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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에 관하여 ㅣ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 책이나 읽으라며” 권한다. 읽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알게 된다고. 당구장에서나 골프장에서 필요한 일은 ‘스틱’으로 공을 맞추는 일이다. 독서 역시 먼저 읽어야 한다. 어떤 류의 책이든 간에. 군 입대전(1981년)에 <철학이야기/ 월 듀란트> 이라는 철학입문서를 처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산방에서 정독하는 마음은 편했다.
5월의 추천서중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을 잠깐 훌터 보았다. 생각보다 얇고 짧았다. 두꺼운 철학책을 보면 형이상학적인 용어의 난해함으로 지루하다. 최근 미국대학에서는 철학이 부활하고 있다. 철학 전공자가 늘고 강좌가 수강생들로 넘처난다. 철학을 통해 얻은 논리와 토론능력이 그 댓가다.
고전을 읽고 해석하기보다는 영화에 담긴 형이상학이나 전쟁의 윤리문제를 토론하는 실용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사회가 급변하고 직업도 자주 바뀌는 추세라 특정분야 지식보다 세상을 크게 보고 비판적 사고와 분석 그리고 글쓰기를 익히는 힘이 필요한 시대다. 독서회도 더 오래가면 취향에 맞는 장르별 클럽활동이 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유태계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카톨릭 신자였다. 1908년, 그의 아버지 권고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 유학하여 기계공학부 연구생으로 등록했다. 이 책은 그가 1949년 7월에 암판정을 받은 후, 그의 생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최근 별세한 소설가 박경리 님의 마지막 작품인 <옛날의 그 집> 라는 시에서 처럼 그가 죽음을 예감하며 쓴 글이다. '앎'과 '확실성'의 문법과 관련된 고찰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나의 노트들을 읽는 것이 어떤 철학자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수 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과녁의 중심을 비록 드물게 맞추지만 그는 어쨌거나 내가 어떤 목표들을 향해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대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들판을 5월의 들판을 걸었다. 반쯤 정신나간 상태로 일상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가 상기시킨 문제들을 생각하고 걸었다.
우리들의 시계를 생각해 보자. 개별 시계들은 몇 분이 잘 못된지를 의심하는 건 빈번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표준시계를 보고 시각이 정확한가? 라고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정확성”이란 말은 표준시계의 정확성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는 시간의 정확성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문장에 있어 “문법적으로 옳은 명제 = 그 역명제가 상상 불가능한 명제, 실증적으로 옳은 명제 = 그 역명제가 상상 가능한 명제”가 있다. “상상 가능한 명제”와 “상상 불가능한 명제”로 분류된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는 상상 가능한 “경험과학 명제”다. “네 개의 변을 가진 삼각형”은 수학적 진리와 개념적 진리의 “역명제”에 해당된다. 여덟살 먹은 소년 “비트겐슈타인”이 사색한 윤리의 근본 문제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꼭 정직해야 하는 것일까?” 였다. 0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