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현대철학
홍준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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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에서 라깡을 인용하고 있고,

그의 논의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전문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그 연구자들이 많은 글들을 발표하고,

그 글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국내 연구자들이 발표한 글들의 대부분은 아무리 열심히 읽어봐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거나(혹은 못하거나), 라깡의 전반적인 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설명한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보다는 라깡의 부분적인 입장(이론)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라깡은 항상 이해되지 못하게 되거나,

부분적으로만 다뤄지게 되는 것 같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난해하게만 느껴지게 되는 것이고, 이런 문제점이 점점 해결되기 보다는 더욱 문제가 확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마도 라깡의 저서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고, 그의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 라깡과 관련된 용어와 논의들이 최소한의 합의도 없이 각자 따로 놀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국내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체계적이거나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기 보다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입장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깡과 관련된 연구자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그리고 열심히) 라깡을 소개하고 있고, 그의 이론적인 부분과 함께 임상적인 부분과 관련되어서도 많이 소개를 해주고 있는 홍준기의 활동은 그렇기 때문에 인상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라캉과 현대 철학’은 라캉의 이론을 ‘주체’에 중점을 두며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와 연결하여 폭넓은 해석을 보여주고 있고, 각각의 입장들이 갖고 있는 한계를 라깡의 논의를 통해서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라깡을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있다.

 

홍준기는 라깡이 어째서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프로이트의 논의를 라깡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고,

하버마스와 후설의 논의를 중심으로 현대철학이 갖고 있는 한계와 함께 정신분석학이(그리고 라깡의 논의가) 어떻게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알튀세르가 어떻게 라깡의 논의를 철학적 /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고, 라깡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입장을 통해서 어떻게 (근대) 주체가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과연 주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해묵은 논쟁을 그리고 지겨운 논의를 홍준기는 라깡을 통해서 다시금 꺼내들었고, 해묵고 지겹게 느껴지겠지만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논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의견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관심을 끌게 만든다.

 

라깡의 논의를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난해하고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래도 관심을 잃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여전히 그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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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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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않았었다.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조그마한 초록색 책이 유난히 인상적이었고,

저렴한 할인 가격에(무려 2천원이었다! 요즘은 2천원짜리 커피도 구경하기 힘들다) 팔고 있는데다가, 살짝 펼쳐보니 짧은 잠언들로 채워져 있어서 오랜 시간을 읽는데 쓰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구입을 하게 되었고, 약간은 예상했던 내용이고 조금은 냉소적인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럽게 읽게 되었다. 이제는 구하기 어렵다는 그의 다른 책들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괜찮은 내용이었다.

 

번역자의 말대로

 

독창적이고,

통찰력 있고,

냉소적인,

인간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들려주기도 하는

 

에밀 시오랑의 글들은 전형적인 잠언들 혹은 아포리즘일 것인데, 대충 읽게 된다면 그의 글들에서 니체의 영향을 조금은 엿볼 수 있지만 그는 보다 냉소적이고 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보다 독설을 내뱉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어딘가에 적어놓았던 메모들을 혹은 일기들을 보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꽤나 설득력을 느끼게 된다. 이것도 능력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책이 될 것 같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고 두고 되새김하며 그의 글들을 곱씹어보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방식으로 읽게 되던지,

꽤 괜찮은 문장과 통찰력 그리고 삶과 모든 것에 대한 냉소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결국 그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에밀 시오랑의 시각과 조금은 엇비슷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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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한 해
수잔 데브리 외 지음, 최광수 외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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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독실한 사람들이 많아서 여러 가지 종교와 관련된 책들을 선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선물을 받은 대부분의 책들을 건성으로 읽게 되거나 특별한 인상을 갖게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자의 일생에...’는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제목을 통해서 느껴지지 않던 종교적 성향이 본문에서는 간간히 풍기다가 마지막에는 거의 종교적인 요소 없이 읽기는 힘들어질 정도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꽤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었다.

 

약간은 놀랍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세상만물을 만드신 분이 부부생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도 이상할 것이니 당연히 이런 책들도 쓰여질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결혼생활을 시작한 부부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상호간에 어려움이 나타날 것인지,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책이고, 꽤 의미 있는 조언들일 것이다.

 

연예기간에는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결혼과 함께 그 좋았던 관계가 틀어지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몇 십년동안 각자 다른 환경과 사고 / 생활방식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마찰일 것이고, 이런 마찰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저자는 알려주고 있다.

나름대로 좋은 내용인데, 읽다보면 신앙과 종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차지해서 조금은 귀찮은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것까지 신앙을 집어넣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힘이 있어야지 더욱 행복한 부부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차피 흥미와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읽었을 뿐이고,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은 처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여자의 일생에...’는 부부생활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 앞으로의 관계가 더 나아지는지 알려주고 있고,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종교적인 부분이 있든 말든,

결국 사람관계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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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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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 혹은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들은 아마도 그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관심사에 대해서,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할 것들이 대해서,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문제의식을 갖도록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뛰어난 지성인이고,

몇 안 되는 지식인일 것이다.

 

그는 그 시대에 중요한 관심을 끌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자료와 논의를 토대로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꽤 설득력을 갖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는 큰 통찰력을 갖고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는,

다양한 자료와 논의를 통해서 가장 정돈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엔트로피’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주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며, 그가 어떤 시각과 인식의 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저작일 것이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1과 2법칙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생활방식과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 변화의 근거들을 제시하며 논의하고 있다.

 

그는 서론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이 이전부터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고, 이러한 세계관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세계관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이고, 근대에 형성된 뉴턴적인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기계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하며 끝없이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헛된 믿음을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믿음은 자연을 다스릴 수 있고, 자연의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믿음은 결국 자연파괴와 환경문제 등등 다양한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의견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의 입장은 무한한 가능성에 골몰하기 보다는 어떠한 한계점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리프킨은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하는 근거로 열역학 제1과 2법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개념은

 

우주의 전체 에너지 양은 일정하고,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려고 한다.

 

라는 개념이고, 이것은 제1법칙의 경우 기존의 에너지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시키거나 기존 에너지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공장에서 원재료로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과정과 같은 예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2법칙을 통해서 그 과정(에너지가 변환되는 과정, 원재료가 하나의 제품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에너지가 손실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손실된 것이 ‘엔트로피’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 엔트로피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고,

이 엔트로피의 급증은 지금 사회를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쓰레기들을 떠올리게 된다면 어떤 소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엔트로피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것을 설득력 있게 들려주기 위해서 엔트로피라는 것이 단순히 과학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연관이 있는지 많은 예들을 통해서 들려주고 있고, 이 엔트로피로 인해서 현대 세계가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 알려주고 있다.

 

일정부분 이제 기존의 기계적인 세계관이 한계에 다가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 벗어남의 방법들을 그는 제시하고 있다.

최근의 철학 그리고 인문학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그리스 시대의 세계관과 그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그도 동참을 하고 있고, 고대 시대의 인식틀과 자연에 대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동양의 불교적 세계관을 그는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변화가 이제 곧 이뤄지리라 전망하고 있는데, 그의 전망은 아쉽게도 아직까지도 이뤄지고 않고 있다.

 

그의 기독교적 그리고 기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지만 그가 예상하는 지금 이후의 시대에 대한 전망은 흐릿하고 애매한 점이 있다. 물론, 그가 미래학자도 아니고 그것을 예견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엔트로피는 그가 어떤 시각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저작이며, 그가 이 시각으로 이후의 다양한 논의들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등)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세계관의 변화나 시대의 한계라는 부분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앞으로의 세계는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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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 창조과학 A to Z 1318 시리즈
김재욱 글.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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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나?

 

이에 관한 답은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창조론’과 신의 존재로서 답을 찾기 보다는 생물학적인 방식으로 답을 찾는 ‘진화론’이 있을 것이고, 이 두 가지의 시각 중 어느 한 가지의 시각을 선택하거나 두 가지의 시각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윈으로부터 시작한 ‘진화론’의 시각을 받아들이고 있고, 일부 종교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인해서 ‘창조론’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는데, 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창조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진화론’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동안 단순히 ‘신이 세상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에 적힌 글자 이상의 논의를 들려주지 못하고 있던 ‘창조론’의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최근 들어서 진화론의 이론적 난점들과 취약한 부분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영향력과 보다 과학적인(것 같은) 논리성을 갖고 있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라는 시각으로 창조론의 입장에 무게를 두려고 하고 있다.

 

이런 의도로 출판된 ‘1318 창조과학 a to z’는 최근의 ‘창조론’이 갖고 있는 시각이 어떤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일 것 같다. 아직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최근의 진화론의 입장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이런 책부터 읽게 되었다는 점이 읽어야 하는 순서가 많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는 뭔가 그럴 듯한 인상을 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이 인간을 그리고 모든 것들을 말 그대로 관장하고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입장과 크게 색다를 것은 없다. 조금은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랄까?

보다 ‘창조론’의 시각에 논리력을 부여하고 있고, ‘진화론’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신의 존재와 그 전능함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하고 있다.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자연과 인간 등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혹은 자연발생으로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신을 부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과학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성경의 글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나 성경이 갖고 있는 부족한 설명을 보다 과학적인 논리를 갖도록 하고 있는 이런 입장이 미국의 보수적인 지역에서도 크게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시각이 한국에서도 보여진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의외인 기분이었다.

 

‘창조과학’의 입장이 자신들의 시각이 옳다는 신념을 넘어서 ‘진화론’과 그리고 그와 같은 ‘과학적인 입장’을 혹은 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또는 신의 전지전능함에 의문할 수 있는 입장을 마귀와 악마의 간교로 말하고 있고 그들은 죽음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면 이들의 시각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과학적이라고 하지만 신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고 있는 과학만이 과학이라고 말하고 있고 나머지는 마귀들의 수작질로 바라보고 있다.

진화론의 몇몇 이론적 문제점을 파고들고 있지만, 최근의 진화론의 입장에는 관심이 없고 다윈의 그리고 당시 시대의 관점만을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엉뚱한 느낌도 갖게 된다.

 

창조과학도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갖고 모든 것을 풀어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과학은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기독교가 얼마나 폐쇄적인 시각을 갖게 될 때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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