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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소설가가 쓴 산문집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특질이란 게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있는 사유의 세계와 브랜드화 된 작가 자신의 문학적 개성이 희석되지 않은 채 산문의 활자 속에도 오롯이 내재되어 있다. 굳이 격이 다르다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산문과 수필에서도 드러나는 소설가 특유의 아우라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끔 독특하다.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가 그렇다.
여행은 대략 좋은 것이다. 여행 자체에 대해 나쁘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 물론 여행이라는 고도의 열정과 극한 정신력이 필요한 작업에 대한 인간의 호오는 대개 여행의 목적에 따라 가름되곤 한다. 뚜렷한 목적과 동기를 갖고 떠나는 것과 아무런 의미없이 무작정 떠나는 것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여행의 내밀한 속성이 숨어 있다. 그저 아무런 계획과 의미없이 떠난다 할지라도 여행은 반드시 무언가를 인간에게 선사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여행이든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 그리고 여행이라는 가슴 두근거리는 작업. 이 두 가지 조화에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가 있다. 언제나 유머러스한 활자를 만들어내는, 하지만 결코 가벼운 문장을 완성하지 않는 그가 여행을 권리화한 내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잘나가는 한 소설가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여행'의 속성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은 내 머릿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일렁였다.
작가 김연수는 러시아, 일본, 독일, 미국, 중국에서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특유의 재치있는 글담으로 편안하고 부담없이 자신의 여행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하지만 김연수에게 여행은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는 외연적 정의가 아닌 자신의 삶과 문학의 세계를 곱씹고 입체화하는 기회의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수에게 여행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바로 그 욕망으로써 자아와 문학을 재조명·재해석하고자 하는 작가 김연수의 갈망이 책 속에 잘 녹아 있다.
이 책에는 김연수의 문학적 이상理想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작가 차학경의 『딕테(Dictee』 중 어머니의 생애를 다룬 「칼리오페 서사시」를 읽다가 "당신은 움직입니다. 당신은 옮겨집니다. 당신이 곧 움직임입니다.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고정된 어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단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문장을 윤동주의 시 「길」과 연결짓는다. 김연수는 문학의 본질을 여기서 발견한다. 뭔가를 찾아 영구 운동하지 못하는 문학, 영구 망명을 꿈꾸지 못하는 문학은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 될 수 없음을 피력하는 작가 김연수. 바로 여기에서 그의 문학적 이상과 맞닿아 있는 '여행할 권리'의 속성을 풀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너무 장황하고 산만하게 산문집의 구성력을 비통일화시킨 점은 아쉽다. 소설가로서의 여행할 조건과 권리는 대중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기 마련이다. 러시아의 우스리스끄만, 일본의 나고야와 도쿄, 독일의 밤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미국의 버클리와 옌지, 중국의 룽징과 후쟈좡 등 '국경' 바깥쪽의 리얼리티를 사모한 김연수 자신의 내면 세계의 계속된 열창은 '여행할 권리'보다는 '문학의 의무'에만 일관하며 한 부분을 접사화시킨다. 그렇기에 '김연수'와 그의 '문학'에서 모두를 조건없이 포용할 수 있는 독자가 아니고서는 비공감될 수 있는 문장일 수 있다.
더욱이 책의 마지막 일본 도쿄에서 작가 이상((李箱, 1910~1937)의 죽음을 재조명하며 거대한 분량을 할애한 부분에선 고개가 심히 갸우뚱거린다. 마치 취재파일의 기사를 쓰듯 이상의 작품과 주변인물들의 고백을 수차례 인용하면서 그의 의문사를 다큐멘터리화한다. 게다가 동시대 시인이었던 박인환(朴寅煥)과 김수영(洙洙暎)을 교차·대조시키며 산문집의 거시적 통일성에서 일탈하기도 한다. 작가 이상의 죽음과 당시 도쿄에서 그가 실망했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는 김연수의 지나친 활자 할애는 한 천재 작가에 대한 후배세대 작가로서의 경외와 동경 이상의 의미를 넘지 못하고 있어 깊이가 덜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누구든 어디든 떠나야 한다는 김연수의 일탈 예찬은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역'과 '휴게소'와 '공항'은 언제라도 나를 매혹시킬 세 개의 공간이라 고백하는 작가 김연수의 모습에서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다.
여행은 나를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준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 말하는 김연수의 심정을 내 마음속에 품는다. 그리고 긍정한다. 세상의 모든 여행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광시야각을 <반드시>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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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