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
수잔 놀렌 혹스마 지음, 오민영 옮김 / 한언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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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놀렌 헥세마는 오랜 기간 우울증에 대해서 연구해 온 심리학자로, 그녀의 연구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반응양식이론(Response Styles Theory)'이라는 것에 관한 것이다. 반응양식이란 사람들이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 일관되게 반응하는 양식을 뜻하는데, 놀렌 헥세마는 이를 반추적 반응(ruminative response)과 주의전환적 반응(distractive response)으로 구분하였다. 이 두 가지 중 자신의 우울한 기분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반추적 반응이 우울한 기분을 더욱 증폭시키고 우울감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이 책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오버씽킹(overthingking)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반추적 반응양식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보통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가능한 결과들을 고려해보기 위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고민과 생각을 통해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거나 반성하고 미래의 다른 문제를 예방하는 일은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 "너무 많은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단순한 시험문제를 풀면서 출제자의 숨은 의도와 문제의 감춰진 맥락들을 찾아내느라 뻔히 보이는 답을 놓친 경험이 없는지? 일상생활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별 의미 없이 흘러가는 상대의 말 한 마디, 변화하는 감정들, 심지어 정해진 정답이나 이유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그냥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를 밝히는 것만이 현재 상황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줄 것이라는 기대로 인해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이 책은 "너무 많은 생각"으로 인해 문제가 커지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물론, 오버씽킹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인해 헤어날 길 없는 미로에서 헤매본 적이 있다면(나는 좀 그런 편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소위 몇 가지 전략들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오버씽킹의 사례들, 즉 이성관계와 가족, 자식, 일, 건강 등에 대한 끝없는 걱정에 관한 사례들을 읽으면서 나의 경험들과 비교해볼 수 있었고 내가 어떻게 했더라면 좋았을지에 대한 tip도 약간 얻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글이 무겁지 않게 쓰여져서 쉽게 읽히지만, 적극적인 self-help skill 같은 해결책이나 마법같은 주문을 기대한다면 충분히 실망할 수도 있다. 항상 덫에 걸리게 되는 부분이 어디인지, 그 때 내가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한 얼마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와 같은 overthingker 에게는 도움이 될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울하거나 화가 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샘솟는 걱정과 생각들 때문에 괴로웠던 경험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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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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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용어들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우울’일 것이다. ‘조금 우울하다’, ‘너무 우울하다’, ‘우울해서 죽겠다’라는 식으로 정도의 차이만 둘 뿐 알게 모르게 찾아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해 우리는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다. 우울증을 병으로 진단내리고 너무 슬픈 것도 병이 될 수 있음을 일반인들이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우울증 유병률이 모든 정신장애 중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오죽하면 마음의 감기라 불릴까) 아직까지 우울증에 대한 인식은 많은 경우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이해수준에 머물러 있다. 간혹 신문이나 뉴스에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기사가 나오면 대개 사람들의 첫 반응은 의구심과 안타까움인 것 같다. ‘얼마나 슬펐길래 죽기까지..’, ‘죽을 용기로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해볼 순 없었을까’. 이는 대중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인 경우에 더욱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나보다 나아보이고 미래도 유망해 보이는 사람의 우울증 투병이나 그로 인한 자살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 모순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는 우울증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오는 반응이다. 만일 위의 일들이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치명적인 암세포 때문이었다고 하면 우리는 훨씬 수긍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저자는 우울증이 단순히 지독한 기분상태가 아닌 분명한 실재를 지니고 사람들을 덮쳐오는 무서운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하며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을 통해 확실히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의 투병기뿐만 아니라 우울증에서 살아남은 다양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실려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투병기가 아니다. 가슴에 와 닿는 진실한 글귀들이 있고 저자의 삶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마음으로 공감하게 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한결같은 저자의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고 (생각보다 매우) 객관적인 시선이다.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내용들(우울증에 관한 책이니 당연하다만)에 대한 방대한 양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크게 심란해지지도 지루해지지도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저자의 차분한 설득력 있는 어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빈곤층의 우울증 치료 필요성이나 우울증에 개입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요인들에 대해 말할 때 저자의 어조는 극히 호소력이 있거나 열의에 가득 찬 운동가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부분을 회상할 때의 어조만큼이나 읽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치료, 중독, 자살, 역사, 가난, 정치 등 간결한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저자는 ‘우울증’ 이라는 주제 자체의 모든 측면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특히 우울증의 원인과 치료법들에 대한 장(章)은 비전문서적으로서는 매우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그가 기울인 노력을 짐작케 한다. 지하철에서 서서 들고 보려면 얼마 안 되어 손목이 아파오는 무게의 두꺼운 책이지만 다 읽고 나면 어느 하나 빠질 내용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드문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우울증이라는 주제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알려주는 것 이외에도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을 통해 사람들이 우울증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들과 알아야 하는 것들, 그리고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차분히 밝혀나간다. 저자는 정보의 전달과 독자들의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훌륭히 잡아냈다.

  저자가 살고 있는 현대 미국사회에서도 우울증 투병은 신체적 질병의 투병과는 달리 비밀스럽고 남들이 알까 두려운 감추고 싶은 면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중년 주부들의 우울증에 대해서 ‘너무 삶이 편해서 고민이 없다 보니 생기는 병’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나도 보아왔고 우울증 환자를 둔 가족이나 환자 본인도 선뜻 그 문제를 솔직히 내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단 자신의 문제를 주변에 털어놓고 나면 이제껏 몰랐던 투병동지들이 가까운 곳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 경우도 보아왔다. 우울증은 그만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와있지만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은 많지 않다. 이 책은 우울증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좋은 책을 찾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우울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우울한 내용에 관한 책을 보냐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내 경험상으로는 무언가에 대해 알고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방식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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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2-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의 감기... 저도 지독하게 앓았던 적이 있었지요.
하긴 그땐 이 나라가 온통 앓고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 잘 읽었습니다.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사치코 2008-02-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황이라고 해야하나요? 왜갑자기 적지 않은 나이에 이리 방황하고 우울한지 몰라 이책을 선택하였어요,,시켜놓고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기다리는 중 리뷰를 읽어서 그런지 더욱 와닿고 객관적인 문체 또한 마음에 들어요^^
저도 필독하고 마음의 우울을 날려버렸음 해요,,

frost79 2008-02-1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는 아직까지 지독하게 앓아본 적은 없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봤던지라 그 힘듦을 조금은 알고 있답니다.
책을 추천하는 일은 항상 조심스럽지만,
곁에 두고 보시면 좋을 책이라 생각됩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

frost79 2008-02-1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치코님.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적지 않은 나이인 저도 상쾌하고 명확한 기분보다는
의뭉스럽고 안개에 싸인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때가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이 책은 정신과적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을 다루면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주는 감동과 생각거리도 적지 않습니다.
전 우울증이라는 주제 자체도 좋았지만, 그 어려웠던 경험들을 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저자의 노력과 용기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읽게 되더라구요.
사치코님께도 좋은 책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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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 갑자기 불현듯 무언가엔 대한 깨달음이나 통찰 혹은 이전과는 다른 생각이나 느낌이 찾아올 때를 "아하 경험(A-ha experience)"이라고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의 내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하!". 사랑이라는 주제, 누구나 다 경험하지만 그 누구의 경험도 서로 같지는 않은, 아니 사랑의 당사자 두 명의 경험조차도 같지 않기 일쑤인 그 사랑이라는 것. 아무리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해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가슴 절절한 명언을 남겼어도 알려고 할수록 더 모르겠는.. 그 놈의 사랑이라는 것 말이다.

  베스트셀러라면 작품이건, 작가건 경계부터 하게 되는 탓에 이제야 알랭 드 보통을,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며칠간 들고 다니며 읽었더니, 지나다니며 보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아직도 이 책을 안 읽었었냐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그래도 그 중에는 "알랭 드 보통 책 여러 권 봤는데, 이 책이 제일 좋더라구요."라는 기분좋은 이야기가 제일 많았다(한 권을 제대로 선택했다는 만족감!...^^;;).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닌데, 확실히 (좋은) 소설의 매력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안타깝게 중간에 책갈피를 꽂으며 다른 활동으로 정신을 옮겨야 할 때의 아쉬움은 다시 책장을 펼쳤을 때의 기대와 흥분으로 충분히 보상받으니 말이다.

  책에 관해 얘기하자면, 아니 줄거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나의 이야기전달실력으로는 별로 흥미로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연애소설이 되고 말 것이다.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과 갈등과 헤어짐, 이 얼마나 얼마나 단순한 줄거리인가 말이다. 기억력을 원망하며 앞 장을 뒤적이게 만드는 복잡한 복선이나, 침을 꼴딱꼴딱 삼키게 만드는 19금 묘사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반전도 없고 우리나라 드라마라면 빠지지 않았을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교통사고 따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어쩐지 얼마 전 남자친구와 다툰 내 이야기 같은 에피소드들과,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갈등의 과정들은 그저 너무 친근한 이야기들이어서 헛웃음을 짓게 할 때가 많다. 하지만 너도 겪고, 나도 겪는 그 흔한, 그러면서도 세상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 알고 보면 너무나 다들 독특하고 기구한 사랑의 경험들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아하!" 경험을 선사한다. 뭔가 다 알 것 같은데 입 안에서 뱅뱅 맴돌기만 하고 차마 떠오르지 않았던 그 단어들로 바로 그 자리에서 정확히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알듯 말듯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던 단어를 누군가 정확히 이야기해주었을 때 느껴지는 청량감을 아시는지? 그 싸아~한 청량감을 충분히 맛 볼 수 있는 기회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만큼의 적절한 중량감도 내게는 이 책의 큰 매력 중 하나였다. 철학과 정치, 종교,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개념과 지식들을 연인들의 복잡한 사랑과정에 섞어 버무려 낸다는 것이 위험한 줄타기처럼 위태로워 보일 수도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그 작업이 얼마나 유쾌하고 진지하게 완성되었는지 알 수 있다. 몇 번이고 곱씹어 보며 내 경험을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도 있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구절도 있다. 바쁜 일정 끝에 오랜만에 손에 잡은 소설 한 권 덕분에, 얼마간은 현실과 상관없이(말인즉슨, 현실의 사랑이 나를 아무리 고달프게 하여도) 마음 가득 시원함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은 마지막 장에서 과연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지, 우리가 사랑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묻는다. 주인공은 여러 가지 문장을 통해 복잡한 교훈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짐작하듯이 결국 자신의 사랑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하긴, 교훈을 얻는다는 일 자체가 어쩌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우리가 바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현자가 되지는 않았다". 결국 새로운 사람과 시작하는 사랑은 이전 경험에서 얻은 학습과 교훈이 적용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라운드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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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어빈 D. 얄롬 지음, 최윤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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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얄롬의 책을 직접 읽기 전까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지,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은 또 주위에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의아했었다. 이제야 그 의아함이 풀렸고, 나도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얄롬은 실존심리치료자이다. 실존주의적 심리치료에 관해서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한 마디로 인간의 실존적 관심사에 초점을 두는 심리치료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실존적 관심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얄롬은 죽음, 자유(선택과 책임), 소외, 삶의 의미 이렇게 4가지를 들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은 이 조건들이 사람들에게 자각되고, 삶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낼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고 고통을 겪고 절망하게 된다. 이 책에는 그러한 어려움에 놓인 열 명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와는 인종도, 나이도, 국적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 다르지만 인간 존재로서 겪어내는 그들의 아픔과 내적 투쟁은 우리에게도 진한 감동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도 동일한 조건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이건 간에 대중들을 위한 글쓰기 능력이 있고, 그럴 마음이 있는 훌륭하고 진솔한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얄롬은 그런 점에서 축복 같은 인물이다. 수업 시간에, 혹은 다른 이론적 경로를 통해 그의 이론을 접해보았을 뿐 이제야 막 그가 쓴 책을 한 권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충분히 동감할 것이다. 치료자로서의 권위나 거창한 소명의식 없이, 그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동료이자 동반자로서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치유하려는 그의 진실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며, 특히나 보통의 경우에는 숨기고 싶어하기 마련인 자신의 약점이나 있는 그대로의 생각들까지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그의 솔직함이 이미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심리치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헛된 노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얄롬은 최대한 전문용어의 사용을 줄이고, 전문적 개념들은 알기 쉽게 풀어쓰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열 명의 내담자가 풀어놓는 각기 다른 색깔의 이야기들은 마치 열 편의 짧은 소설을 읽는 듯 흥미롭게, 그러면서도 얄롬이라는 동일한 등장인물에 의해 조화롭게 전개될 것이다. 이미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프롤로그를 꼭, 주의깊게 읽어볼 것을 권한다. 프롤로그를 읽어보면, 얄롬의 인간관, 치료 철학 뿐만 아니라 뒤에 전개될 내용들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깊은 성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이 별로여서라기보다는 마음 속에 깊이 와 닿는 주옥같은 문장들을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고 싶어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원서를 주문했다. 한 권의 훌륭한 책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오랜만에 실감했다. 삶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조건들을 부여했지만, 그러한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살아나갈 희망과 기대 또한 주었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 같지만, 나의 가장 큰 희망과 기대는 내 옆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당신이 있다는 것. 혼자 가야 하는 길이지만, 이 길을 누구도 함께 가 줄 수는 없지만 내 옆에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수많은 당신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얄롬이 주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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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
제이 그린버그 외 지음, 이재훈 옮김 / 현대정신분석연구소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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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관계이론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로 보며, 특히 초기 아동기의 관계 경험(대상관계 경험)이 성격 구조의 형성이나 정신적인 내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대상관계이론이 프로이트의 이론으로부터 형성되어 나온 발달과정과 더불어, 프로이트의 정통 정신분석적 이론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대표적인 대상관계이론가들 및 여러 이론가들의 핵심적인 이론 전제들의 설명을 통해 비교하고 분석한다.

  이 책은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저서 중 가장 집약적이고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분야의 권위서로 인정받는다. 그만큼 제대로 공들여 읽는다면 많은 정보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열매를 거두기 전에 넘어야 할 몇 개의 산들이 있다. 우선, 전문적인 분야의 전문적인 내용들을 압축해놓은 만큼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 없이는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특히나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이 책의 구성 자체가 프로이트의 욕동 이론(drive theory)으로부터 대상관계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이론적 전제들의 변화과정을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프로이트 이론의 개념들과 대상관계이론의 주요 개념들 간의 비교분석이 계속 이루어지기 때문에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책의 내용을 따라가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둘째,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이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저자들이 책의 서문에서도 밝혀놓았듯이 이 책에서는 대상관계를 보는 다양한 이론들 간의 차이점들을 부각시킴으로써 현재도 계속 진화하고 있는 정신분석학파들 사이의 다양한 입장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대상관계이론 그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책의 작업들이 버겁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그 과정 끝에는 얻을 것이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정신의학계나 심리학계 내에서도 용어의 통일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주요한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선택은 번역자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번역 상의 용어 선택이나 어법에 있어서 읽는 사람과의 코드가 맞지 않을 수 있는데 이 책의 경우 내가 배워왔던 접근이나 용어들과 다른 면이 있어서 그 점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했다(drive를 욕동으로 하든 추동으로 하든 의미상의 차이는 없겠으나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용어에 대한 선호는 어쩔 수 없다).

  분명 권위서로 인정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일 것이다. 이 책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 이론가들의 공통적인 주장과 서로 다른 주장들을 알게 되고, 비교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면서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라는 개념이 뜻하는 바에 조금씩 더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들을 얻기까지 여정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솔직히 끝까지 읽는 일이 '어려웠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멜라니 클라인, 페어베언, 위니컷, 컨트립, 말러 등 다양한 대상관계이론가들의 핵심적인 이론적 전제와 그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의 해당 부분만을 찾아보는 것도 꽤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은 알찬 책이다. 언제고 다시 한 번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끝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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