒤인 414년에 그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첫 단락은 처음부터 제 1면  6행까지로 고구려의 기원 전설및 왕조 초기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둘째 단락은 7행부터 제 3면 8행 15자까지로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주변지역에 대한 정벌 활동 등 훈적에 관한 기사를, 세 번째 단락은 그 다음부터 끝까지로 왕릉의 수묘를 위한 수묘인 숫자와 그 출신지 및 관련 법령을 기록하고 있단다. 그러고 보니 이 비는 하나의 역사서다.한자를 제대로 읽고 해석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장군총 



 거대하고 당당하다. 이제껏 봐 왔던 적석총 무덤들과는 달리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이있다. 그런데다 적석총 4면에 각각 3개의 거대한 호석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키고 있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덤을 지키는 거대한 호석과 퇴물림 기법, 모서리 부분의 아름다운 우동, 고구려 탑의 특징인 85도의 기울기- 함께 답사하신 분 중에 각도기를 가져오신 분이 있어 재어보니 86도 정도가 나왔다-등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고구려인들이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무지무덤인데 이것이 3,4세기 고구려 중기로 오면서 돌무지무덤에 3,5,7단식으로 층수가 증가하면서 계단식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군총은 그 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길눈이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곳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한다는데 ‘피라미드’와 비교할 수 없는 고구려 인들만의 탁월한 건축기법이 군데군데 숨어있다고 했다. 장군총을 쌓아올라간 기울기가 고구려 목탑 기울기(85°)와 같고 면과 면이 만나는 곳을 우리의 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는 우동(처마)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벽 쌓는 기술이 탁월했던 고구려인들의 건축기법을 이 무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돌계단을 올릴 때마다 끝단부분을 도드라지게 홈을 새겨 위 단의 돌들이 밀려 나오지 않게 했다.천 몇 백년동안 무너지지 않고 당당하게 품위를 지켜올 수 있었던데는 이렇게 놀라운 건축기법이 숨어있었다.

  무덤 꼭대기에 묘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제각 기둥을 박은 흔적이 네 귀퉁이에 남아있다고 한다. 목수 신영훈이 고구려 유적직를 답사하고 쓴 책을 보니 그 상상도가 나와 있었는데 3층 누각을 올린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지금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각이 얹힌 모습을 상상해 보니 그림이 달라진다. 무덤 네 귀퉁이 방향에 배총이 있었다는데 고인돌 무덤 같이 생긴 배총이 지금은 한 개만 남아있다.

집안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을 돌아보니 막연했던 고구려사가 조금씩 구체성을 띄고 다가온다.

  내일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인으로 답사를 간다. 그래서 3시경 답사를 끝내고 환인으로 출발했다. 지름길은 공사중이라 돌고돌아 네댓시간을 달려 환인에 닿았다.시내 한 가운데를 파헤쳐 큰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시내가 어수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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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고구려의 무덤 벽화, 해의 신과 달의 신
    from 초하뮤지엄.넷 chohamuseum.net 2008-07-14 03:06 
    요즈음 자꾸 우리 그림들에 눈길이 갑니다. 그런데 사실,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 발굴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난 사극열풍을 타고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를 통해 고구려의 역사 되새겨보기를 하면서, 우리네 벽화들이 볼수록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특히 우리의 벽 그림들 가운데 진수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오래된 무덤(고분)에서 발견된 바로 "고구려 벽화들"입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경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건국되어 중국대륙에서..
 
 
초하 2008-07-14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좋은 감상하였습니다.
관련하여 오늘 올린 벽화 한 점 글 엮어 소개해놓고 갑니다.

다솜 2008-08-0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려 벽화는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그런데 아주 오랜 세월 살아 숨쉬던 그림들이 발굴후 관리 소홀로 몇 십년도 안돼 망가지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엮어놓으신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달게 자고 눈을 뜨니 6시다.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룸메이트도 잠을 깼다.룸메이트는 일어나자마자 TV를 켰다. 우리 나라 SBS, 방송이 나왔다. 그런데 우리 나라 시간으로 6시, 중국시간으로 5시였다. 그럼 4시간 30분 정도를 잤는데 개운하다.

  룸메이트는 다시 잠을 청하고 나는 산책을 나갈까 어쩔까 하다가 오늘 답사할 곳 관련 자료들을 대충 훑었다.

 

아침을 먹고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기 전에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을 관람하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간 곳이 집안 박물관.그런데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공사중'이라는 안내판만 붙여놓았다.박물관도 허술하기 이를데 없다. 아무리 공사중이라지만 고구려 유적지에서 나온 주춧돌이 마당 한켠에 뒹굴고 있다.  4월달에 이곳에 왔다간 길눈이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답사객들이 많은 휴가철이나 방학 때 주로 '공사중'이라는데.  참 기가 막힌다. 유물들을 먼저 보고 현장을 둘러보면 훨씬 고구려인들의 삶에 상상으로나마 다가가기 쉬울텐데.

 

  고구려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는 도성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집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 있었던 곳으로 고구려의 전형적인 산성-평지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제인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다.

  *환도산성


  (환도산성 남문터로 추정되는 산성)
  
환도산성은  집안시내에서 북쪽으로 2.5킬로미터에 해당되는 곳에 있는 환도산에 있다. 최고봉이 해발 676미터라는 환도산은 지세가 험했다. 그래서 오녀산성처럼 동,서,북쪽은 험준한 자연적 지형과 산세를 이용해서 성벽을 쌓지 않고 산마루의 평탄한 곳에 군데군데 석축 성벽을 쌓았단다. 그리고 산들이 모아져 내려오는 골짜기인 남쪽에 견고한 성곽을 쌓아 올렸다. 우리가 본 곳이 남쪽 성곽을 쌓아 올린 곳이자 환도산성을 드나드는 6개의 문 중 1호문지로 추정되는 남문터다. 남문터 좌우 성벽도 허물어지고 끊어지고 일부만 남아있다. 남문 안으로 조금더 올라가면 산성 안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가 있다.


(장대)


(자연석을 조금 다듬어 -그랭이기법이라고 하던가- 쌓은 고구고구려 성, 고구려의 성은 특징이 있다는데 퇴물림 기법(위로 올라가면서 약각씩 들여쌓는)과 돌을 직선으로 차곡차곡 쌓는 것이 아니라 위에 쌓는 돌은 귀퉁이가 아랫돌의 가운데에 맞물리도록 쌓는 것이다. 남아있는 고구려 성벽을 통해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대 맞은편에 있는 환도산성 안에 있던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중국인들의 밭으로 변했다)


(환도산 동남쪽의 가파른 기숡 밑에는 산성하고분이 있다. 이 곳에 있는 고분들은 적석총,석실봉토분과 석실봉토벽화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국내성  

국내성은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장수왕 때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가지 전까지 425년이란 긴 세월동안 고구려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국내성이 있던 곳이 시내 주거지역이라 주택이 들으서면서 헐어내고 서벽의 일부만 그것도 성벽이 아니라 하천이 범람 했을 때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담을 쌓고 터를 돋아 올린 것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총길이 2686미터 중 지금 남아있는 것은 550미터 남짓 된다는데 다리를 건설하느라 그마저도 아래와 같이 끊기고 다리가 건설된 곳에 있던 성벽을 구성하고 있던 돌들도 방치된 채로 뒹굴고 있다.


이런식의 훼손을 방치하면 머지않아 국내성이 있었다는 푯말만 남을 것 같다. 고구려가 그들의 말대로 ‘자신들의 소수민족’이라면 그 소수민족의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로 보듬어 아끼고 보존해야 되는 게 아닌가! 우리 나라에서 고구려의 땅을 찾으려고  할까봐 염려스러워 자기네의 소수민족 중 하나라고 주장만 할 뿐 실제로는 소수민족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하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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