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2012년 02월 10일, 15시 조금 안된 시각) 블로거는 어떤 경로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http://k.kbs.co.kr/ TV를 통하여 참 귀한 방송을 시청하였답니다. 작금 결론적인 한국인들의 선호도는 깊은 공감, 배려, 실천력 등에 있으며, 이를 통한 변화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오늘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타인과 깊이 공감하고 배려하면서 더불어 실천해 가는 것에 있음을 역설한 다음 소프트 부사장의 辯이 마쳐 지고, 블로거는 지금 블로거 자신의 카페북을 찾다가 본 [알라딘 서재]를 방문 중입니다.
이제 入春도 지났고, 교정에는 신학기를 준비하는 손놀림 분주한 시즌이 되었습니다. 봄학기가 시작 되는 우리 교육 현장은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하기 위한 마지막 꽃봉오리를 터트리기 직전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가 아닐가 싶습니다. 어던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 지는가에 따라서 그 '생활'이나 '관계'가 好不好 됨은 매우 보편적인 삶의 모습 아닌가 합니다.
이에 마침 지난 주일(아직도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主日'이라는 용어가 미숙하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겸비하여 익숙해 지는 우리 한반도의 主日 文化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떤 일단의 무리들은 한 기업체가 일요일을 주일이라 표현했다 하여 송사하는 일도 있었다는데, 이는 역사적인 오점이 될 것입니다.)에 "긍정적인 삶 경주"라는 제목 하의 설교를 하였던 설교문이 완성되어 업로드 중인 바, 이에 본 포스팅에 포스팅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not single~"
이는 본 블로거 웨슬리가 님께 드리는 프로필 이미지 메세지입니다.
님은 결코 single이 아닌 이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마시고,
님과 함게 하는 肯定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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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긍정의 삶 경주” (갈5:25-26) 83/86장
肯定的인 사람과 否定的인 사람은 우리 시대에 공존합니다. 어떤 사람도 항상 긍정적이진 않으면, 어떤 사람도 부정적이진 않지만, 부정적인 사람들 보다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더욱 값질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도 원하는 바요 권유하는 바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긍정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긍정인가요? saying:
대부분은 긍정과 부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설교자는 定意에 대해 명제적으로 정리된 사전적 어의를 한 번 찾아 보았는데 소개 해 드리고자 합니다.
肯定(affirmation[æ̀fərméiʃən])이란, “어떤 사실이나 현상, 사태를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찬성함”을 뜻하며 <논리학>에서는 “일정한 판단이나 평가의 타당성을 인정함(affirmative)”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이 맞닥뜨리면, 긍정적인 사람이 많은 객관성과 보편성이 사회적 질서 유지나 이상의 평정을 위해 중시됨은 매우 합당한 논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否定(denial[dɪ|naɪəl])이라 하는 논리는 “그렇지 않다고 인정” 하는 것으로써 긍정과의 관계에 있어 이 양자는 항상 긴장 관계를 가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논리적 정의로는 “긍정도 부정도 모두가 존재 가치는 있다”는 加設 設定은 정당하다 하겠습니다. ‘진리에는 긍정, 거짓에는 부정’ 할 때 비로소 ‘거짓은 척결’ 되고 ‘진리는 이기게 되는 것’이겠지요. 진리와 긍정을 ‘+’로 거짓과 부정을 ‘-’ 논리로 설정한다면, +도 -도 사실상 獨存해서는 그 生氣가 소멸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금번 설교 제목을 “긍정의 삶 경주”라 정하였지만 사실상 ‘否定의 존재는 不可避 하다는 긍정을 하게 되는’ 묘한 긍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생애는 기왕이면 不正의 삶이나 不淨의 삶 등 否定하고 싶은 ‘-(否定的, negtive 한)적 삶’ 보다는, 正함과 淨함 그리고 靜함과 같은 肯定하고픈 삶 혹은 그와 같은 ‘+(肯定的, positive 한)적 삶’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관심사와 제목에 따른 주제의 核心은 무었인가요? 여러분이 현재 이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와 우리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saying:
그렇습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로 모였으며, 모두가 예배자로되 지금의 순서는 청중으로서의 성도 여러분과 메신저로서의 본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나눔’으로 교통 중인 예배시간인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또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하나님께 부름 받은 역할이 있는 것 처럼 설교자는 지금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나 듣는 자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드려져 ‘받으시기에 합당한 온전한 제물’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우리 예배의 핵심은 무었인가요?
바로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Why Jesus?", "왜 예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반 신앙 즉 물신숭배, 우상숭배 등과 같은 종교화 된 신앙의 현존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옳바른’ 신앙의 근거로써의 가치에 우리 예수님이 자리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내용과 이유는 철저히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의 삶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는 그의 삶을 경주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이라는 한 인격체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신앙의 근거라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2012년 02월 05일, 오늘 여러분의 고백은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날,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나 자신’의 고백이 없기에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님도 부정하는 ‘부정적 신앙관과 가치관’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 성도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명목 신자들 혹은 낙심 신자들 그래서 불신으로 추락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어떤 성도입니까?”
다음으로 그러면, “Why only Jesus Christ?”, “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바른 신앙의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즉,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신 것입니다(요14:6).
여러분,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입니다. 본 절 앞 뒤의 제자들의 질문과 요청을 한 번 살펴 보세요. 우선 5절에는 도마의 질문이 나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에 이르신 말씀이 본 절을 포함 7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문제의 해법 되심을 밝히 말씀 하셨거니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의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며 예수님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결코 없음을 선언적으로 하신 이 말씀은, 불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일지 모르겠으나 구원은 ‘오직 예수’ 밖에 없음에 대한 逆說이자 力說인 것입니다.
이어서 8절의 빌립의 요청과 22절의 가룟인 아닌 유다의 질문이 계속 나옵니다만, 예수님께선 곧바로 응답하시며 그 답변을 통해 유일한 구원의 통로로써의 예수님 자신에 대한 확답을 명확히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다른 어떠한 제반 종교들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구속적 개념(救贖的 槪念)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갈증에는 물 한 모금이, 추위에는 옷 한 벌과 굶주림에는 빵 한 조각이 구원일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 일반론적 구원, 구제, 구출과 같은 상식의 개념이 아닌, ‘절대적’이며 ‘특별’하고도 ‘온전한’, ‘救贖의 恩寵’으로써의 구원인 것입니다. 굳이 말하여 ‘not help but salvation’이 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갈2:20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What's mean and What is fruit?”, “그 의미와 열매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앞서 갈5:22-23을 보세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의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금일 본문 25-26이 말씀 하시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즉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산다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선한 열매를 맺을찌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하고 그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대로, 예배자로 모인 우리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께 있으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 신앙의 근거일 뿐 아니라 오직 유일하신 신앙의 핵심이라는 점을 기억하여 그 ‘선한 열매’로써의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어 가는 ‘복된 성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예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비로소 긍정의 삶을 경주하게 되는데 그는,
1) 하나님을 긍정하는 자가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세요(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한 고백은 첫째로 하나님 긍정이요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긍정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聖父, 聖子에의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워진 우리 교회 공동체의 기초됨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가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께 나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고 一言之下에 말씀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先行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즉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는 긍정적인 삶을 경주하는 우리 모든 복된 성도 되신 것을 감사하십시다! 또 그런 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자가 됩니다.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따르게 되겠지요. 갈라디아서 5:16을 보세요. “너희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셨는데, 성령의 사람은 긍정의 삶을 경주하면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는 성결한 백성으로 나아가는 줄 압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성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로운 삶을 경주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