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청춘에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읽는 청춘에게 - 21권의 책에서 청춘의 답을 찾다
우석훈 외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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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대학생 7명이 모여 책을 펴냈다. 다른 학생들이 토익과 취업에 목매달고 있을 때 이 청년들은 출판을 통해 자신만의 스펙을 쌓아갔다. 기획부터 인터뷰, 출판까지 조금은 당차고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을 열정으로 성취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2,30대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책을 갖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유명인사의 성공기와 책을 읽자는, 조금은 뻔한 내용이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힘은 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라는 화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결론은 재밌는 일을 찾으라는 것!
 순간,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뭐였는지 자문해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몇 가지 일들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 이거야! 미래에 대한 나의 도전에 작은 불씨를 당겨본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보인다.

 "저자 : 우석훈 외 20인의 멘토와 20대 청춘이 함께 만들다"
 책의 저자를 책꽂이('책에 꽂힌 이십대'의 줄임말이자, 대학생 교육 네트워크 단체인 FUN20의 미디어 강좌를 통해 만난 7명의 대학생 모임)로 하지 않고 '우석훈 외 20인의 멘토'라며 유명인사를 끌어다 놓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명사를 인터뷰해 그들의 인생과 추천하는 책을 소개하는 글이 어떻게 명사 자신(우석훈 외 20인)들의 저작이란 말인가. 물론 명사들의 말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는 하지만 책꽂이 학생들의 머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본 것이 아니던가. 책의 저자에는 그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책꽂이(김수정, 박종현, 성우의성, 양지은, 윤은지, 이소연, 정선미)가 들어가야 했지만 우리 현실은 그러질 못했다. 아니 그러질 않았다. 책에서 그렇게나 외쳤던 젊음의 열정과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현실에 우리의 청년들을 가둬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또한 일곱 명의 대학생이 쓴 각 파트는 별다른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다. 개인의 생각이나 글쓰기의 방향이 천차만별일 텐데도 마치 한사람의 글처럼 미끈했다. 책꽂이 대학생들의 글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출판과정의 교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각자의 개성이 묻어있는 글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책꽂이가 결성되고 활동했던 FUN20(http://www.fun20.net)은 "대한민국 차세대 글로벌 리더 네트워크"라는 취지아래 대학생들의 미래교육과 인적 네트워크 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다. 다양한 강좌와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자유롭게 공부하는 모습은 좋아보였지만 이것 역시도 외적 '스펙 쌓기'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없는 제3자의 우려일 수도 있겠지만 '경력 쌓기'라는 미끼를 통해 지식을 담보삼지는 말아야겠다.

 <책 읽는 청춘에게>라는 제목을 달고 젊음을 독려하지만 실은 일곱 명의 저자 자신들에게 향하는 목소리였다. 취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여행과 독서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는, 실패 역시도 내일의 밑거름이니 열심히 도전하라는 자기최면 말이다.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다시 한 번 힘차게 외쳐본다.
‘화이팅!’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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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숨을 시각화할 수 있는 발암성 도구.


- memo
  한숨, 듣는 타인에겐 짜증이지만 자신의 시름은 한 줌씩 털어버린다...
  지인의 블로그에 단 답글을 고쳐 적는다. 근데, 너무 '외수'스럽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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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왜곡의 역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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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격적인 책읽기에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일단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교회나 성당은 이벤트성 행사 때에나 잠시 기웃거렸을 뿐 꾸준하게 다녀본 적은 없다. 집안의 영향으로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교도라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굳이 따지자면 ‘아무 종교도 믿지 않으면서 모든 종교를 믿는’ 개방형 종교인이랄까. 동양철학에서 시작된 관심이 불교와 기독교로 번지면서 점점 여러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없지만 일부에 대해서는 의문과 비판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만이 진리요 천국”이라는 배타성이다. 예수의 존재와 그가 남긴 사랑의 메시지는 의심해본 적이 없지만 ‘유일신’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의 모습은 예수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온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그런 편협한 모습일 수 없다. 자비를 통해 세상만물의 평안을 추구하려던 석가와 마찬가지로 예수 또한 사랑으로 세상을 보살피려 했을 것이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뜨린 무식쟁이는 아니라고, 여전히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판매하듯이 개종을 권유하는 사람을 보면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나 교회, 성경, 아니면 자신에 대한 오해로 진실을 못 보는 것이라 단언했다.
 나의 이런 논리가 어떤 기독교인에게는 반감을 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렇게 믿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왜곡의 역사>는 내 생각의 진위를 검증할 수 있는 충분한 토대가 될 것 같다. 내 어설픈 종교관이 이 책을 통해 어떻게 확장되고, 수정되고, 혹은 정정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지 싶다.

 “나는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가르치는 성경학 강의들에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하나의 복음서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복음서들 사이의 모순된 부분도 눈에 띄었다. 또 일부 복음서가 제목에 붙여진 이름의 저자에 의해 쓰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그때까지 어떤 의문도 없이 믿었던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들, 예컨대 그리스도의 신성론과 삼위일체론 등이 신약성서의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난 후 점점 구체화되면서 예수와 제자들의 원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였다.” (p35)

 책은 먼저 역사비평론적 접근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신학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인된, 하지만 일반인들은 알지 못했던 왜곡과 모순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예수가 사망한 날이라든가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 복음서의 불명확한 저자 등에 대해 수평적 성경 읽기를 통해 확인한다.
 오류는 예상외로 많았고 누구나 쉽게 발견할 만큼 흔해 보였다. 인류 최고의 성전에 드러난 이런 모순이 조금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저자는 오류에 대한 공개적 인식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기원 후 70년쯤에 쓰였던, 다른 성경에 비해 진실도가 높을 것이라 추정되는 마가복음에는 분명 예수 이외의 '인자'가 등장해 '심판'을 한다고 적혀있다는 것. 바트 어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윤리적인 가르침도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위대한 도덕군자로 생각한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도덕군자였다. 그러나 왜 예수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쳤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윤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즐겁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는 '오랫동안' 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곧 종말이 닥치기 때문이다. 인자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에서 심판을 하고, 이제 금방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 방식을 바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위해 우리 사회를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다.” (p224)

 이는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만이 그 보상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으로, 종말론을 주장하는 일부 종교와 유사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성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혀내려고 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예수는 누구이고 성경은 무엇인가. 책 서두에 언급했듯이 작가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느꼈을 저항과 갈등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또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말한 메시아가 과연 예수였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었지만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를 메시아로 믿고 '해석'해 버렸다. 결국 기존의 유대교와는 상반된 형태의, 예수를 중심에 둔 새로운 종교(기독교)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유대인 중심적이던 예수와 그 추종자들의 종교가 잠깐 사이에 지독히 반유대적인 종교로 변해, 중세에 이르러서는 끔찍한 박해를 일삼았고, 근대에 와서는 전 세계에 고통을 안겨준 대학살을 저질렀다.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계속된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인의 비기독교계 유대이에 대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남긴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부산물인 셈이다.” (p329)

 이 과정에서 예수는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되었으며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성부(하나님)와 성자(하나님의 아들, 예수), 성령(하나님의 영)의 세 위격은 하나라는 의미로, 두 하나님(태초의 하나님과 신으로 승화된 예수)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종교"라며 후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단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인 책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다운 책이라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많은 가르침이 내게 기운을 주지만, 성경 뒤에 하나님의 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의 저자들이 쓴 원본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군데군데가 인간의 손으로 변경될 필사본이며, 우리가 성서라 생각하는 책들은 작성되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정전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지도 않았다. 어떤 책이 올바른 책인지 결정하려고 안간힘을 쓴 교회 지도자들, 결국 인간의 땀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p300)

 예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유대교를 부정하고 구약을 재해석했으며 삼위일체설로 합리화했다는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무래한 발언처럼 보인다.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나 대학에서는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내용일지라도 일반인의 눈에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성경 속의 모순은 예수의 완전함을 강조하던 교회에서는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는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버렸기에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인 공격처럼 느껴질 수도,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엉터리 교인이나 심약한 교인(?)이 볼 때에는 신심의 근본부터 흔들어놓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옳지 못한 것을 바로잡고 지속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그의 존재와 가치가 더욱 빛날 수 있으리라. 
 그렇다, 성경 자체의 글자와 문장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를 통해 2000년 전부터 가꾸어왔던 '사랑'이라는 덕목이 아닐까. 예수면 어떻고 부처면 어떠하랴. 성인들의 발자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우리의 삶에 녹여낼 수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천국'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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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권리는 없는가?
(김영하, http://kimyoungha.com/tc?page=13 )

교과서에서 글을 빼달라는 소설가

(국민일보,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65320&cp=nv )

여러분은 문학을 '배우'셨습니까?
(김영하, http://kimyoungha.com/tc?page=12 )
 

문학에 대한 많은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아울러 김영하 작가님의 '문학애'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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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갈증은 늘어만 간다. 
 알라딘 서평단으로 활동하면서 수시로 배달되는 책을 읽어내느라 힘겨운 비명을 지르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른 책을 보관함(관심 있는 책을 담아놓는 일종의 구매예정리스트)에 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 구입해서, 언제 읽게 될지도 모를 미지의 약속을 남발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책읽기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엔 6펜스가 딸그락 거리면서도 마음은 어제 본 저녁달을 그리는 모습이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것을  읽고 싶어지는 궁핍은 세상의 책을 다 섭렵한다 해도 채워지지 않을 욕망이리라.
 보관함의 책 사이에는 뿌듯함과 부담감이 공존해있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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