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에 관련된 기사들은 꼼꼼히 챙겨 보는데, 이 책 소개는 주말 북섹션에 나온 것도 아니고, 잡지의 서평에 난것도 아니서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이 책이 반가왔던 것은, 이 책에 소개된 다섯 분 중 한분인 스테파노 수사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이 수사님이 운영하셨다는 베들레헴집에서 대학생때 거의 매주 토요일 오후를 보냈기 때문에, 이 책의 기사는 수사님을, 그리고 베들레헴의 집에 관한 기억을 연줄연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부터 주문하고, Let's Look 기능으로 책의 일부를 보는데, 서문에서 작가가 쓴 스테파노 수사님에 대한 내용이, 오히려 수사님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서문을 보면..

'스테파노 수사님은... 취재중 가장 많이 나의 가슴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게 해준 분이시다. 그분을 만나고 오면 가슴이 뛰기 시작해 다시 글을 잡을 수 있었다.'  라던지, '수사님의 이야기는 매년 시간이 갈수록 뇌리에 더욱 깊이 박혀서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자신만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예수님의 모습이 수사님에게도 있었다.. '

거의 '신격화' 수준에 이른 작가의 표현에 과연 수사님은 무어라고 하실까?

아마 '못난이 작가가 못난 나를 더 못나게 만들었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수사님은, 땅딸막하고, 머리가 반쯤 벗어진, 둥그런 얼굴에 늘 아이와 같은 웃음을 짓고, 아이와 같이 느릿느릿, 쉬운 말로 말을 했었다. 심장이 안좋아서 발걸음도 느릿느릿 걸으셨다. (동짜몽을 상상해 보시라.)

베들레헴집을 만들었던 70년대에는 '노숙자'나 '쉼터'라는 고상한 용어도 없었다(이런 용어는 98년 IMF 이후에나 생긴 것들이다). 당시에는 '거지' 혹은 '부랑인'으로 불리던 이들에게 천막을 쳐서 식사를 제공하던 것으로 시작해서, 누군가가 용산동 철도길 옆의 작은 한옥 하나를 기부해주어서 이곳을 '베들렘헴의 집'이라 했다.

손바닥만한 안마당을 둘러싼 'ㅁ'자형 집의 공간을 110% 활용했는데, 한사람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방마다 가슴 높이에 마루를 하나 더 짜넣어서 2층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방안에선 늘 등을 거의 90도 굽히고 걸어다녀야 했다. 방과 방을 잇는 복도나 마당은 두사람이 나란히 걷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었다.

베들레햄의집에 거주하는 분들 외에 매일 한끼씩은 누구나 돈 100원을 내면 맘껏 먹을 수 있게 식사를 제공했는데, 이 100원은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돈내고 먹는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거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세끼분의 식사를 한번에 몰아서 해결했었다.

이런 열악한 화경이었지만, 집 자체는 늘 깨끗하고 '예술'적으로 구며졌었다. 손바닥만한 정원에는 '연못'(다라이에 물 받아놓은 거였는지도 모른다)과 작은 꽃이나 나무로 꾸며져 있었고, 기둥이나 문에도 어디서 줏어온건지 모르지만 운치있는 '고가구(?)' 혹은 '미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 요즘 '밥퍼'목사인 최일도 목사님도 한때 봉사활동 했다 하고, 지금은 인의협의 공동대표 중 한분으로, 남해안의 한 섬의 병원에서 몇년간 근무하다 최근 다시 상경한 박태훈 선생님도 수사님과 한때 숙식을 함께 했었다고 한다.

내가 이곳을 알게된건 이곳에서 주말 진료를 했기 때문인데, 그때만 해도 의사가 귀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진료, 약품 구입, 약 포장, 소독, 꼬메는 등의 간단한 수술까지도 100% 학생들이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대뽀였던 것 같다.)

본과시기 4년간 그곳에 드나들면서 수사님이 화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어린이와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면 된다. 전직 가톨릭 수사이기는 했지만, 진료 후의 식사 시간에 기도로 분위기를 깨지도 않았고, 대학 축제에 같이 구경 가서는 그 무거운 몸으로 앞장서서 춤(?)을 추기도 했다.  ( 이런이런, 나까지 신격화에 동참하면 안되는데...)

결혼을 앞두고, 가족 이외의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수사님께 신랑과 인사드렸는데, 그때 수사님의 축사 >>>  '이런~ 우리 몬난이가 시집가는구나... 참 좋겠다~~.'  

졸업한 후, 수사님이 베들레헴집을 후배에게 물려주시고, 찻집을 차렸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그 변화를 10분의 1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사님의 건강을 위해서도 다행이었고....

인사동의 찻집도 베들레헴집에서의 솜씨를 살려 분위기 좋게 꾸며놓았다. 한옥 분위기가 나는 문살과 칸막이, 전통 차, 거기에 찻집 안에 새를 놓아서 기르는 점 때문에 유명해졌었다.

그런데도 제버릇 개 못준다고 했던가, 여전히 제주도의 갈데 없는 할머니들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또 탈북 난민들을 위해... 가끔 뵐때마다, 소식이 들릴때마다, 다른 대상을 돕기 위해 궁리를 하고 계셨다.

농담으로, 당시 의대생이던 학생들이 지금은 어느정도 자리잡았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친구들에게 100만원씩만 보태달라고 하면, 이게 몇명이야... 무슨무슨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실재로 무슨 일을 위해 돈을 지원해달라고 주위에 손을 내미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수사님이 하신다면야 당연히 도와드릴텐데도 말이다. 

그간에 수사님 머리는 더 희어졌을게다. 그래도 그 미소는 변치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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