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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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리뷰]


  주변에서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책읽기 수준이 주마간산(走馬看山)이요, 문학을 읽는 깊이가 변변치 못함을 알기에 섣부른 추천과 조언을 아끼고 있다. 우매하고 일천한 사람이 어찌 문학을 논하리요. 옛부터 분수를 아는 삶은 행복한 인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자신있게 추천하는 소설이 있다. 바로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다.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지 몇개월이 후딱 지났지만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소설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사랑을 받는 걸까. 나는 지난 서평에서 아쉽게도 다루지 못했던 <엄마를 부탁해>의 경이적인 창조성에 대해 부언하고자 한다.

  한국문단에는 실력있는 여성작가들이 많다. 흔히 90년대를 밝힌 4대 여성작가로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조경란을 꼽는다. 그녀들은 각기 특색있는 문학적 기술과 색깔로 한국문단을 이끌어가고 있다. 얌전하고 차분한 문장으로 대중의 가슴에 가장 따뜻한 공감을 선물하는 우리시대의 대표작가 공지영. 문학적 색깔에 있어 공지영과 대척점에 서서 '은희경표 냉소주의'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완성시킨 은희경. 섬세한 감각과 치밀한 문체로 자아의 존재론적 탐구를 추구하는 조경란. 한국에서 가장 섬세하고 완벽한 문체를 구사하는 혁신적인 작가 신경숙. 그녀들이 있기에 한국문단은 행복하고 희망이 있다.

  개인적으로 신경숙의 문학적 색깔을 좋아한다. 신경숙 문학의 핵심코드는 바로 '문체'다. 자신은 소설가 중에서도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스스로 고백할 만큼 소설가 신경숙은 문체의 특이성에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신경숙의 문체는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또한 신경숙의 글쓰기는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신의 내면에만 있는 비밀 이야기를 꺼내어 냄으로써 산다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고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경숙의 모든 소설에는 문체에서 묻어나오는 그녀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다.

  최신작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 문학의 특징이 매우 잘 드러난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모성의 위대함과 이에 빚진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로 갈무리한다. 이 정도의 감상으로 끝난다면 <엄마를 부탁해>가 말하고자 했던 찬탄스런 모성의 단면과 소설 자체의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모성에 대한 경외의 피상성과 자식들의 원죄성 확인만으로 읽기에는 너무 아까운 소설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지극히 '문학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문학에서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소재로 한 소설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는 그 범상성
常性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존 통속서사의 틀을 완벽히 무너뜨리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이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자신은 텅 비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완벽한 헌신자의 죽음과 남은 자들 간의 죄의식의 공유'로 끝을 맺었다면, 다시 말해서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모성의 신성적性的 일면만으로 조명했다면 그리 위대한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스토리는 이미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그 통속성을 충분히 확립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백낙청의 말대로 '마지막 한방의 충격'을 선사한다. 어머니에게도 엄연히 실재했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사회는 오랜 유교적 문화와 습속으로 여성은 곧 '어머니'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왔다. 여성성은 곧 모성이었고, 모성의 발현으로써 여성의 아름다움은 설명되었다. 인내와 희생은 여성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되었고, 이는 곧바로 현숙한 여성이라는 이미지 미화로 둔갑하여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감을 압박시켰다. 여성은 곧 모성이었으며, 모성의 주체는 성모였고, 그 성질은 신성이었다. '온전한 헌신자'는 어머니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의 출발이자 종결이었다. 소위 '아가페(agapē)'로 명명되는 무조건적·일방적·절대적 사랑은 신의 소유물을 넘어 인간 여성에까지 전도된 것이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신이기 이전에 인간이며 여성이다. 어머니는 한 사람의 여자다. 모성의 탄생 이전에 이미 한 명의 여성으로 세계에 태어났다. 신이 되기 이전에 실존 인간이었던 것이다. 신으로 살아야 했고 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란 존재의 운명적 번민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이해와 고개숙임이 있었는가. 어머니의 실존 속에 내재한 신성과 인성의 태동 순서를 인식한다면 여성성의 위대한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 더욱 선연히 깨닫게 되리라.

  신경숙은 작가후기에서 그동안 내밀하게 묻혀있었던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리뷰어는 피에타상을 매개삼아 엄마를 성모로 만들어 승천시키는 게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냐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이러한 이죽거림은 단선적 감상에서 기인한 오류다. 백낙청의 말대로 '어머니에게도 존재했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이라는 마지막 한방마저도 가볍지 않은 세련된 기법으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 모든 어머니가 발현해내는 '신성'과 한 여인으로서 감춰야만 했던 내밀한 '인성性'을 공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합일을 통해 항시 찬란한 태양으로 존재하는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를 더욱 극적이고 입체적으로 완성시키고야 만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문학적 찬탄스러움의 백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신경숙 소설의 최고봉은 <외딴방>으로 꼽혀왔다. 백낙청은 <외딴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품성에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능가한다고 말했다. <외딴방>은 분명 뛰어난 소설이다. 나는 <엄마를 부탁해>에 <외딴방>의 영광을 선사하고자 한다. 또한 <엄마를 부탁해>를 한국문학 근 10년 역사상 최고의 소설로 꼽는다. 신경숙의 문학적 역량과 예술혼이 집대성된 걸작 중에 걸작이다. 앞으로 동일한 소재로는 이 정도의 문학적 중량감을 가진 소설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글은 피로써 써야 한다는 것을. 이는 곧 글쓰기의 '성의意'와 '집중中'을 의미한다. 신경숙의 글에는 '피'가 느껴진다. 최고의 작가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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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2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님의 리뷰는 늘 그렇듯 참 신실합니다.
신경숙의 이 소설에 대한 질타를 하는 분들이 많던데
어떤 작품이든 그렇게하진 못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님의 두번째 리뷰를 읽어보니 그 작품의 문학적가치를 찾는 고밀도의 눈을
나눠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