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시’를 읽다

 

겨울 달빛으로 시를 썼다
밤새가 운다고

추운 물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든다고

달이 자꾸 가고 있다고
언 손을 부비며

겨울 달빛으로 시를 썼다

달빛에 목이 마르면

꽝꽝 언 마당을 밟고

텃밭에 나가

어두운 무 구덩이 속에서

무를 꺼내다가 깎아 먹었다

바람 든 무를 베어 물 때마다

이가 시리고

흰 무에 빨간 피가 묻어 났다

어둡고 캄캄한 무 구덩이 속에서는

무순이 길어나고

긴 겨울밤

휘몰아쳐 오는 외로움과 적막,

그렇게 나도 어둠을 뚫고 빛을 찾았다

시가 내 빛이었다
시가 어둠 속에서 나를 찾는 흰 손이었다

김용택 시인이 긴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올 수 있었던 ‘시’

나는 이렇게 절실한 뭔가는 없다. 다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즐거운 상상들을 동화로 풀어내면 어떨까 생각하는 정도다.

  마지막 구절 ‘시가 내 빛이었다 /시가 어둠 속에서 나를 찾는 흰 손이었다’라는  구절을 보니 '시'는 김용택 시인에게 있어 구원의 손길이었다.그런데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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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소금강산 기슭에 있는 유적들을 보러 갔다. 지도를 잘못보고 경주시청 앞에서 오른쪽 길로 꺾어 헤메다가 다시 경주시청을 찾아 나와 본능적인 안테나를 믿고 직진, 백률사 진입로를 찾았다. 진입로를 따라 50미터 정도 올라오니 바로 이번 답사길에 가장 보고 싶었던  ‘굴불사지사면석불’이 보였다. 

 

  *굴불사와 사면석불 
  굴불사와 관련 『삼국유사, 三國遺事』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사면불은 사방세계에 부처님이 계셔 중생들을 구한다는 신라인의 불국토사상을 표현한 것이란다.


(서쪽면의 아미타삼존불)


(동쪽면 약사여래좌상)


(남쪽 삼존입상-훼손이 아주 심하다. 왼쪽에 있는 조각은 아예 송두리채 없어지고,1900년대 초까지도 온전하던 것이 일제 때 이렇게 훼손됐단다)


(북쪽면의 보살상 두분, 오른쪽 보살은 마모가 너무 심해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백률사 

 법흥왕 14년(527),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율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퍼하여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자추사로서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웅전 올라가는 돌계단 부근에  발견되었다는 이차돈 순교비는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단다.

 


(대웅전 올라가는 돌계단과 아담한 대웅전)

올 같이 더운 여름날 경주를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거기다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려니 일행 한 명은 힘들다고 난리를 쳤다. 집안에 있는 ‘오녀산성 오르는 길이 천계단이 아니라 여기가 천계단....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답사 끝나고 팥빙수 사주겠다. 거기 가면  탑을 새긴 독특한 바위를 볼 수 있다. 등등’ 의 말로 꾜셔 함께 올라갔다. 사실 오녀산성과는 비교도 안되게 가깝고 쉬운 길이었다. 그런데 조금 올라오다 힘들다고 난리친 일행이 하는 말에 배꼽을 잡았다.

  ‘이차돈은 하필 왜 이 험한 산 기슭에서 순교를 해가지고.  마 평지서 하지.’ 
  이곳에 올 때는  ‘백률사를 갔다가 대웅전 뒷편에 있는 동천동 마애불을 보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으나 마음을 접었다. 

 

 백률사, 올라보니 암자 같다. 아담한 대웅전 건물 한 채랑 뒤에 산신각 하나가 전부다. 쓰임을 알 수 없는 부재들이 입구에 이쪽저쪽에 널려있다. 그래도 애써 올라올 만하다. 그런데 기단이 독특하다. 탑은 없고 바위에 탑을 새겼다.아마도 탑을 세울 자리가 없어 바위에 탑을 세웠을 거란다.


(대웅전 앞 탑을 새긴 바위)


(대웅전은 고려시대 중전한 것이나 기단은 신라시대 건축물의 특징을 담고 있단다.자추사의 흔적인가)

 

*표암

  백률사 진입로 오른쪽 길을 따라 쭈욱 내려가 탈해왕릉에 들렀다. 탈해왕릉 옆에 경주 이씨들의 근원지 표암이 있었다. 박바위 혹은 밝은 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가 경주 이씨 시조인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란다.




 *탈해왕릉.

표암 옆에 신라 제 4대왕 탈해왕의 능이 있다. 오전에 답사했던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은 중기에서 신라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산 속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탈해왕릉은 초기의 왕릉인 만큼 평지에 있다. 초기 왕릉이 그렇듯이 아무런 장식이 없이 흙을 쌓아올린 봉토무덤이다. 그런데 오른쪽 소나무 한 그루는 능을 향해 절을 하듯 엎드려 있고, 왼쪽 소나무들도 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특이하다





 * 노동.노서 고분군

제 41대 헌덕왕의 능은 오전과 오후에 봤던 다른 능과 비교하며 보기 좋은 능이었는데 그냥 왔다. 더위에 지친 이들을 위해 팥빙수를 먹으러 가는 길에 노동.노서 고분군을 봤다.

  노동 고분군 중 우리 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봉황대는 작은 동산 같다. 무덤 안에 나무 뿌리가 뻗치면 자손들에게 재앙이 생긴다는데 희한하게 무덤 위에 나무가 크게 자랐다. 누가 뽑지도 않았는지. 이색적인 풍경이다



  노서 고분군은 노동 고분군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 곳에는 우연히 금관이 발견되었다는 금관총,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발구레 참여했다는 서봉총,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그룻이 나왔다는 호우총 등 주인을 알 수 없는 1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있다.


  의자에 앉아 짙은 연두색 고분 능선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쉬다가  ‘고분군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보니 ...’를 흥얼거리거 고분군 사잇길을 걸어 나왔다


(함께 간 이들)

강석경은  '경주산책'이라는 책에서 '여름에 경주를 답사한다는 것은 죽음에 가깝다'고 했다. 경주 또한 대구 같이 분지지형이라서 그냥 더운 정도가 아니라 헉헉댈 정도로 덥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경주는 숲이 많아 권내 답사를 느슨하게 잡으면 시원한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숲길을 산책하기도 좋아 여름 답사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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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8-2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왜 고분 위에 나무를 그대로 두는 건지??

다솜 2007-08-2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덤 위에 저렇게 큰 나무가 자랄 때까지 왜 그대로 두었을까? 갸웃거리다가 고정관념을 벗고 바라보니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연꽃 구경겸 경주 답사를 갔다.

이 맘때 연꽃이 아름답다는 서출지, 그리고 주변 유적과 굴불사지사면불이 있다동천동 기슭, 그 주변에 있는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기전에 지도를 보고 오전과 오후로 나눠 답사 일정을 짰다.

안압지 옆 연꽃-헌강왕릉-정강왕릉-서출지 연꽃-남산리사지 동서 3층석탑
점심

굴불사지사면석불-백률사-(동천동 마애불을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산 오르는 걸 무쟈게 힘들어하는 이가 있어 의논하기로 하고)-탈해왕릉-헌덕왕릉. 

 

이 중 헌덕왕릉담에 보기로 하고 시내로 나와 팥빙수 먹으러 가는 길에 노동.노서 고분군을 보고 나머지는 그대로 답사했다.


 경주 답사 -서출지와 그 주변 유적지(오전)

 *안압지 옆 연꽃

국립경주 박물관 앞에서 일행들을 만나 안압지 옆 연꽃을 보러 갔다.



 연꽃 향이 은은하게 풍겨 기분은 그만이었지만 그냥 무논에 관광객 유치를 위해 심은 연꽃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수 많은 연꽃 봉오리가 벙글기 전 터질듯 부풀어 올랐을 8월초 쯤은 그래도 좀 볼만했겠다. 
 

*헌강왕릉 
 서출지로 가는 길에 있는 유적지 중 지도에 표시된 두 왕릉을 보기로 했다. 많이 알려진 능이 아니라박물관에서 서 ‘별로 볼게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처음 계획했던 대로 갔다. 신라 제40대 헌강왕릉에 오르려면 차 댈 곳이 마땅이 없어 좀 불편하다. 그러나 능으로 올라가는 길이 참 좋다. 솔바람 소리에 맞춰 춤추는 듯 리드미컬한 소나무 모양새를 보는 보며 가는 것도 즐겁고, 찌는 듯한 여름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걷는  것도 즐겁다.

 (헌강왕릉은 아래쪽에 4단의 둘레돌을 둘렸다. 둘레돌이 능의 아래부분을 단단하게 싸고 있는 것 같다)


(헌강왕릉 앞에서 본 숲길)

 

 

*정강왕릉

서출지 입구에 차를 대고 신라 제 50대 왕 정강왕의 능을 올랐다. 정강왕은 49대 헌강왕의 아우로 1년정도 왕위에 있다가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란다. 정강왕릉은 봉분 맨 아랫부분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2단의 둘레돌을 둘렀다. 그런데 참 쓸쓸해 보인다.헌강왕릉은 당당해 보였는데.


 *서출지 
 서출지는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한 전설을 서린 연못이다. 이 연못에서 서출(書出)이 나와 계락을 막았다는 설화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때마침 우리가 갔을 때 문화해설사로 계신 동네 할아버지께서 서출지 관련 설화를 통해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해 주셨다

 요약해 보면 
  ...까마귀, 쥐 같은 것들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것으로 보아 소지왕 때까지도 토속신앙이 불교를 제압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것,그렇지만 궁에 분향을 하던 승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가 상당한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소지왕 때라면 신라에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들어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설화에 나오는 ‘거문고갑(琴匣)’의 ‘琴’은 거문고가 아니라 ‘신라금’이었을 것이라는 것...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로 일본 나라에 있는 동대사 정창원 일지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로 대 주셨다. 정창원 일지에 의하면 ‘신라금’ 2대가 출고한 기록이 있단다. 신라금은 삼나무로 만들었고, 길이는 198미터에 이른다는 것도 나와있단다) 

 그리고 이 연못가에 1664년 임적이 지은 이요당이라는 건축물이 있다



 이요당은 ‘요사요수’를 즐기기 위해 지은 건물이란다. 남산과 이요당 앞 연못. 그런데 그 연못에 연꽃이 가뭄에 콩나듯 피었다. 그리고 잎이 병들어 시들시들한 것들도 많고.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연을 심은지가 오래되어 그렇단다.  연꽃은 볼게 없었지만 서출지 입구 500년쯤 되었다는 느티나무의 넉넉한 그늘아래 앉아 전치덕 할아버지의 강의를 들은 것 만으로 의미있었다. 
 

*남산리사지동서 3층석탑



 서출지 옆 남산리사지 동서3층석탑을 보러 갔다. 마을구경을 하며 난들난들 걸어가는데  땡볕이라 양산을 쓰도 팔과 다리는 따갑다. 그런데 마을이 정이 간다. 볼 수록 마음에 든다. 그래서

  “돈 벌어서 여기 집 하나 장만해야겠다.”

  그랬더니 일행 중 한명이 하는 말

  “여기 땅값 장난아니에요. ‘서출지 옆에 집 있는 남자’ 구한다는 구혼 광고 내는 게 나을 걸    요” 
  이랬다.  마음을 접고  탑을 보러 갔다. 

남산리사지 동서3층석탑은  불국사 앞 마당에 있는 두 탑처럼 동서 탑이 다르다. 동탑은 모전석탑 양식이고, 서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적인 탑 모양이다. 서탑의 윗층 기단 몸체에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八部衆像)을 새겨놓았다. 남산 자락 밑 아늑한 마을에 안기듯 자리 잡고 있는 남산라사지 탑을 이리저리 한참을 쳐다보고 대릉원 주변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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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 집에 기르던 개다.

형제가 없는 이 아이는 개를 기르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분이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기 힘들다며 이 아이에게 개를 선물로 주셨다. 엄마는 개 기르는 것을 썩 달가워 하지 않아  사양하고 싶어했지만 아이는 엄마가 안 계실 때 개라도 있으면 가족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개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개를 데리고 온 후 아이보다 엄마가 그 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개가 아이 엄마를 자신의 엄마인양 따랐기 때문이다. 아이의 엄마는 엄마를 두고 온 어린 개가 가여워 정이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 막내‘라고 할 만큼 좋아했다. 그런데 그 개가 얼마 전에 죽었단다. 그것도 아이 엄마의 실수로.


  개가 죽었다는 하루 전날 서점을 갔다가 아이와 엄마를 우연히 만났다. ‘딸기’를 데리고 서점에 책을 사러 왔다가 나를 만난 것이다. 오랜만에 ‘딸기’를 보고 내가 그랬다.

  ‘어머, 딸기도 왔네. 안녕.’

  그랬더니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런데 그게 딸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책을 사고 나오는 길이라 먼저 서점을 나섰고, 나중에 들어왔던 아이와 엄마는 나보다 조금 뒤에 책을 사고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그만 사고를 당했단다.  

 

  이 이야기를 한 주가 지난 후에 아이와 엄마께 들었다. 개를 보호하려다가 오히려 개를 잃게 된 엄마는 일주일 내내 혹독하게 앓았다. 자신의 잘못으로 개를 죽게 했다는 자책감에. 계단에서 굴러 자신의 다리도 피멍이 들은 것도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단다. 함께 수업하는 아이들이 딸기의 안부를 묻자 아이는 ‘딸기는 다쳐서 병원에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눈물을 쓰윽 훔쳤다. 아이도 상처가 아주 깊었다. 다친 개를 안고 병원에 가는 길에 자신의 품속에서 죽은 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고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짐승에게 너무 깊은 정 주지 말라고’

그런데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을 까봐 가족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는 사람이 없듯이 개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말은 의미없다. 


  아이 엄마의 친정어머니께서 딸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얼마전에 듣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꿈자리가 계속 뒤숭숭 하더니 네가 많이 다칠 것을 딸기가 대신 변을 당한 모양아다’

  그 말을 들은 아이 엄마는 딸기에게 더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다.  살아서 주인에게 기쁨을 주고, 주인이 당할 ‘화(禍)’를 대신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딸기가 아이와 엄마의 기억 속에 가슴 아픈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지금도 '금방이라도 딸기가 달려올 것 같은 느낌'이 시시때대로 든다는 아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목이 메인다 .

  ‘부디 하늘나라에서 딸기가 00이네 가족과 같은 분들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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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구멍 속의 비밀 우리또래 창작동화 1
이은하 지음, 윤정화 그림 / 삼성당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호호 아줌마가 작아지는 비밀’에 나오는 호호 아줌마는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달식이도 호호 아줌마 같이 변신을 한다. 호호 아줌마는 버거운 일이 생길 때마다 몸이 작아지는데 달식이는 왜 변신을 할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자신이 한없이 크게 느껴진다. 반면 ‘너는 그것도 못하니? 이 바보야,’ ,‘너는 왜 그모양이니?’ 와 같은 말들을 들으면 한없이 작아진다. 달식이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잔소리를 할 때마다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진다.달식이가 작아지는 이유다.

  

아이들이 주변인물들의 태도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는 하는 것,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진 달식이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장군이의 칭찬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달식이로 인해 장군이 또한 자신감을 회복해 가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두 아이를 친구로 엮어주기 위해 달식이가 장군이의 콧구멍 속에 들어가 살고 있다는 상상은 참신하고 엉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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