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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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든 콜필드. 이 책의 주인공은 아마 작가가 살던 시기인 20세기 중반 즈음의 미국 고등학생이다. 결코 평범한 고등학생이 될 수 없었던 그는 4번째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며칠 동안 뉴욕 시내를 방황한다. 홀든이 방황하는 그 며칠 간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대강의 줄거리만 흘려듣고 이야기한다면 그저 미국의 고등학생이 겪는 성장의 아픔, 사춘기 따위에 관한 성장소설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홀든 자신의 목소리로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들려주는 사흘 간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기로 기록되기에는 울림이 너무나 크다.

  내가 이 책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이 책의 화자가 주인공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많고 많지만, 홀든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지독히 외로웠다"거나 "매우 슬펐다"라고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김없이 얘기하는 가 하면, "정말이다", "정말 사실이다", "정말 그렇다"라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며 자꾸만 자신의 이야기를 확신하려 들고 때로는 "이건 꼭 보아야 한다", "이건 정말 보여주고 싶다"라는 말을 통해 간접적인 이야기를 통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안타까워 하기까지 한다. 홀든의 이야기는 이렇게 듣는 사람을 꼭 붙들고 결코 놓아주지를 않는다.

  또 하나. 친구들로부터 고독하고 변덕스러운 아이로 기억되는 작가 J.D. 샐린저가 자신의 모습을 홀든 콜필드를 통해 재창조해 냈듯이 학창 시절 혹은 지금 이 순간 홀든의 외로움과 공허감을 느꼈던,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얘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우울한 날 모든 것이 무의미해보이고 지독히 외로우나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인간의 온갖 작태들이 여기저기에서 순식간에 자기자신을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신이 땅 밑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던 홀든의 심리를 마음으로 이해할 것이다.

  홀든이 겪은 사흘 간의 이야기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가슴이 조금 먹먹하다. 그래도 힘들 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소설이 한 권 더 생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써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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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사르트르/프로이트/키르케고르
반 리이센 외 / 종로서적 / 198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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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까지 읽을까 말까를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던 책이다. 아마 고등학교 때 구입한 책인 것 같은데, 출판년도를 보니 그 당시에도 상당히 오래된 책이었나 보다. 막연히 제목에 등장하는 대단한 인물들의 이름만 보고 샀다가 손도 못 댄 것 같은데, 지금도 쉽게 읽히진 않는다.

 이 책에서 선정한 4명의 인물은 말 그대로 사상계의 거목들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대단한 인물들에 관한 책이 대단한 책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책은 미국 장로교 개혁 출판사에서 발간된 현대 사상가 시리즈 중 일부를 발췌해서 번역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책의 이러한 배경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읽다보니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배경이었다. 전체적으로 책의 구성은 읽기에 좋은 편이다. 니체의 경우엔 허무주의, 사르트르에서의 존재 등 각 사상가들의 중심되는 사상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비평이 매끄럽게 잘 이어진다. 그러나 구성의 미학은 거기까지이다. 가뜩이나 어렵고 난해한 주제들을 더욱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두 줄의 문장만 이어지면 처음 시작했던 얘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번역의 문제이다. 특히 '존재'에 관한 사르트르 이야기에서는, 엄청나게 남발되는 '존재'의 존재가 이리저리 뒤섞여서 어느 곳이 자기 위치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매끄럽게 번역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어와 술어가 제 짝을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원래 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추리하면서 읽어야 했다.

  저자들과 역자 모두 신학에 관계된 사람들이다 보니, 각 사상들을 신학의 관점에서 평가한 부분도 이 책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각 사상의 중심적인 개념들을 설명하려는 노력에 있어서는 매우 객관적이려고 노력한 흔적도 보이나, 일순간에 종교재판관 같은 태도로 돌변하는 저자의 논리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어려움 중의 하나이다. 각 사상가들의 중심사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허무주의의 예언자였던 니체와 그리스도의 관계,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에 대해 내세운 논리 등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글이었다. 물론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씌여진 이 책의 모든 글이 그랬지만 말이다. 책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노오란 책장에 작은 글씨가 빽빽한 옛날 디자인의 철학서를 끝까지 읽게 된 이유는 약간은 그 빽빽한 글씨들이 주는 긴장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라면 그런 디자인의 책을 아무도 사지 않겠지만 말이다. 蛇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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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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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역사라고 하면, 시대별로 벌어진 커다란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소위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다. 고조선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흘러온 그 기나긴 역사를 우리는 국사책 속의 나열된 사건들을 통해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전쟁의 역사, 왕들의 역사, 승리의 역사....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였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이름조차 생소한 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전혀 다른 역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거대한 사건과 이름난 위인들이 아닌, 평범한 한 인물의 생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미시사'라는 역사적 방법론으로 소개되고 있다.

  메노키오라고 알려진,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의 한 방앗간 주인인 도메니코 스칸델라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역사에 알려진 위대한 인물도 아니었고 중요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메노키오는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독특한 자신만의 우주관으로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설명하려다가 기독교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은 방앗간 주인일 뿐이었다. 카를로 진즈부르그라는 학자가 아니었다면 그저 종교 재판소의 수많은 문서들과 이름들 틈에서 끝끝내 잊혀지고 말았을 흔한 이름이었지만, 진즈부르그에 의해 이 평범한 인물은 다시 한 번 그 삶을 우리 앞에 드러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종교재판소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던 시절, 메노키오라 불리는 이 사람은 누가 들어도 이단으로 의심받을만한 "황당한" 주장들을 늘어놓으며 종교재판소의 이단심문관들과 설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 사람은 대단한 이론가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의 주장은 근거가 불분명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말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메노키오의 우주관 속에서 저자는 민중문화와 상층문화의 중간에 위치했던 그의 사회적 상황과 시대적 상황의 영향력을 확인한다. 메노키오는 글을 알았고,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보급된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스스로 자신만의 우주관을 그려 나갔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화형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는 그가 순교자적 열의에 가득차거나 영웅심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메노키오는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믿게 된 사실들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이러한 독창적 의견과 신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추적하는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된 것은 바로 메노키오의 독서목록들이다. 메노키오가 읽었던 책들과 그 내용을 통해 저자는 메노키오의 증언에서 드러난 견해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의 독서를 통해 성립되었음을 밝혀낸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메노키오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그 책들을 "어떻게" 읽었는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메노키오의 편파적이고 임의적인 텍스트 읽기가 결국 기존의 그의 신념을 확인하고 강화했을 것이라는 예측은 분명 일리가 있으며, 메노키오 자신의 발언이나 그의 언행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역사적 방법론에 관한 책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의 탁월한 문학적 능력은 이 책을 소설처럼 만들어놓았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메노키오의 주장은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며 끝내 종교재판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메노키오의 마지막을 접하고 나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조차 소설처럼 느껴진다. 남겨진 자료의 부족은 역사 연구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하물며 16세기 방앗간 주인의 생을 되살리기 위해 저자는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시간은 역사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다고 슬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역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온 몸으로 겪고 살아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되고, 그 안에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오랜 전통과 많은 지식들도 담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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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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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제는 'BEYOND BEEF',  즉 쇠고기를 넘어서이다.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왠지 비슷한 얘기일 것 같아 조금 시간을 두고 읽어보자고 한 것이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지구 환경 전체를 염려하는 시각,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고자 하는 열의는 두 책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특별함은 이 책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그야말로 쇠고기와 소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음식혁명'에서 존 로빈스가 다양한 육식 식습관에 따른 폐해, 부작용과 학대받는 동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시각을 견지했다면, 제레미 리프킨은 좀 더 냉정한 객관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인간과 함께 해 온, 그러나 지금 인간과는 너무 멀어져버린 '소'라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신화와 역사, 과학의 분야까지 넘나든다. 고대세계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위치에서 현대의 거대 축산단지에서 생산되는 표준화된 상품으로 전락한  소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생물학적인 소의 정의를 벗어나 인간사에 함께 존재해 온 동반자로서 소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드넓은 미 서부의 개척시대를 거쳐 산업시대에 이르는 동안 이루어진 축산 단지 조성의 역사는 육식, 특히 쇠고기를 즐기게 된 인간의 기호가 다른 지구 환경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특히, 서부 평원을 목초지로 개간하기 위해 자행된 버펄로의 살육과 인디언 박해는 인간의 상업적 이기심이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과도 같다.  제레미 리프킨은 또한 쇠고기와 관련되어 있는 뿌리깊은 사회적 장치들 -제국주의, 성차별주의, 계급주의-을 밝히고 있다. 실상, 고기를 먹는 행위를 힘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굳이 서양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 내 자신에게도 내재해 있는 뿌리깊은, 그러나 근거없는, 믿음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육식 식습관이 결코 건강 내지는 힘(!)을 위한 최선의 영양책이 될 수 없다는 결과들이 다양한 경로에서 발표되고 있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관심과 우려에서 육식을 자제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 지구 전체로는 얼마나 큰 축복을 주는 결정이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현대 축산 단지가 전지구에 끼치고 있는 다양하고도 집약적인 폐해를 가리켜 '차가운 악(COLD EVIL)'이라고 규정한다. 사실 한 개의 햄버거를 사 먹고 스테이크를 자르면서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라든가 곡물이 소의 사료로 쓰이는 동안 배를 곯고 있어야 하는 저 먼 나라의 빈민들을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기를 먹는 행위를 감히 나서서 비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수많은 인과관계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햄버거 하나를 사 먹는 행위조차도 결코 우연일 수는 없고, 그 행위가 궁극의 결과를 일으키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이 정도면 가히 명백한 '나비효과'가 아닌가. 언제나 그렇듯 선택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서서히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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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 그린비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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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암 촘스키.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 정치 평론가, 사회운동가, 철학자 등의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이 촘스키는 이 시대의 아주 중요한 인물인 동시에 그만큼 논하기도 어려운 존재이다. 촘스키의 저서를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어떤 사상적 배경이 그런 주장들을 가져왔는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개인의 성취보다는 사회적 성취가 더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자서전을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말했다는 촘스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촘스키의 삶과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은 충분히 많았고,  그것들을 제대로 알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 비교는 할 수 없지만 로버트 바스키의 이 책 또한 그런 목적에서라면 아주 훌륭하게 목표달성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책의 전체적 구성을 "촘스키를 형성한 환경들"과 "촘스키가 창조한 지적 환경들"로 나눈 것도 읽는 자의 입장에서는 꼭 맞는 배려였다. 1부에서 촘스키의 어린 시절 다양한 환경들과 성장과정을 통해 그의 지적능력과 관심사가 싹트고 커가는 과정을 그려볼 수 있고 2부에서는 촘스키의 활발한 연구활동과 사회참여활동들을 촘스키 지지와 반대 양측의 논리전개과정, 또 양쪽에 대한 촘스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 촘스키라는 인물의 사상과 생각에 어느 정도 다가가보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의 뿌리깊고 확고한 신념과 열정적이면서도 분야에 구애받지 않는 지적능력, 즉 학자로서의 역량과 행동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의 인생 자체에 압도당해버리고 말았다. 촘스키 자신은 개인적인 성공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늘 말해왔고 행동으로 증명해왔지만, 세속적의미에서의 성공이 아닌, 그가 우리에게 그토록 촉구하는 '개인적 창조성의 발휘, 인격의 실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촘스키는 존경받을만 하다.


  책 속에서 이야기된 촘스키의 다양한 사상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가 언어학자로서 이룩한 '혁명적이라는' 결과들은 언어학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어렴풋하게 이해될 뿐이고, 시대적 상황과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들 또한 나로서는 힘겹게 전체적인 방향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촘스키라는 사람이 쓴 책에서 느꼈던 진실을 향한 호소들이 결국 그의 인생 평생을 거쳐 자라난 굳은 신념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견해, 사회적 의견들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직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일이며 촘스키의 말대로라면 내가 나 자신의 잣대로 누군가의 의견의 진실성을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적 석학이 평생동안 그 많은 강연과 토론과 저서를 통해 일관되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대중들을 각성시켜 이끌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대중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사명감에 가득차 있을 뿐이다.


  이제 촘스키의 저서들을 읽을 때 그가 지지하는 신념들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촘스키가 그의 저서 <언어의 지식>에서 '오웰의 문제'라고 불렀던 것이다. "인간은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아는 것이 없는가." 정보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과연 나에게 있어 그 정보들은 지식이 되고 있는지, 나에게 주어지는 정보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무엇을 말해주는지, 그토록 많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정말 왜 이토록 점점 무지해져 가는지. 한 권의 책이 나에게 던져준 질문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고 고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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