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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ㅣ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평점 :
흔히 역사라고 하면, 시대별로 벌어진 커다란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소위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다. 고조선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흘러온 그 기나긴 역사를 우리는 국사책 속의 나열된 사건들을 통해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전쟁의 역사, 왕들의 역사, 승리의 역사....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였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이름조차 생소한 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전혀 다른 역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거대한 사건과 이름난 위인들이 아닌, 평범한 한 인물의 생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미시사'라는 역사적 방법론으로 소개되고 있다.
메노키오라고 알려진,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의 한 방앗간 주인인 도메니코 스칸델라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역사에 알려진 위대한 인물도 아니었고 중요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메노키오는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독특한 자신만의 우주관으로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설명하려다가 기독교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은 방앗간 주인일 뿐이었다. 카를로 진즈부르그라는 학자가 아니었다면 그저 종교 재판소의 수많은 문서들과 이름들 틈에서 끝끝내 잊혀지고 말았을 흔한 이름이었지만, 진즈부르그에 의해 이 평범한 인물은 다시 한 번 그 삶을 우리 앞에 드러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종교재판소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던 시절, 메노키오라 불리는 이 사람은 누가 들어도 이단으로 의심받을만한 "황당한" 주장들을 늘어놓으며 종교재판소의 이단심문관들과 설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 사람은 대단한 이론가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의 주장은 근거가 불분명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말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메노키오의 우주관 속에서 저자는 민중문화와 상층문화의 중간에 위치했던 그의 사회적 상황과 시대적 상황의 영향력을 확인한다. 메노키오는 글을 알았고,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보급된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스스로 자신만의 우주관을 그려 나갔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화형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는 그가 순교자적 열의에 가득차거나 영웅심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메노키오는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믿게 된 사실들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이러한 독창적 의견과 신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추적하는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된 것은 바로 메노키오의 독서목록들이다. 메노키오가 읽었던 책들과 그 내용을 통해 저자는 메노키오의 증언에서 드러난 견해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의 독서를 통해 성립되었음을 밝혀낸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메노키오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그 책들을 "어떻게" 읽었는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메노키오의 편파적이고 임의적인 텍스트 읽기가 결국 기존의 그의 신념을 확인하고 강화했을 것이라는 예측은 분명 일리가 있으며, 메노키오 자신의 발언이나 그의 언행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역사적 방법론에 관한 책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의 탁월한 문학적 능력은 이 책을 소설처럼 만들어놓았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메노키오의 주장은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며 끝내 종교재판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메노키오의 마지막을 접하고 나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조차 소설처럼 느껴진다. 남겨진 자료의 부족은 역사 연구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하물며 16세기 방앗간 주인의 생을 되살리기 위해 저자는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시간은 역사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다고 슬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역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온 몸으로 겪고 살아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되고, 그 안에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오랜 전통과 많은 지식들도 담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