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돌의 기억들
현고진 지음 / 포럼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위대함 중 하나는 사랑을 하는 방식과 수준에서 다른 종과 확연히 구분되는 고차원적 상이함에 있다. 인간만큼 사랑의 이름으로 자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종족은 없다. 인간에게는 사랑의 노출과 내재적 발전은 정비례한다. 인간의 사랑에 대한 지극한 경도됨은 인간 종족의 숭고한 속성을 그대로 단면화한다. 이성적이고 현명한 종족이라는 '호모 사피엔스(sapiens)'라는 거대한 학명은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심히 초라할 뿐이다.

  인류사를 반추하면 공간과 시간, 문화와 습속에 따라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곳에서나 사랑은 존재했으며 어느 시간대에서나 사랑은 발현했다. 사랑이 없는한 인간의 존재성은 외면적이기만 하다. 내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인간의 영혼에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찬란한 빛이 내재한다. 인간의 역사는 곧 사랑의 일차원적 흐름이다. 세상의 물리학은 우주의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서만 성립되고 동작되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문화의 실타래 속에서도 사랑의 테마는 단연 돋보인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을 비극의 코드로 풀이하여 천재적인 극작술을 보여줬다. 괴테는 시로써 사랑을 탐구했고, 헤르만 헤세는 소설로써 사랑을 천착했다. 비단 문자문화의 영역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상도 사랑을 조명했고, 음악도 사랑을 궁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펜은 사랑을 기록하고, 카메라는 사랑을 촬영하며, 레코더는 사랑을 녹음한다. 문화와 사랑은 '너나들이'였던 것이다. 

  출판사 포럼에서 출간한 『물과 돌의 기억들』은 사랑을 이야기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5만 년 전의 사랑을 그렸다. 작가는  아득히 먼 옛날의 원시인류를 배경으로 고결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냈다. 요란하지 않은 단선적인 서사로 사랑의 원형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으며 쉽게 읽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막장을 덮은 후의 가슴을 억누르는 적절한 무게감은 어렵고도 어려운 사랑의 진정성에 대해 새삼 겸허한 마음을 추동한다.

  "불의 발견보다 더 위대한 사랑의 발견"이라는 뒷표지의 붉은색 문구는 이 소설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강조점을 적확히 함축한다. 작가는 인류사를 조망함에 있어 불보다 사랑에 주목하고 있다. 불로 대변되는 인류의 과학과 기술, 도약과 발전보다 사랑이 내포하는 인간의 본질적 행복을 더 위대한 순위에 배치한다. 즉 인류 발전이라는 '현상'보다는 그것의 근원이 되는 본질적 '가치'를 먼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는 예전부터 많이 소개되어 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무료하지 않고 나름의 감동을 선사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작가가 그려낸 사랑의 정의가 심히 찬탄스러웠고, 동시에 그것을 개인의 공간으로 고착하지 않고 인류애로까지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소설의 말미, 소설 속 주인공은 사랑의 정의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랑은 외로울 수도 있고 비참할 수도 있지만 아름답지 않으면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사랑의 본질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또한 작가는 너와 나의 사랑을 넘어 '우리'의 사랑까지를 내다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하늘바람'의 분노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여인 '물보라'와 그녀를 빼앗은 천치의 원수 '푸른지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으로 소멸된다. '하늘바람'의 '물보라'를 향한 강렬한 사랑의 방향성은 점점 다듬어지고 확장되어 '푸른지네'에 대한 용서와 축복으로까지 전도된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확장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곧 인류애로 명명될 수 있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아름답다. 그리고 확장성을 가진다. 사랑의 이름으로 발현되는 모든 빛은 눈부시고 찬란하며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절대성은 어느 누구도 훼손시킬 수 없고 폄훼할 수도 없다. 세상에 넘쳐 흐르는 수없는 사랑의 모양과 형태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아름답다'는 하나의 형용사 안에서 통합된다. 그렇기에 사랑이 풍성해질 때, 더욱이 전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전도될 때 세계는 아름다운 천국으로 변혁될 수 있다. 사랑은 절대선인 것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름답다는 작가의 메시지는 책을 덮은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정지시켰다. 5만 년 전에도 그랬고 5만 년 후에도 그러할 것이다. 창조될 때부터 인간 속에 내재한 사랑이라는 DNA는 결코 변이되지 않는다. 사랑한 만큼 행복하고 사랑하지 않은 만큼 불행할 뿐이다. 나는 사유한다. 현재의 내 사랑지수는 얼마만큼의 수치일까. 깊은 사유의 세계에서 내 이성은 압도된다.

  새로울 것 없는 뻔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전하려는 메시지가 간명하여 꽤 인상깊게 갈무리한 소설이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의 8할은 사랑의 탐구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고백처럼 사랑에 대한 갈망은 곧바로 책읽기의 필요성을 전제시킨다. 사랑을 얼만큼 잘 조명했고 탐구했느냐에 따라 양서의 기준은 확립될 수 있다. 『물과 돌의 기억들』은 사랑의 근본 성질을 정의했고, 인류애라는 넓은 사랑의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소설이다.  

  세상에 넘쳐 흐르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만 물어보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달콤하고 화려해 보이는 사랑의 신화들이, 속을 까보면 욕망과 이기심의 추악한 덩어리에 불과한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본다. 사랑은 달콤하거나 쓸쓸하거나 허무한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받은 사랑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스런 것일 수도 있다. 검은 사랑도 있고 하얀 사랑도 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p. 248, 작가후기>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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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1-3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워야만 사랑이다..
인류애를 말하는, 좋은 책 같아요.
다윗님 새해에도 꾸준히 읽고 쓰시는 일 게을리 하지 않으시군요.
본받아야겠어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