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게 자고 눈을 뜨니 6시다.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룸메이트도 잠을 깼다.룸메이트는 일어나자마자 TV를 켰다. 우리 나라 SBS, 방송이 나왔다. 그런데 우리 나라 시간으로 6시, 중국시간으로 5시였다. 그럼 4시간 30분 정도를 잤는데 개운하다.
룸메이트는 다시 잠을 청하고 나는 산책을 나갈까 어쩔까 하다가 오늘 답사할 곳 관련 자료들을 대충 훑었다.
아침을 먹고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기 전에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을 관람하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간 곳이 집안 박물관.그런데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공사중'이라는 안내판만 붙여놓았다.박물관도 허술하기 이를데 없다. 아무리 공사중이라지만 고구려 유적지에서 나온 주춧돌이 마당 한켠에 뒹굴고 있다. 4월달에 이곳에 왔다간 길눈이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답사객들이 많은 휴가철이나 방학 때 주로 '공사중'이라는데. 참 기가 막힌다. 유물들을 먼저 보고 현장을 둘러보면 훨씬 고구려인들의 삶에 상상으로나마 다가가기 쉬울텐데.
고구려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는 도성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집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 있었던 곳으로 고구려의 전형적인 산성-평지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제인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다.
*환도산성

(환도산성 남문터로 추정되는 산성)
환도산성은 집안시내에서 북쪽으로 2.5킬로미터에 해당되는 곳에 있는 환도산에 있다. 최고봉이 해발 676미터라는 환도산은 지세가 험했다. 그래서 오녀산성처럼 동,서,북쪽은 험준한 자연적 지형과 산세를 이용해서 성벽을 쌓지 않고 산마루의 평탄한 곳에 군데군데 석축 성벽을 쌓았단다. 그리고 산들이 모아져 내려오는 골짜기인 남쪽에 견고한 성곽을 쌓아 올렸다. 우리가 본 곳이 남쪽 성곽을 쌓아 올린 곳이자 환도산성을 드나드는 6개의 문 중 1호문지로 추정되는 남문터다. 남문터 좌우 성벽도 허물어지고 끊어지고 일부만 남아있다. 남문 안으로 조금더 올라가면 산성 안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가 있다.

(장대)

(자연석을 조금 다듬어 -그랭이기법이라고 하던가- 쌓은 고구고구려 성, 고구려의 성은 특징이 있다는데 퇴물림 기법(위로 올라가면서 약각씩 들여쌓는)과 돌을 직선으로 차곡차곡 쌓는 것이 아니라 위에 쌓는 돌은 귀퉁이가 아랫돌의 가운데에 맞물리도록 쌓는 것이다. 남아있는 고구려 성벽을 통해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대 맞은편에 있는 환도산성 안에 있던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중국인들의 밭으로 변했다)

(환도산 동남쪽의 가파른 기숡 밑에는 산성하고분이 있다. 이 곳에 있는 고분들은 적석총,석실봉토분과 석실봉토벽화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국내성 
국내성은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장수왕 때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가지 전까지 425년이란 긴 세월동안 고구려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국내성이 있던 곳이 시내 주거지역이라 주택이 들으서면서 헐어내고 서벽의 일부만 그것도 성벽이 아니라 하천이 범람 했을 때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담을 쌓고 터를 돋아 올린 것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총길이 2686미터 중 지금 남아있는 것은 550미터 남짓 된다는데 다리를 건설하느라 그마저도 아래와 같이 끊기고 다리가 건설된 곳에 있던 성벽을 구성하고 있던 돌들도 방치된 채로 뒹굴고 있다.

이런식의 훼손을 방치하면 머지않아 국내성이 있었다는 푯말만 남을 것 같다. 고구려가 그들의 말대로 ‘자신들의 소수민족’이라면 그 소수민족의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로 보듬어 아끼고 보존해야 되는 게 아닌가! 우리 나라에서 고구려의 땅을 찾으려고 할까봐 염려스러워 자기네의 소수민족 중 하나라고 주장만 할 뿐 실제로는 소수민족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하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