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역사
아루카 나츠키.유이 다이자부로 지음, 양영철 옮김 / 삼양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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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시끄럽다. 매일 아침마다 뉴스와 신문은 전날 밤 광화문 앞에 몇 만명이 모였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일면 탑으로 보도한다. 정부는 무능했고, 국민들은 화가 났다. 출범한 지 불과 100일밖에 되지 않은 정부가 십만이 넘는 군중을 도시의 중심으로 나오게 한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 민심을 외면하고, 더욱이 극도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일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정부는 미국을 너무 얕잡아 봤다. 어쩌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취임 극초반기의 민심 이반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질과 속성에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미국과 관련된 민심의 혼란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국내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미군에 의해 발생한 효순이·미선이 장갑차 사건은 수많은 군중을 시청 앞으로 모이게 했고, 아직도 상반된 평가가 잇따르는 한미FTA 협상 타결 후에도 적잖은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유럽을 위시한 서구 선진국에서도 반미시위의 규모는 결코 녹록지 않다. 특히 아랍권에서의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며 강렬하기도 하다. 20세기 후반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세계 도처에서의 안티 물결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세계 초강대국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쉬운 질문이면서도 두세번 곱씹으면 결코 만만치 않은 질문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대극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 인권의 유토피아, 장애인들의 천국, 민주주의의 전도사 등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불리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어느덧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해석이 학자들 사이에서 다수설로 일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급부상하며 세계 제일의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자국 내외의 많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꿈과 기회의 국가라는 이면에는 세계 제일의 양극화 사회가 존재하고, 자유와 인권의 이면에는 총기사고를 위시한 각종 범죄가 도사리는 불안정한 사회가 존재하며, 평화와 사랑을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의 이면에는 석유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전쟁제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제대로 알고 연구해야만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헤게모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은 자명하다. 미국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연구할 때만이 불완전한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제이션에서 살아남는 자생적 길임을 단언한다. 

  현재 미국 관련 도서는 수많이 출간되었고 또 출간되고 있다. 주류역사를 초점으로 그저 사실에만 입각한 책이 있는가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영역에서 미시적인 관찰을 보여준 책도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혼란한 미국의 현재성을 분석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책도 쉽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두 명의 일본 지식인이 집필한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역사』는 230년의 미국사를 주류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시간의 흐름이 아닌 몇가지 주제로 카테고리화해 미국사를 서술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실 미국역사에 대한 상식적 수준의 개괄을 정리한 도서는 서점에 수없이 많다. 이 책의 경우도 미국역사의 객관적 서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의 주관성은 철저히 배제된 채 미국의 주류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해석'과 '변혁'이 아닌 그저 '반영'의 잣대로 미국사를 풀이하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이라면 바로 목적에 충분히 충실했다는 점이다.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부분을 알맞게 주제화하여 무난하게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마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부분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닌 21세기에 이슈가 되는 열다섯 개의 아이콘으로 카테고리화하여 미국사를 가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환경'을 위시하여 경제, 국민통합, 젠더(gender), 문화, 민주주의 등의 코드로 미국사를 서술한다. 각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도판과 표, 그래프와 주석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저자의 세심한 배려이다. 게다가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칼럼'과 '미국 역사 깊이 읽기'라는 코너로 내용을 부언하며 마무리한 점은 단연 깔끔하다. 

  하지만 저자의 주관적 '논설'이 결락된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이미 객관적으로 정리된 주류의 미국역사는 출판계뿐만 아니라 각종 미디어에서 많이 노출된 바 있다. 저자 나름의 미국사에 대한 견해와 비주류적 관점, 합리적인 비판의식 등이 언급되었다면 더욱 힘있는 인문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제 더이상 '미국'이라는 아이콘은 통일된 시각의 객관화로 공유하기에는 수없이 많은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본사람이었기에 일본 학계와 출판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미국사를 기대했던 것은 애당초 무리였던 것이다.  

  지식인의 미국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건전한 비판은 대중의 안목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균형있게 미국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학문은 객관적 '사실'만을 지향하는 작업이 아니다. 학문의 종국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가장 좋은 최선의 세계로 <변혁>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닿아 있다. 230년의 미국사를 마치 잘 다듬어진 교과서를 보는 것인양 체계적으로 다룬 점은 돋보이나 조금 더 멀리 나가지 못한 아쉬움은 끝내 잔존한다. 하지만 괜찮다. 건전한 주관화와 진실된 용기는 제대로 된 <앎>을 전제하기 마련이며,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존재가치는 딱 그 즈음에 있다.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미국은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다. 어마한 시장규모를 기반으로 한 경제력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타국이 쫓아갈 수 없는 문화의 힘은 아직 건재한 미국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시대는 급변하며, 영원한 제국은 일찍이 인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국의 과거를 학습하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안목은 응당 필요한 작업이다. 비단 쇠고기나 FTA를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21세기 미국을 <정확히> 알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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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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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산문집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특질이란 게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있는 사유의 세계와 브랜드화 된 작가 자신의 문학적 개성이 희석되지 않은 채 산문의 활자 속에도 오롯이 내재되어 있다. 굳이 격이 다르다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산문과 수필에서도 드러나는 소설가 특유의 아우라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끔 독특하다.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가 그렇다.  

  여행은 대략 좋은 것이다. 여행 자체에 대해 나쁘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 물론 여행이라는 고도의 열정과 극한 정신력이 필요한 작업에 대한 인간의 호오는 대개 여행의 목적에 따라 가름되곤 한다. 뚜렷한 목적과 동기를 갖고 떠나는 것과 아무런 의미없이 무작정 떠나는 것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여행의 내밀한 속성이 숨어 있다. 그저 아무런 계획과 의미없이 떠난다 할지라도 여행은 반드시 무언가를 인간에게 선사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여행이든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 그리고 여행이라는 가슴 두근거리는 작업. 이 두 가지 조화에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가 있다. 언제나 유머러스한 활자를 만들어내는, 하지만 결코 가벼운 문장을 완성하지 않는 그가 여행을 권리화한 내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잘나가는 한 소설가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여행'의 속성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은 내 머릿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일렁였다. 

  작가 김연수는 러시아, 일본, 독일, 미국, 중국에서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특유의 재치있는 글담으로 편안하고 부담없이 자신의 여행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하지만 김연수에게 여행은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는 외연적 정의가 아닌 자신의 삶과 문학의 세계를 곱씹고 입체화하는 기회의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수에게 여행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바로 그 욕망으로써 자아와 문학을 재조명·재해석하고자 하는 작가 김연수의 갈망이 책 속에 잘 녹아 있다. 

  이 책에는 김연수의 문학적 이상想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작가 차학경의 『딕테(Dictee』 중 어머니의 생애를 다룬 「칼리오페 서사시」를 읽다가 "당신은 움직입니다. 당신은 옮겨집니다. 당신이 곧 움직임입니다.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고정된 어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단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문장을 윤동주의 시 「길」과 연결짓는다. 김연수는 문학의 본질을 여기서 발견한다. 뭔가를 찾아 영구 운동하지 못하는 문학, 영구 망명을 꿈꾸지 못하는 문학은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 될 수 없음을 피력하는 작가 김연수. 바로 여기에서 그의 문학적 이상과 맞닿아 있는 '여행할 권리'의 속성을 풀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너무 장황하고 산만하게 산문집의 구성력을 비통일화시킨 점은 아쉽다. 소설가로서의 여행할 조건과 권리는 대중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기 마련이다. 러시아의 우스리스끄만, 일본의 나고야와 도쿄, 독일의 밤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미국의 버클리와 옌지, 중국의 룽징과 후쟈좡 등 '국경' 바깥쪽의 리얼리티를 사모한 김연수 자신의 내면 세계의 계속된 열창은 '여행할 권리'보다는 '문학의 의무'에만 일관하며 한 부분을 접사화시킨다. 그렇기에 '김연수'와 그의 '문학'에서 모두를 조건없이 포용할 수 있는 독자가 아니고서는 비공감될 수 있는 문장일 수 있다.  

  더욱이 책의 마지막 일본 도쿄에서 작가 이상((李箱, 1910~1937)의 죽음을 재조명하며 거대한 분량을 할애한 부분에선 고개가 심히 갸우뚱거린다. 마치 취재파일의 기사를 쓰듯 이상의 작품과 주변인물들의 고백을 수차례 인용하면서 그의 의문사를 다큐멘터리화한다. 게다가 동시대 시인이었던 박인환(朴寅煥)과 김수영(洙洙暎)을 교차·대조시키며 산문집의 거시적 통일성에서 일탈하기도 한다. 작가 이상의 죽음과 당시 도쿄에서 그가 실망했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는 김연수의 지나친 활자 할애는 한 천재 작가에 대한 후배세대 작가로서의 경외와 동경 이상의 의미를 넘지 못하고 있어 깊이가 덜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누구든 어디든 떠나야 한다는 김연수의 일탈 예찬은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역'과 '휴게소'와 '공항'은 언제라도 나를 매혹시킬 세 개의 공간이라 고백하는 작가 김연수의 모습에서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다.  

  여행은 나를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준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 말하는 김연수의 심정을 내 마음속에 품는다. 그리고 긍정한다. 세상의 모든 여행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광시야각을 <반드시>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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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예배자 - PK와 함께하는 은혜의 실크로드 항해
이요셉 글 사진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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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사무엘하 6:14> 

  여기 한 명의 왕이 있다. 거대왕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그는 자신이 섬기는 신의 법궤를 수도로 옮기는 현실이 너무 기뻐 환희에 젖는다. 그에게 그 일은 너무 좋다. 그냥 좋다. 무조건 좋다. 참으로 좋다. 수많은 성가대와 신하들을 대동하여 백성들과 함께 법궤 이동의 현장에서 신을 찬양한다.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춤을 춘다. 바지가 내려가기까지 춤추며 찬양한다. 왕이라는 신분을 잊은 채 한 명의 어린 아이인양 신을 찬양한다. 논리와 이성과 체면을 모두 망각한 채 오직 신을 향해 종의 심정으로 춤을 춘다. 바로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우주의 물리학은 그를 중심으로 운행한다. 그가 사랑하는 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주목하는 순간이다. 

  다윗의 매력에 빠진지도 어언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임을 고백하며 평생 하나님 앞에서 젖뗀 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살았던 다윗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모형으로서 내 가슴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다. 여호와의 법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는 기쁨에 심히 경도된 다윗이 왕의 신분을 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춤추는 사무엘하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찬양의 진수를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춤추는 것, 그것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행위이다. 

  토기장이 출판사의 『춤추는 예배자』에는 이 시대에 다윗의 춤을 추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과 고백이 담겨있다. 'PK(Promise Keepers)'의 일원으로 춤추며 예배하는 14명의 젊은이들과 사진작가 이요셉은 복음의 불모지인 중국땅으로 한 달간의 사역에 나선다. 실크로드 항해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모르며 살아가는 공산권 국가의 이곳저곳에 영혼의 흔적을 남겨놓는다. 열정적인 춤과 간절한 기도와 진실어린 눈물로써. 

  책 속에서 가장 인상깊은 내용은 위구르인(터키계의 유목 민족)이 주민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의 사역이다. 1990년 구소련의 붕괴 이후 유일하게 독립하지 못한 이 지역에 대해 중국정부는 철저하게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이 피지배 민족은 이슬람으로 똘똘 뭉쳐있는 철옹성의 비복음권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의 중심부인 카슈가르(Kashgar)의 이슬람 사원인 '이드카 모스크(Id Kah Mosque)'에서 수만 명의 이슬람교도들에게 노방찬양을 전하는 PK단원들의 용기와 믿음은 과히 압권이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적하는 도전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16억의 중국대륙과 12억의 인도땅, 그리고 13억의 모슬렘은 철옹성으로 굳게 닫혀 있다. 수없이 많은 선교사의 파송과 계속된 기도의 공격을 감행하지만 움직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주어가 인간일 때이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용될>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실 때에 굳게 닫힌 수십 억의 비복음권은 붕괴될 것이다. 언젠가 무너질 13억의 모슬렘과 30억의 중국·인도대륙의 미래를 생각하면 강한 전율이 차오른다.  

  PK 단장 장광우는 고백한다. 주를 위한 딴따라로 천국광대들의 흔적이 되고프다고. 하나님 앞에서 광대는 좋은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춤추며 노래하는 광대. 그것은 3,000년 전의 위대한 광대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감의 단면이기도 하다. 나는 기도한다. 부디 지금처럼 천국의 춤으로 하늘 보좌를 높여드리는 PK의 열정과 수고가 계속되기를, 그리하여 이 시대의 작은 다윗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자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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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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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각종 미디어에서 수없이 조명하고 천착하는 아이콘이 되어왔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조는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지만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의 군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근자에 폭발적으로 조명받고 있는 그의 존재감은 과연 어떤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왕에 대해 왜 21세기 한국사회는 현미경을 들이대며 재천착하는 걸까. 

  조선시대 최고의 군주로 세종을 꼽는데 주저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룬 세종은 수백 년이 지난 후손들의 마음속에 강렬히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 못지 않게 정조의 대중적 인기가 녹록지 않아 자못 흥미롭다. 세종이 왕조 500년의 안정과 기틀을 마련했다면, 정조는 모순된 왕조를 혁신한 군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당파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던 18세기에 등장해 수많은 반대 세력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정치력에서는 오히려 세종보다 몇 수 위라는 것이 역사학계와 대중들의 일관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는 당시 혼란한 정국을 발군의 정치력으로 수습하고, 신권에 의해 난자당한 왕권을 회복하며 조선의 개혁을 이룬 이산 정조를 다룬 책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어렸을 적 아버지가 귀주에 갇힌 채 굶어죽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자란 이산이 어떻게 그 한을 인내하며 뒷날의 역사가 인정하는 위대한 군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한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방적 서술이 아닌 관점별로 정리하여 한 군주를 조명하고 있어 보다 합리적인 가독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책은 총 4개의 카테고리로 가름하여 정조시대를 서술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최대의 행차였던 1795년의 을묘원행을 전면에 배치하며 제왕의 위세를 보여주려 했던 정조의 위엄을 소개한다. 2부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핍박과 고진 역경을 헤치며 왕위에 오른 정조의 정체성과 이를 풀어가는 정치력을 얘기한다. 3부에서는 개혁군주로서의 정책과 업적을 세심하게 서술한다. 계속해서 홍국영을 위시한 정조 안의 사람들과 반대세력인 정조 밖의 사람들을 소개하며 내용을 마무리짓는다. 

  딱딱한 한 시대의 역사를 다뤘음에도 이 책이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는 맛깔난 대화체로 풀어낸 저자의 재치에 있다. 한 군주와 당시의 시대상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저자는 정조와 신하·백성간을 흥미로운 상상적 대화체로 조화시킨다. 다소 가볍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본래 정조가 민초의 삶에 각별한 애정을 보인 군주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그러한 유머러스한 접근은 정조라는 군주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고 본다. 더욱이 정조가 상언言·격쟁錚의 제도를 집대성한 왕이었기에 백성에 대한 정조의 사랑을 위트있는 문체로 우의하여 승화시킨 점에서 그 가벼움은 문제되지 않는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개혁군주'라는 타이틀을 시종일관 흔들리지 않는 초점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이노베이터'라는 책의 부제를 일관되게 뒷받침하며 조선을 개혁한 군주로서의 정조의 존재감을 잘 드러낸다. 신하가 군왕을 세우는 당시의 모순된 조선왕조를 군왕이 신하를 세우는 정상적 국가로 되돌리려 했던 정조의 혁신의지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펼쳐졌고 어떻게 열매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조 사후 역사에 있어 결과적으로 조선이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정조라는 아이콘을 보다 입체적으로 천착하는 것은 응당 필요하다. 정조의 죽음 이후 정순왕후를 위시한 노론 벽파의 한풀이로 개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으며, 순조의 친정과 함께 또 다른 피바람이 불며 외척의 세도정치라는 조선 후반기 씻을 수 없는 망국의 원인이 된 역사적 귀결을 볼 때 이 부분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연결의 빈곤함은 몹시 아쉽다. 요컨대 조선의 망국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조 사후의 중요한 역사를 불과 여섯 페이지의 에필로그로만 담은 점은 나무보다는 숲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역사의 거시적 인과성을 배제한 구성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에 대한 저자의 무리한 해석이 비공감된다. 남편 사도세자와 적대적 관계였던 노론 집안의 딸로서 남편이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혜경궁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아들인 세손(훗날 정조)까지 잃을 수는 없었기에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겠는가. 이에 대해 정치적 입장과 계산으로만 풀이하여 혜경궁홍씨를 재단한 것은 옳지 않은 접근이다. 아직도 혜경궁홍씨와 《한중록》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팽팽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리하게 정치적 색깔을 객관화시킨 해석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책에 대한 호오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다시 정조로 돌아가보자.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당쟁이 심할 수록 공동체의 행복은 요원해지는 법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당파싸움의 현장에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기틀을 상식적으로 개혁하려 했던 정조는 응당 위대한 이노베이터였다. 작금의 우리사회를 보자. 21세기 한국사회의 나침반은 리더십의 부재와 민심의 요동으로 불행복을 가리키고 있다. 어쩌면 최근 정조의 리더십과 개혁의지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것도 이러한 21세기 혼란한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방증하는 것이리라.  

  한국인들은 아무에게나 '대왕王'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지 않는다. 한민족 5천년의 장구한 역사는 그리 많은 대왕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제 한국인들 사이에서 '정조대왕'은 결코 뜨악한 호칭이 아니다. 어느 신하보다도 뛰어난 지덕을 겸비한 군주, 발군의 정치력과 추진력으로 백성들의 절대 지지를 받은 군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철저한 준비로 면밀함이 돋보인 군주, 무엇보다 조선의 뼛속까지 바꾸고자 했던 혁신군주 정조는 그야말로 위대한 <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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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더 사랑해
션.정혜영 지음 / 홍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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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결혼을 할 것입니다.
이유는 제 남편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거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제 남편보다 저를 더 이해하고 저를 더 사랑해 줄 수 없을 거 같기 때문입니다.
나로 하여금 작은 것에 감사하게 하고, 나눔의 행복을 알게 하고, 나를 긍정적으로 바뀌게 한 사람입니다.
지금 남편 없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 같은 하음이와 하랑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하나님만나게 해 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 67>
 

  탤런트 정혜영의 고백이다. 지난 2004년 10월 8일 힙합그룹 지누션의 션과 탤런트 정혜영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자신의 콘서트에서 6,000명의 팬들 앞에 공개 프로포즈를 하여 뭇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동경을 받았던 션은 첫눈에 반한 여자 혜영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3년여 동안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부의 사랑은 더욱 오롯해진다. 『오늘 더the 사랑해』는 이러한 션·정혜영 부부의 행복일기를 담은 포토 에세이다. 평소 자신들의 개인홈피에 올렸던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올칼라판으로 출간한 이 책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부부애,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충만히 담겨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책의 내용은 총 다섯 파트로 가름된다. 아내 혜영에 대한 남편 션의 사랑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첫 아이 하음과 둘째 아이 하랑에 대한 연이은 사랑의 테마가 이어진다. 계속해서 두 부부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돕고 봉사하며 기부하는 일과 아내 혜영의 요리 이야기를 소개한다. 책 속 곳곳에 소개된 몇몇 동료 연예인들의 피처링 문장이 이목을 끌기도 한다. 각 장 마다 두 부부와 하음이 하랑이, 그리고 가정의 비전과 관련된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한 가정의 진면목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미지화하게 된다. 

  션·정혜영 부부의 행복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의해 그들의 행복은 태동했고 완성되었다. 책 속에서 사진과 조합되는 각 장의 문장들마다 션과 정혜영은 행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수없이 예찬한다. 션은 고백한다. 혜영이를 만난 것, 두 자녀를 가진 것, 그리고 자신이 지금 이토록 행복한 것, 그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주님을 의지하고, 찬양하며, 사랑하는 두 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가정을 작은 천국으로 만드는 근원적 힘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발현된다는 사실을 션·정혜영 부부의 삶은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두 아이의 이름이 자못 아름답다. 하음이와 하랑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하음이와 하랑이는 두 아이의 귀엽고 앙증맞은 외연적 얼굴 못지 않게 내면적으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소망이 함의되어 있다. 이름을 지은 부모의 바람대로 하음이와 하랑이가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된 주의 자녀가 되기를 축복한다. 더욱이 이 축복은 션·혜영 부부의 간절한 기도로 보증되기에 더욱 고차원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기실 우리사회에서 연예인 부부의 삶은 대부분 아름답지 못 해 왔다. 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연애했고, 수많은 대중들의 박수와 갈채를 받으며 결혼했지만,오래잖아 변변찮은 이유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지막 이별의 모습이 심히 추하여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연예인 가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연예계에서 션과 정혜영 부부는 주변 동료 연예인들도 부러워하며 벤치마킹하고픈 행복한 연예인 가정의 아이콘으로 통한다고 한다. 하나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를 하나님중심주의로 양육하며,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두 부부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태곳적에 창조하신 에덴의 가정의 전형이리라. 

  나는 가정 예찬론자이다. 행복한 가정이 밝은 사회를 만들며 강건한 국가의 기틀이 됨을 인류역사는 명징하게 증명한다. 하나님 안에서 아가페를 누리며 살아가는 안정감. 바로 그 안정감이야말로 가정이 <천국>이 되는 기적의 보증이다. 션·정혜영 부부가 누리고 있는 작은 천국을 찬미하며,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찬양한다.  

  요컨대 『오늘 더the 사랑해』는 에덴의 가정이 되어 천국을 이뤄가는 젊은 연예인 부부의 작은 흔적이다. 찬란하게 빛나고 심히 아름다운.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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