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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없음.
역사소설만이 갖는 매력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을 절묘한 배합으로 구성한 역사소설은 현대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맛을 제공한다.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 과거와 작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현재의 시간대가 합쳐지면서 독자는 또다른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고전 스테디셀러 『삼국지』를 위시하여 수많은 국내외의 역사소설은 과거의 사실과 현재적 상상력의 오묘한 긴장감 사이에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했을까?
아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p13>
프롤로그가 예사롭지 않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화인의 숨막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바람의 화원』을 읽기 전 유일한 기초지식이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의 화인을 다룬 역사소설이라는 기초지식과 사랑에 대한 강렬한 갈구함을 보여주는 소설의 프롤로그는 다소 부합하지 않음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걸까? 이백 년이 넘는 과거의 시공간으로의 여행에서 작가는 어떤 팩션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사랑이라.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인상적인 프롤로그에서 목도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내 머리와 가슴을 심히 일렁이게 하면서 프롤로그의 마지막장을 넘기는 데 적잖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얼굴에 대한 아주 길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아마도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설사 진실이 아닌 늙은 자의 노망이라 해도... <프롤로그, p12>
『바람의 화원』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프롤로그에서 역사적 인물이자 소설속 인물인 김홍도의 독백을 통하여 나타나듯이 강렬한 사랑의 서사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표현할 수 없고, 가지려 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던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다. 저자 이정명은 조선시대 실존했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라는 천재화가의 예술과 사랑을 뛰어난 상상력과 흥미있는 전개로 창조했다. 무엇보다 누구도 생각지 못할 발군의 상상력으로 책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야기로 사랑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이 소설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모든 미스테리물이 그러하듯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전복적인 이야기의 반복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두 거장의 작품을 오리지널 컬러판으로 볼 수 있는 흥미거리다. 전자는 십 년 전 의문의 죽임을 당한 두 화인의 살인사건을 하나 하나씩 밝혀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속에서 단원과 혜원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묘미를 제공하며, 후자는 두 천재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동시에 소설속에서 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재평가하는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사대결은 압권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거장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씨름》과 《쌍검대무》를 소재삼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긴장감으로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은 과히 압권이다. 경쟁자지만 경쟁하기 싫었고, 대결하기 싫었지만 대결할 수 밖에 없었던 둘 사이의 그림 대결은 18대 18이라는 계원들의 베팅을 입증하듯 우위를 논하지 못한 채 무승부로 종결된다. 단원과 혜원의 화사대결은 박진감 넘치는 두 천재의 대결이라는 외연적 설정과 함께 이야기의 전후를 정리하여 서사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구성적 내포를 함께 지니고 있는 명장면이기에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작가는 단원보다 혜원을 더 무게감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스승 단원이 제자 혜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부러움과 감탄과 상찬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화서가 생긴 이래 수백 년을 엄격한 법도와 기법에 구속되어 있던 당시의 배경에서 기존의 화풍과 기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대상을 그린 새로운 그림을 지향했던 혜원 신윤복. 수백 년 이어온 전통에 대한 천재화가 혜원의 대항은 그것을 흠모하며 지원하는 스승 단원에게는 상찬의 대상이었다. 스승이지만 제자보다 못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단원의 고뇌는 소설속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면서 혜원의 절대적 존재감을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홍도는 이 대결 아닌 대결에서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모멸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단지 주상의 명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해도 마음속 패배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윤복은 홍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p174>
나는 개인적으로 김홍도의 그림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물론 대담한 소재와 화려한 색상, 그리고 섬세한 필치가 인상적인 신윤복의 그림도 과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혜원의 그림은 대부분 인물과 배경이 비슷한 무게감으로 눈에 비춰진다. 어떤 그림에선 인물이 주가 아닌 부가 되어 배경을 수식하는 느낌이 들정도로 초라하다. 색은 화려하고 필치는 섬세하지만 그림에서 드러난 인간의 내면적 무게감이 한없이 가벼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에 비해 단원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삶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단원의 관찰자적 현미경은 오직 인간에만 초점이 맞추고 있을 정도로 접사모드다.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하며, 차분하진 않지만 역동적이고, 섬세하진 않지만 힘이 있는, 무엇보다 인간과 삶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그린 김홍도의 그림이 내게는 왠지 우위로 느껴진다.
사랑은 언제나 화두다. 사랑의 방향성은 언제나 쌍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양방통행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화살표의 한 방향만 성립되는 일방통행의 사랑도 있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뜨겁게 사랑할 때, 더욱이 그 사랑이 오직 자신으로부터만 발생되는 일방적인 방향성일 때에, 그것을 목도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애타고 간절한 마음을 발산시킨다. 소설속에서 김홍도가 바라보는 한 존재에 대한 뜨겁고 강렬한 사랑의 방향성은 그의 작품 못지 않은 힘과 진실성이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다.
하나의 또다른 사랑의 기류를 생각했다. 김홍도가 지극히 갈구했던 존재에 대한 방향성 못지 않은 또다른 사랑의 방향. 어쩌면 신윤복은 자기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김홍도의 사랑의 방향과 신윤복이 흠모했던 기생 정향에 대한 방향은 신윤복 자신을 찾고자 하는 방향을 수식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전자의 두 개의 사랑의 방향이 완성되고 다듬어질수록 신윤복의 자기정체성을 향한 방향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자,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자, 자신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일 수 있으리라.
서평을 정리하자. 소설 『바람의 화원』 은 역사와 예술과 사랑을 화려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하나의 이야기, 한 얼굴에 대한 길고도 비밀스러운 이야기, 믿을 수 없을 이야기. 하지만 진실로 믿고 싶을 이야기. 진실로 믿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 충분히 가볍고 무거우며, 충분히 냉정하고 강렬하며, 전복적이면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적인 이야기. 『바람의 화원』은 그런 소설이다.
형태가 아니라 혼을, 모양이 아니라 내면을, 양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싶습니다. <p42>
지금 믿을 수 있는 단서는 기억보다는 기록이었다. 기억은 주관적이지만 기록은 객관적이고, 기억은 순간적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며, 기억은 혼동될 수 있지만 기록은 명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p61>
알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알아버린다면 아름다움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곳에 손이 닿고, 그 강을 건너고, 그것을 가진다면 가슴속에 들끓던 불덩이는 곧 재가 되고 말겠지요. <2권,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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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