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에 관련된 기사들은 꼼꼼히 챙겨 보는데, 이 책 소개는 주말 북섹션에 나온 것도 아니고, 잡지의 서평에 난것도 아니서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이 책이 반가왔던 것은, 이 책에 소개된 다섯 분 중 한분인 스테파노 수사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이 수사님이 운영하셨다는 베들레헴집에서 대학생때 거의 매주 토요일 오후를 보냈기 때문에, 이 책의 기사는 수사님을, 그리고 베들레헴의 집에 관한 기억을 연줄연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부터 주문하고, Let's Look 기능으로 책의 일부를 보는데, 서문에서 작가가 쓴 스테파노 수사님에 대한 내용이, 오히려 수사님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서문을 보면..

'스테파노 수사님은... 취재중 가장 많이 나의 가슴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게 해준 분이시다. 그분을 만나고 오면 가슴이 뛰기 시작해 다시 글을 잡을 수 있었다.'  라던지, '수사님의 이야기는 매년 시간이 갈수록 뇌리에 더욱 깊이 박혀서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자신만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예수님의 모습이 수사님에게도 있었다.. '

거의 '신격화' 수준에 이른 작가의 표현에 과연 수사님은 무어라고 하실까?

아마 '못난이 작가가 못난 나를 더 못나게 만들었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수사님은, 땅딸막하고, 머리가 반쯤 벗어진, 둥그런 얼굴에 늘 아이와 같은 웃음을 짓고, 아이와 같이 느릿느릿, 쉬운 말로 말을 했었다. 심장이 안좋아서 발걸음도 느릿느릿 걸으셨다. (동짜몽을 상상해 보시라.)

베들레헴집을 만들었던 70년대에는 '노숙자'나 '쉼터'라는 고상한 용어도 없었다(이런 용어는 98년 IMF 이후에나 생긴 것들이다). 당시에는 '거지' 혹은 '부랑인'으로 불리던 이들에게 천막을 쳐서 식사를 제공하던 것으로 시작해서, 누군가가 용산동 철도길 옆의 작은 한옥 하나를 기부해주어서 이곳을 '베들렘헴의 집'이라 했다.

손바닥만한 안마당을 둘러싼 'ㅁ'자형 집의 공간을 110% 활용했는데, 한사람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방마다 가슴 높이에 마루를 하나 더 짜넣어서 2층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방안에선 늘 등을 거의 90도 굽히고 걸어다녀야 했다. 방과 방을 잇는 복도나 마당은 두사람이 나란히 걷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었다.

베들레햄의집에 거주하는 분들 외에 매일 한끼씩은 누구나 돈 100원을 내면 맘껏 먹을 수 있게 식사를 제공했는데, 이 100원은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돈내고 먹는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거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세끼분의 식사를 한번에 몰아서 해결했었다.

이런 열악한 화경이었지만, 집 자체는 늘 깨끗하고 '예술'적으로 구며졌었다. 손바닥만한 정원에는 '연못'(다라이에 물 받아놓은 거였는지도 모른다)과 작은 꽃이나 나무로 꾸며져 있었고, 기둥이나 문에도 어디서 줏어온건지 모르지만 운치있는 '고가구(?)' 혹은 '미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 요즘 '밥퍼'목사인 최일도 목사님도 한때 봉사활동 했다 하고, 지금은 인의협의 공동대표 중 한분으로, 남해안의 한 섬의 병원에서 몇년간 근무하다 최근 다시 상경한 박태훈 선생님도 수사님과 한때 숙식을 함께 했었다고 한다.

내가 이곳을 알게된건 이곳에서 주말 진료를 했기 때문인데, 그때만 해도 의사가 귀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진료, 약품 구입, 약 포장, 소독, 꼬메는 등의 간단한 수술까지도 100% 학생들이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대뽀였던 것 같다.)

본과시기 4년간 그곳에 드나들면서 수사님이 화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어린이와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면 된다. 전직 가톨릭 수사이기는 했지만, 진료 후의 식사 시간에 기도로 분위기를 깨지도 않았고, 대학 축제에 같이 구경 가서는 그 무거운 몸으로 앞장서서 춤(?)을 추기도 했다.  ( 이런이런, 나까지 신격화에 동참하면 안되는데...)

결혼을 앞두고, 가족 이외의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수사님께 신랑과 인사드렸는데, 그때 수사님의 축사 >>>  '이런~ 우리 몬난이가 시집가는구나... 참 좋겠다~~.'  

졸업한 후, 수사님이 베들레헴집을 후배에게 물려주시고, 찻집을 차렸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그 변화를 10분의 1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사님의 건강을 위해서도 다행이었고....

인사동의 찻집도 베들레헴집에서의 솜씨를 살려 분위기 좋게 꾸며놓았다. 한옥 분위기가 나는 문살과 칸막이, 전통 차, 거기에 찻집 안에 새를 놓아서 기르는 점 때문에 유명해졌었다.

그런데도 제버릇 개 못준다고 했던가, 여전히 제주도의 갈데 없는 할머니들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또 탈북 난민들을 위해... 가끔 뵐때마다, 소식이 들릴때마다, 다른 대상을 돕기 위해 궁리를 하고 계셨다.

농담으로, 당시 의대생이던 학생들이 지금은 어느정도 자리잡았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친구들에게 100만원씩만 보태달라고 하면, 이게 몇명이야... 무슨무슨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실재로 무슨 일을 위해 돈을 지원해달라고 주위에 손을 내미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수사님이 하신다면야 당연히 도와드릴텐데도 말이다. 

그간에 수사님 머리는 더 희어졌을게다. 그래도 그 미소는 변치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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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책장을 짜넣고 나서 모처럼 몇일간 정리된 책상을 유지 했었는데...

 

 

 

 

 

 

 아, 얼마 되지도 않아서 요렇게 또 엉망이 되어버렸답니다. --;;

 

 

 


 

쪼그만 점방 하나 운영하는데도 왜이리 여기저기서 공문서들은 많이 오는지--- 지역 의사회, 개원의협의회,  각종 학회, 심사평가원, 건강보험공단,  기타 산재-고용-연금보험 공단, 보건소, 구청 등등의 공문들, 각종 고지서,  여기에 관심 있는  NGO들에서 온 우편물, 애들 학교나 학원에서 보내는 공문들이 온통 뒤섞여 있습니다.

여기에 간간히 보는 책들과 의학서적, 환자 교육 자료, 회의 자료, 제약회사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약품 자료 등도 덤으로 얹혀져 있어 책상을 볼 때마다 암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옛날 학생 때 썼던 파일걸이였습니다.

할인점 등에 가면 파일 중에 양쪽에 쇠로 된 갈고리가 있는 것이 있는데, 문제는 이걸 걸어놓을만한 파일 정리함이 눈에 띄지 않는거였습니다. (있다고 해도 맘에 안들었구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들기로 했어요.

원래는 책장보다 먼저 시작했는데, 손도 많이 가고, 책장이 우선 들어서야 파일함을 놓을 자리가 생길 것 같아 더 늦어졌습니다. 그냥 합판을 잘라 붙이기만 하기엔 좀 그래서 한지공예처럼 문양을 넣어보았습니다.  아직 칠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래는 칠이 완성된 모습입니다.



 

 

 

 

 

 

 

이러고도 책상이 지저분하면 이번엔 무슨 핑계를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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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3-12-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다락방에 놀러오면 정말 항상 가을산님 작품들을 보고 놀라게 되네요.
만들어진 작품들도 대단하지만... 필요에 의해... 적정한 물건들을 생각해내시는 아이디어가 더 놀랍습니다.
저는 제 딸이 쉽게 쓸 수 있는 책장을 하나 사고 싶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시중에서 파는 것 중에서 하나 골랐지요.
가을산님의 작품들을 보니... 정말 부럽네요..

가을산 2003-12-19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잡생각이 많잖아요. ^^;;

찌리릿 2003-12-25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너무너무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저런 문양을 새기실 수 있는지... ^^
항상 마음 먹은대로, 필요하신대로 이렇게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만드실 수 있는 가을산님의 능력에 부러움과 함께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가을산 2003-12-2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리릿님은 서재와 마을을 만드시잖아요.
 

대전은 인구가 120만 정도 되는, 서울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도시입니다. 게다가 토박이보다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그다지 배타적이지 않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알음알음 엮이기 쉬운 동네입니다.

대전의 '한밭 레츠'도 그렇게 알음알음 엮여서 알게 된 모임입니다.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도 연약한 싹이지만, 이 싹을 사랑하고 키우려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전 그저 곁따리 구경꾼 회원이구요.

레츠에 관한 책이 나와서 퍼왔습니다. 저도 제대로 모르던 레츠에 관해 좀더 알기 위해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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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돈의 세계  

한밭레츠를 디자인 하신 박용남 전 대전의제 21사무처장님이 번역하신 책이 나왔습니다. 각 일간지에 나온 서평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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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인간의 얼굴을 한 돈의 세계
레츠, 조너선 크롤 지음,박용남 옮김, 이후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돈의 세계’다. 즉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돈’은 인간의 얼굴을 띠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전체 인구의 0.1%가 전체 부(富)의 50% 정도를 갖고 있다는 추정도 나오고, 전 세계 통화량 중 실물 교역에 관련된 통화는 5%도 안 된다는 보고서도 있다. 반면 수많은 공동체들은 황폐화돼가고 있다. 통화 공급은 수요에 미치지 못하고, 중소기업은 파산하고, 실업이 일상사가 돼 버리고…. 자, 지역에선 그저 팔짱만 끼고 있어야 하나?
‘레츠(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즉 ‘지방교환 교역시스템’은 이런 흐름에 맞서 지역 고유의 부를 창출하려는 시도다. 도대체 어떻게? 그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지역화폐’를 만드는 거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아사카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통화인 ‘아사카 아워’는 1시간의 노동이나 10달러에 해당한다. 장부정리 서비스나 정원 손질, 바이올린 레슨, 침 놓기, 안마…. 지역 주민들이 창출할 수 있는 수많은 활동들에 새로운 ‘가치’가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가치로 식료품을 살 수도 있고 집세를 낼 수도 있다.

 
‘돈’이 없어도 ‘가치’가 생겨나는 이런 시스템은 단순히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레츠가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서비스가 생기면서 공동체의 신뢰와 우정이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됐던 것이다.

영국 노팅엄에 사는 한 여성은 레츠에 가입하기 전엔 거의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이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집안 일을 돌봐주려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그 대신 그녀는 소장하고 있던 많은 음반과 테이프를 다른 회원들에게 빌려준다. 그녀는 말한다. “시스템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다.”

북아일랜드 밴브리지의 레츠 회원인 마거릿 글로버는 혼자 살고 있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뒤 파이프가 터져 온통 물로 가득찬 자신의 집을 발견했다. 지역 레츠에 연락을 취하고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남자들이 그 집에 도착해 수도를 잠그고 카펫과 침구류를 밖으로 내다 놓은 뒤 사흘 동안 집안 정리를 도와줬다. 이들에겐 모두 지역통화인 ‘링크’가 지급됐다. 위기의 순간에 레츠가 보여준 극적인 도움의 예다.

물론 문제점이 없을 수 없다. 시간을 단위로 노동의 가치가 평가되는 시스템은 전문직과 비전문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부채에 대한 두려움과 이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다면 레츠의 운영은 커다란 곤란을 겪게 된다. 이 책에는 이와 관련된 고민과 문제해결의 과정들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한 박용남씨는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안운동가. 전 세계 3000여개 레츠 중 하나인 ‘한밭레츠’의 운영위원장을 맡기도 한 그는 책 말미에 한밭레츠의 운영 사례를 직접 소개한다. 지역화폐인 4종의 ‘두루’를 사용하는 회원수가 400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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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독자 클럽에 초대합니다"
인터넷으로 더 가까워진 지구촌 가상 도서관            박영신(jocaste) 기자          

난쟁이 인형의 세계 일주를 기억하는가. 지난 2001년 개봉돼 전프랑스를 사로잡은 영화 <아멜리에>(원제 Le Fabuleux Destin d'Amelie Poulain, 아멜리 뿔랑의 기막힌 운명)에서 주인공 아멜리는 비행기 승무원인 친구에게 부탁해 아버지가 아끼던 정원의 수호신 난쟁이 인형의 세계 여행을 감행한다. 런던, 뉴욕 등 각 도시를 상징하는 기념물 앞에서 방긋 웃고 있는 난쟁이의 사진은 아버지에게 배달되고 아버지는 사진을 통해 난쟁이의 여정을 따라간다.

영화가 현실 속에서 부활했다. 비록 난쟁이가 한 권의 책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보이지 않는 독자 클럽에 초대합니다"

역(驛) 대합실 벤치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잃어버린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버려진 것이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는 독자 클럽에 초대합니다."

표지 안쪽에 붙은 수수께끼 같은 라벨에는 일련 번호와 함께 이런 글이 씌어 있고 한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를 소개한다. 지금부터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은 두 개의 갈림길
과 마주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책을 읽고 미지의 독자 클럽 초대에 응한 다음 다른 사람을 위해 같은 방법으로 책이 모험을 계속하도록 놓아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습득한 책을 자신이 갖거나 버리는 것이다. 후자를 선택하면 이 게임은 끝난다.

이름하여 '북 크로싱(book crossing).' 순전히 우연에 의지하고 있어 종종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에 비유되는 북 크로싱은 독자들이 책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놀이이다. Read(읽기), Register(쓰기), Release(양도)라는 소위 3R을 모토(motto)로 2년 전 론 혼베이커(Ron Hornbaker)라는 미국인이 창안해 냈다.


이것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상륙하면서 '보이지 않는 독자 클럽'으로 개명, 유럽의 독서 애호가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보이지 않는 독자 클럽은 지중해적 성향을 살려 전달자들의 활동성을 강조하는 등 기존 혼베이커의 놀이에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첨가했다. 그리고 파리 마레(Marais) 지역에 위치한 프랑스 유일의 정통 이탈리아 서점 'Leggere per 2'에서 지난 3월 다시 태어났다.

한번 읽은 책은 보관하지 말고 '해방'시켜라

'감명 깊게 읽은 책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감명 받을 차례입니다.'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 표지를 열면 종종 이런 메시지와 만나게 된다.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클럽에서는 전달자(crosser)라 부르는데 전달자의 역할은 책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책을 '자유롭게 풀어 준다'라는 의미로 '해방시킨다'는 표현을 쓴다.

불어와 이탈리아어권 전달자를 위한 인터넷 사이트 www.passe-livre.com에는 현재 총 3360여 명이 등록했으며 해방된 책은 1360여 권에 이른다. 대다수의 전달자는 젊은이들이지만 중장년 층도 다수 참가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이 아니라 직접 토템(totem)이 설치된 서점을 이용하기도 한다.

토템은 북크로싱에 참여한 서적을 진열한 책장을 일컫는 말로 바로 여기에서 책을 빌리고 다른 책을 대신 채워 놓는다. 토템은 네티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북 크로싱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북 크로싱을 받은 전달자는 사이트에 책의 현 위치를 알린다. 어쨌거나 단지 책을 읽고 자신의 소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켜서 그 책이 계속 모험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북 크로싱의 목적은 무엇일까. 책 읽기, 그리고 책을 해방시키기. 한번 읽은 책을 책꽂이에 보관할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읽은 책과의 숨바꼭질 놀이에 동참하는 것이다. 원한다면 다른 독자, 아니 다른 전달자와 만날 수도 있다.

북 크로싱의 주인공은 여러분과 같은 독자, 책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참가를 원하면 인터넷 사이트에 먼저 전달자로 등록하라. 그러면 당신만의 비밀번호를 갖게 된다. 비밀번호를 받았으면 이제는 게임에 필요한 책을 고를 차례다.

이럴 경우 두 가지 상황에 처해지는데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첫째, 이미 책이 북 크로싱에 등록된 경우. 이때 문제의 책에는 이미 일련 번호가 적힌 라벨이 붙어있으며 이것은 책이 이미 사이트에 등록됐고 당신 이전에 누군가가 책을 해방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책을 발견한 장소와 책의 일련번호를 사이트에 알려야 하며 바로 이 번호를 매개로 막연한 책의 행방을 좇을 수 있다.

두 번째는 당신이 처음으로 책 한 권을 해방시키는 경우이다. 해당 사이트에 당신이 선택한 책을 등록하면 일련번호를 받는다. 이렇게 해서 다운 받은 라벨에 번호를 기입하고 책에 부착한 뒤 책을 해방시키면 임무 완수!

해당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보면 '전달자 십계명'이라는 제목으로 초보자들을 위한 행동 수칙을 꼼꼼히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1. 가능한 많은 양의 책을 정해진 방법으로 해방시킨다.
2. 늘 새로운 전달자를 물색한다.
3. 해방된 책을 사이트에 등록하고 책 번호와 함께 라벨을 붙인다.
4. 책을 발견한 장소를 사이트에 공지한다.
5. 사이트에서 해방시킨 책의 여정을 확인한다.
6. 가능한 한 좋은 책을 좋은 독자에게 전달하도록 노력한다.
7. 사이트에서 해방된 책을 소재로 다른 전달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8. 북 크로싱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다.
9. 북 크로싱의 자유로운 생각을 알리고 발전시킨다.
10.북 크로싱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놀이를 중단한다.


모든 것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북 크로싱과 차별을 주장하는 '보이지 않는 독자 클럽'은 사실 2002년 12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에서 시작됐다. 피렌체 시청이 북 크로싱 이벤트를 제안하고 'Leggere per' 서점은 며칠 만에 피렌체 독자들에게 제공할 책 3000권을 모았다. 12월 7일 시청 광장에서 간단한 의식이 거행됐고 바로 다음날 시청의 북 크로싱 계정인 scaffale@comune.firenze.it에는 열성 독자들의 이메일이 폭주했다.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피렌체시는 파리 소재 'Leggere per 2' 서점에 이탈리아 서적 2000권을 기증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2003년 3월, 북 크로싱은 마침내 파리서적박람회를 계기로 파리에 입성했다. 놀랍게도 단 3일만에 호기심에 찬 파리지앙들이 기증된 서적 2000권의 주인이 되었다. 물론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는 전제하에.

이어진 6월에는 프랑스 판 북 크로싱 사이트 WWW.PASSE-LIVRE.COM이 문을 열었고 8월 한 달 바캉스에서 돌아와 속속 사이트에 등록하기 시작한 전달자의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울려 퍼진 함성은 국경을 넘어 캐나다, 벨기에, 스위스, 핀란드까지 메아리 쳤으며 급기야 일본의 언론도 유럽에 새롭게 불고 있는 최신 유행의 물결에 주목했다.

반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0월부터는 브레스트(Brest), 몽쁠리에(Montpellier), 마르세이유(Marseille)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렌체시와 파리 4구청은 자매결연을 요청했고 올해가 가기 전에 두 도시에 토템이 설치될 예정이다. 파리 4구청에는 애초에 4개의 토템이 계획됐지만 예측 못했던 열광적인 독자들 덕택에 설치될 토템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난 상태다.

북 크로싱은 2001년 세계를 경악케 했던 9·11테러를 기념하는 방법도 이용되었다. 올해 프랑스의 출판인 연합회는 북 크로싱을 이용한 '시적 테러'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상에 9·11 테러를 기억하자는 메시지를 띄웠고 이것은 '야만'에 맞선 '평화'적 시위로써 폭 넓은 호응을 이끌어 냈다. 바로 이날 단 몇 시간 만에 전세계 5000여 전달자가 각각 책 한 권씩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혼베이커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 www.bookcrossing.com에는 전세계에서 매일 500여 명, 매년 20만 명이 회원으로 등록하고 있다. 때문에 버스 좌석이나 공원 벤치, 카페의 테이블과 같은 뜻밖의 장소에서 해방된 책들을 발견할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북 크로싱을 위한 국제 인터넷 사이트도 5개로 늘어났다.

독서의 종말 혹은 무덤으로 여겨지던 인터넷은 이렇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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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3-12-1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우리나라에선 이게 통할수는 있을까?
서울 지하철 문고의 서가나, 지하철 객차에 있던 책꽂이도 텅텅 비어 있던데....
(이 제도가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8년 전에 대전으로 이사왔으니 그후 어찌되었는지?)
 
 전출처 : 마립간 >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anti feminist)다.-2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anti feminist)다. - 계속 말려주세요.

 # 현재 여성의 불평등이 있다면 어디에서 왔을 까요. 아마도 제 생각은 교육과 직업(경제력)이 아닐까요. 수렵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이 경제력이고 이 이유 때문에 불평등한 대우받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여성이 가장 불평등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직장을 얻고 승진을 하는 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직장문화에 여자가 적합하지 않은 것을 고려하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업 기회에 있었어도 청년층을 기준으로 하면, 맞는 이야기이지만, 노년층을 이야기하면 또 달라집니다. 노인 여성은 식당에서 일을 하던, 파출부, 아기보기 등 직업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노인 남성은 아파트 경비원 이외에 특별히 떠 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 저의 집에서 저와 여동생은 똑같은 교육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저와 여동생 중 하나만 교육을 받아야 된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제게 기회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잠재적인 이런 불평등은 잠재적인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마 다른 가정도 비슷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재에는 경제적 여유가 아주 없지 않다면,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교육의 기회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 여동생의 에피소드 : 동생이 ‘H여고’를 다닐 때였습니다. 교감선생님 방에서 전화를 대신 받게 되었는데, ‘H고’라고 말하니, 교감선생님이 다음부터는 ‘H여고’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H 남자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표현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감은 어색했지만.

 * 제가 학생회 활동을 할 때에는 여성부가 있었습니다. 진짜 하는 일 없는 부서였습니다. 지금은 여성부가 없습니다. 지금 학과에 여학생이 절반 정도된 이유도 있겠지만, 여학생이 학생회 임원으로 참가하니까요. 그 당시 임원에 여학생이 적었던 이유가 학생수도 적었지만, 남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임원으로 참가하라고 권유해도 여학생들은 거절하던군요. 공부나 하겠다나. 어째든 여학생부 여자 임원 한명 뽑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 이것이 남자때문일까요. 여자때문일까요.

 *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물어봤지요.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시중들랴, 시집 눈치를 보랴, 뭐하러 결혼합니까. 여자의 답변이 남편 비위 조금만 맞춰주면, 평생 먹여 주잖아요. 그리고 얼마 후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여자와 선보는 자리에서 결혼해서 나는 아내 비위맞추면서 살고, 여자가 나를 평생 먹여 주는 그런 사람이 좋다고 농담했다가(절반은 진담임) 거절당했습니다.

 * 결혼에서 여자는 자신보다 조건이 좋은 남자(학벌, 체격, 수입)을 선택해서 남자에게 의지한고, 남자는 자신보다 조건이 조금은 나쁜 여자와 결혼하여 여자를 지배하려는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 제가 좋아하는 여성 중에 소피 제르맹(프랑스 여류 수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이 분을 소개한 분은 독신으로 산 이유를 작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의 남자는 능력있는 여성을 아내로 맞이할 만한 포용력 있은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모른 것이고, 저 같으면, 제르맹에게 구혼한 남자가 많았지만 자신에 걸맞는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제르맹이 결혼을 거절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참고서적>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존 그레이 지음, 김경숙 옮김/친구미디어

우리 부부는 너무 달라요/메이홀 부부/네비게이토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바다출판사

성의 계약/헬렌 피셔 지음, 박매영 옮김/정신세계사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매트 리들리 지음, 김윤택 옮김/김영사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에스테 빌라 지음, 조선희 옮김/황금가지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anti feminist)다. - 다음 편은 사회를 보는 눈에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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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3-12-12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누구든 자기가 겪은 일을 중심으로 선입관이 심어지고, 그런 선입관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기억을 선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저역시 저의 입장에서 선택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전 84학번인데, 저희 학년에서 여학생은 30명으로, 전체의 약 25%였습니다. 보통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딴짓 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공부를 잘한다고 불평하는데, 저희 동기들은 교내 행사 참가 비율이나, 동기들 챙기는 것, 동아리 활동에 여학생들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저도 동아리 활동을 매주 토요일 나가던 노숙자 진료를 포함해서 5개 이상 했습니다. 학생회의 학보 편집국장도 여학생이었고, 과대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학생 혹은 여의사라서 '배려'를 받고,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저희 동기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 직장과 관련된 부분에서, 여성으로서 가장 어려운 시기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입니다. 결혼하고 임신, 출산, 육아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남성의 경우, 물론 결혼이야 하지만, 직장에서는 가장 active하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시기이고, 가정에서도 이에 집중할 수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 여자 수련의의 경우, 몇일씩 당직 서고 나서 집에 가면 먼지 쌓인 집과 빨래, 다림질, 상차림이라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편은 몇일만에 돌아온 마누라가 차려준 음식을 먹고싶어하지요. 임신하고 출산 휴가 받고, (출산휴가가 실재로 미처 한달을 채울까말까 하는 것, 선생님도 아시지요? 산전휴가? 그림의 떡입니다. 제 친구는 진통이 시작될때까지 일하다가 과장님께 인사하고 산부인과로 직행했답니다. 저도 예정일 전날까지 근무했습니다.) '시댁의 가풍'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치스럽거나 거추장스러운, '여자니까 역시 activity 떨어진다'는 핀잔을 받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남자들이 군대 다녀오는 것 이상으로 handicap이 됩니다. 저도 출산으로 레지던트 지원을 1년 늦추어야 했습니다.

* 선생님께서 예로 든 노년의 취업의 경우, 선생님이 든 직종을 좀 보세요. 모두다 강도 높은 육체노동입니다. 사무직이나 명예직의 경우 노년층에서 어느쪽의 취업 비중이 높을까요?

* 선생님께서 예를 드신 '비위맞추기를 통한 호구지책'에 대해서는 저도 거부감이 듭니다. 이렇게 의존적인 사람은 남편에게도 부담되고, 만약에 남편이 일찍 죽기라도 하면, 가장 대책이 없는 부류입니다. (이 분류는 저희보다 윗 세대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그분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요.)

* 결혼에서 여자는 자신보다 조건이 좋은 남자(학벌, 체격, 수입)을 선택해서 남자에게 의지하고, 남자는 자신보다 조건이 조금은 나쁜 여자와 결혼하여 여자를 지배하려는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 심정적으로는 대단히 못마땅하지만, 진화심리학상으로는 옳은 말입니다.
인간은 임신, 출산, 육아에 다른 동물보다 많은 자원과 시간을 투자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여자는 육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남자에게 수입을 의존해야 했고, 따라서 여성의 배우자 선택에서 물질적인 안정성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편, 남자의 경우는 과연 이 아이가 나의 아이인가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여자의 경우, 남자가 외도를 할 때 남자가 상대방 여자에게 '마음'을 주었는가 하는 것에 촉각을 세운다고 합니다. 마음 가는 곳에 물질이 흘러갈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주었다는 것은 조강지처에게 있어서는 큰 위협이 된다는겁니다.
남자의 경우, 여자가 외도를 할 때 '몸을 주었는가'에 촉각을 세운다고 합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하지 않았는데, 물질적 support하는 손해를 보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진화한거라나요....

덧붙이고 싶은 점은, 우리 사회, 우리 인류가 어느정도라도 물질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불과 몇 세대가 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남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유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옳다도 생각하는 것과, 진화에 의해 살아남은 우리의 성향 사이에는 큰 gap이 있습니다.
이를 '수천 수만년 내려온 우리의 성향이니 그대로 수용하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옳지 않고, 더이상 물질적, 물리적 제약이 문제되지 않으니 이런 관습을 개선하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각자의 선택 또한 자신의 입장에 따른 선호에 따라 좌우되겠지요.

저런, 쓰고나니 또 길어졌네요.

가을산 2003-12-1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려달라니 말려드리고는 있지만, ^^;;
사회 활동에 있어서 약간의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레지던트 수련을 마친 이후로는 여의사라서 그다지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의협은 물론이고 지역 의사회나 개원의 협의회, 노숙자 진료소, 자원봉사 동호회 등의 활동에도 문제 없었습니다. (-- 쓰면서 문득, 승진이나 경쟁, 돈벌이와 별로 관련 없는 분야라서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 한번 '난 동기 여학생을 친구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동기일 뿐 '친구'는 절대로 될 수 없다.'라는 해괴망칙한 말을 하는 후배가 있기는 했습니다. 아마 무언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의 문제는 가정 내에 있습니다. 가정 내에서의 역할에 대한 구분의 벽은 상당히 높습니다. 게다가 그런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또하나의 여성입니다. 그 지극한 사랑의 결과, 당장의 불이익이 며느리나 여자 형제에게 가겠지만, 결국 그 부담이 아들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ceylontea 2003-12-1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업무가 너무 바빠서 좀 정신이 없고... 알라딘에 들어올 시간도 별로 없습니다만...
위의 글을 일고 간략하게 몇자 적을까 합니다.
저 또한 패미니스트도 아니고, 여성운동 등등을 좋은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인간이고 싶고,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싶을 뿐입니다.
저에게는 딸이 있습니다. 제가 딸 이름을 지을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흔히들 들었을때.. 아.. 여자애구나 싶은 그런 이름은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현이라 지었는데... 후보로 올라온 이름 중에서 그 이름이 그나마 제일 중성적인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좀더 중성적인 이름을 원했었지만... -,-
저는 제 아이가 인간으로 반듯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게 성장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줄 것입니다.

마립간 2003-12-13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에 대해 놀란 것 3가지

* 첫 번째 놀란 일 - 여성이라는 점, 관심분야가 같다고 했을 때 당연히 남자로 생각했습니다. 저의 선입견이었습니다.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데 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주부의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끼어들기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 놀란 일 - 의사라는 점. 의사는 타의, 자의에 의해 관심분야 및 인간관계가 제한되는데, 그외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것에 관심있다는 것은 normal variation이지, extraordinary가 아님을 주장하고 싶지만.)
세 번째 놀란 일 - 어떤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다.' 라는 글이 좀 더 길게 쓸 예정이었지만, 남녀와 관계없는 글로 짧게 3편을 썼습니다. 참고서적은 (저는 재미있게 읽기도 했었지만,) 부부가 같이 읽으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아마도 이책들을 읽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