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남영신 지음 / 까치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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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국어는 어렵다. 정확한 단어와 문법을 통해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맞춤법을 틀리는 경우가 많았고 앞뒤 연결이 되지 않는 문장도 허다했다. 이상야릇한 표현은 글의 의도를 희미하게 만들었고 정리되지 못한 성급함만 남겨버렸다.
 불분명한 표현과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을 쓰면서도 이를 찾아보고 공부해보려는 노력은 늘 게을렀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문장들을 보면서 국어 공부에 대한 필요성은 느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올바른 표현에 대한 필요성과 국어공부에 대한 내 가능성도 확인할 겸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를 펼쳤다.

 국어의 어려움은 먼저 조사에 있었다. 조사는 명사에 붙어 주어나 목적어 등의 기능을 하게 만드는 요소로 '이/가, 은/는', ‘에’, ‘에서’와 같이 그 정확한 의미와 기능을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훈 작가 역시 <남한산성>을 쓸 때 조사 하나로 며칠씩이나 고민했다고 한다.
 <조사>에서는 그 의미와 올바른 사용법을 알기 쉬운 예문을 통해 설명한다. 가령 주어라든가 새로운 정보가 있을 때는 '이/가'를, 주제어나 서술어에 있으면 '은/는'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며 여러 예문을 곁들여 설명한다. 그리고 간단한 문제를 통해 자신의 국어실력을 확인해볼 수도 있다.
 계속해서 <어미>에서는 '고, 며', '므로, 으로'의 차이점을, <호응>에서는 주어와 서술어의 제약 관계를, <생략>에서는 주어나 서술어, 조사의 지나친 생략으로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를, <축약>에서는 지나친 수식이나 한자어 남용으로 인한 모호함에 대해 살펴본다. <높임말>과 <시제>에 대한 중요성도 지적한다.

 이 책에 인용된 수많은 문장들은 내 독해력에 대한 그 동안의 오해를 일부 해소시켜줬다. 몇 번을 되짚어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은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표식 같았다. 하지만 내 독해력과는 무관하게 문장 자체의 오류도 상당히 많았다. 조사와 어미가 잘못 사용되거나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되지 않는 문장,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지나친 은유는 글을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 이렇게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비문은 유명 작가의 소설, 산문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기성 작가부터 글쓰기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요구한다. "정확한 문장과 개성 있는 문체"를 위해 평생을 공부하라고 충고한다. 문학적 글쓰기가 문법적 글쓰기와 전적으로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글을 표현함에 있어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지 싶다.

 그래도, 국어는 어렵다. 글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문장이 엉성해지고 문장의 구성에 신경쓰다보면 글이 막히기 일쑤다. 내가 쓴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어색함도 결국에는 엉터리 문법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바른 문장이 아름답다"라는 말로 책을 마무리하면서 "한국어를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확한 언어로 다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어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저자의 말을 들으니 주관적인 느낌에 의존해 아무렇게나 써온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문법책이나 사전, 글쓰기 책을 찾아보며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지금 쓰는 이글에도 온갖 엉터리 문법과 알 수 없는 미문으로 가득할 것이다. 십여 년 가까이 써왔던 엉터리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처지겠냐 마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겠다. 머릿속 생각을 체계적으로 풀어놓을 수 있는 능력과 함께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기술도 배워야겠다.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를 한번 읽고 밀쳐버릴 것이 아니라 손닿는 곳에 가까이 두고 읽고, 또 읽으며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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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이대 (외)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33
하근찬 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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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난 이대 - 하근찬                                                                                
 징용으로 끌려간 탄광에서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만도)와 전쟁 중에 역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진수)의 만남을 그렸다. 아버지는 자신처럼 불구의 몸이 된 아들을 보자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착찹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한쪽 팔이 되어 오줌 누는 것을 도와준 진수와, 아들의 한쪽 다리가 되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아버지는 새롭게 정의된 부자간의 존재감을 깨닫는다. 이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수난의 역사가 서로간의 이해와 수용을 통해 화합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놓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코앞에 놓인 손익만 생각하다보니 대립이 끊이질 않는다. 좀 더 넓은 시야를 통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여 제자 - 하근찬                                                                                    
 제목만 봐서는 뭔가 음침하고 야릇한, 19금의 불륜을 연상케 되지만 실상은 열아홉 총각 선생님을 사랑한 열여섯 살 여학생의 로맨스였다. 선생님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경계는 이성으로서 갖는 애틋함과 뒤섞인 미묘하게 다가왔다. 누구나 한두 번 경험해 봤을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인데다 나 역시 첫 교단이 여고였기에 더 각별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읽다보면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의 원작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본 작품을 수정 보완한 장편 <내 마음의 풍금>도 출판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순박하게 웃던 이병현의 모습과 전도연의 수줍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원작과 오버랩 된 영상이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스토리를 만든다.

 오발탄 - 이범선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한다."
 전쟁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픈 자화상이랄까. 갈 곳을 잃은 철호의 말은 이북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어머니의 독백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하지만 뚜렷한 목적지라도 있는 어머니에 비해 철호는 그마저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 강도짓으로 경찰에 잡혀간 동생과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생활하는 여동생, 둘째를 놓다가 목숨을 잃은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갈 곳 잃은 불발탄이 되어 거리를 나뒹군다.

 학 마을 사람들 - 이범선                                                                        
 TV문학관은 우리나라 소설을 단편 드라마로 만들어 보여주던 옛 텔레비전 프로그램인데 황순원의 <소나기>도 거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 글 역시 TV문학관에서 본 기억이 난다. 평온하던 시골풍경과 그 마을에 상징물처럼 서있던 '학 나무'의 위풍당당한 모습, 학의 똥을 받으면 그해 시집을 간다는 소리에 너도나도 학 나무 밑을 기웃거리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학 마을에 날아든 학에 변고가 생기자 이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하지만 순박하게 살았던 마을 주민들은 세상의 변화를 알 턱이 없었다. 인민군이 되어 마을을 다시 찾은 바우는 인민위원장이 되어 급기야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은 학을 쏘아 죽였다. "저만큼 땅바닥에 빨래처럼 구겨 박힌 학의 주검"처럼 순박하던 민심도 바닥에 내동댕이 처졌지만 종전과 함께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 시작한다.


 치밀한 사건구성과 다양한 테크닉으로 무장된 오늘날의 소설과는 또다른 맛이다. 현란하지는 않지만 구수하게 가슴을 죄어오는 아련함이 좋다. 시골 할머니 댁에서 먹는 청국장 맛이 이런 걸까.
 1987년에 나온 <여 제자>를 제외하고는 1950, 60년대에 나온 소설들이라 형식이나 소재가 다분히 제한적이다. 식민통치와 전쟁, 가난이라는 역사적 격랑을 거쳤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우리 선배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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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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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 끓어오를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99도에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잖아."라며 자신을 다잡았다.

 <100℃>에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의미와 과정을 되돌아봄으로써 오늘날의 온도를 측정해보고자 했다. 비록 지금은 평온한 듯 보이지만 언제 끓어 넘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민심을 되돌아본다.
 우리사회는 지금 몇 도씨인가? 과거 전 씨 형님 때보다야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뜨겁다.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선거철의 구호는 잊혀진지 오래고 국가의 장래보다는 그 순간의 당리당약에 빠져 현실을 외면한다.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민심을 거스르고 자연을 파헤친다. 우리를 둘러싼 화마는 여전히 우리를 뜨겁게 만든다. 

 그림을 지탱했던 사각형의 앵글은 민주주의를 구속했던 감옥처럼 견고해보였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 틀 사이에 꽃을 그려 넣으면서 우리의 사회와 역사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만화라는 친근함을 바탕으로 무겁게만 느껴졌던 과거사를 되새긴다.
 특히 이 책의 첫 의도가 전국 중고등학생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우리는 국정 교과서에서 다루지 못하는 역사의 이면을 청소년에게 알려줘야 한다.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설계하기에 앞서 한국의 과거를 정확히 묘사해 보여줄 수 있어야겠다. 그 첨병의 한 부분을 이 만화가 담당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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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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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 케인>을 아는가? 최고의 영화를 뽑는 리스트에서 1위를 놓친 적이 거의 없는 영화로 신문계의 거물 케인이 죽으면서 남긴 "로즈버드"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 그의 생을 되짚어간다. 과연 로즈버드가 무엇이기에 부러울 것 없는 백만장자마저도 그토록 찾아 헤맸단 말인가? 진귀하고 값진 무엇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케인이 어릴 때 타고 놀던 썰매가 로즈버드였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낡고 오래된 썰매 하나였지만 누구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줄 최고의 보물이었다. 대상의 희소성이나 금전적 가치를 떠나 그 속에 깃든 기억이 최고의 가치인 샘이다. 어린왕자가 말했던 것처럼 익숙함과 길들여짐을 통해 자신만의 보물이 되었다.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심오한 철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기억 속에, 추억 속에 깃든 의미 있는 물건을 찾아보고 우리의 삶과 인생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편한 마음으로 훑어본다. 첼로, 매듭, 배트맨, 여행가방, 발레 슈즈, 노트북, 라디오, 자동차 등과 같이 우리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저자 자신의 기억과 의미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았다.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의미 있는 사물이라 해서 반드시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혈당측정기, 우울증치료제와 같이 자신의 아픔과 맞닿아있던 물건도 있다. 이런 사물들은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과 함께 고통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노트북 같은 기계장치에 느끼는 애착은 약간의 씁쓸함도 갖게 한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이 무수한데도 불구하고 구부정한 허리로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럼 나에게 의미있는 것은 무엇이던가? 우선 프리즘(www.freeism.net)이 떠오른다. 주목받지 못하는 조그만 홈페이지, 인터넷 상에 떠도는 0과 1의 디지털 조합일 뿐이지만 여기에는 내 젊은 날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남다르다.
 아마도 1998년이지 싶다.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01421번으로 천리안에 접속해 인터넷에 접근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당시에는 블로그나 카페 같은 미디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들보다는 앞서 개인미디어를 운영했다는 점만 빼고는 딱히 전문적이거나 심도 깊은 내용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읽은 책이나 여행 후의 느낌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프리즘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10년 이상 꾸준하게 나의 대변인이 되어왔다. 말주변이 부족한 나는 이 홈피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할 수 있었고, 나를 뒷조사(?)하던 집사람과도 돈독한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인 샘이다.

 문득 나는 누구에게 의미를 부여받고 있을지 되짚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줄 대상은 과연 몇이던가. 결국 세상 사물에 대한 의미 역시 나를 향한 관계로 귀결되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나 역시도 누구에게 의미를 부여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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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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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스름달밤,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여는데 창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는 순간 하얀 물체가 커튼 뒤로 숨는 것이 아니던가. 뭐지? 놀란 마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커튼. "워이"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커튼을 열어젖혔다. 스르륵 밀려나가는 커튼 뒤로 보이는 것은 반쯤 열려진 창문. 휴~ 하는 안도감으로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허연 물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체 하얀 소복을 입은, 입가에 배인 옅은 미소와 핏자국이 선명한, 텔레비전이나 동화책에서나 보던 봤던 바로 그... 처녀귀신!

 무서움과 공포로 다가왔던 그녀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억압된 여성성의 상징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맘 편히 하소연할 곳 없는 여성들의 선택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나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경우는 더욱 가혹했다.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가치와 열녀에 대한 사회적 강요,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던 상황으로 인해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죽어서도 쉽게 원한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그들을 도와준 이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녀들을 농락하고 이용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을 준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녀들의 사연을 듣고 가해자를 찾아 처벌함으로써 원한을 풀어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귀신스토리'를 통해 사대부 남성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 우위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글을 통해 알려진 대부분의 귀신이야기가 그들의 손에 의해 쓰였고 읽혀졌기에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 맺힌 원혼을 통해 남성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하지만 권선징악의 이면에 숨어있는 여성들의 억압은 여전했다. 오직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자신의 한과 의지를 표현하고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어야 사는 여자'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귀신의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 것은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부모의 명에 따라 혼인해야 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 딸, 일부일처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 전근대 사회의 제도와 이념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p173)

 결국 처녀귀신은 남성중심의 사회에 은폐된 슬픔의 역사였다. 단순히 일회성의 흥밋거리로만 넘길 것이 아니라 그 억압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요즘이다.
 시간이 흘러 처녀귀신의 출연빈도는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녀들의 한과 설움이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노동자귀신, 빈곤층귀신, 다문화귀신, 장애인귀신, 취업귀신, 청소년귀신 등 더 많은 ‘슬픔’을 대동하고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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