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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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의 <Norwegian wood>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룸의 첫 신호탄이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때부터 시작된 하루키의 유명세를 꾹 참고 기다리다 1999년에야 읽었던 기억난다. 뭐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고 그 어렴풋한 느낌, 마치 안개 속을 걷고 있는듯한 모호함만이 '상실'이라는 단어와 함께 남아 있었다. 이렇게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혼란스러움은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르웨이의 안개는 여전히 짙게 깔려 한치 앞을 가늠키 어려웠다. 다만 비틀즈의 노래 속에 남겨진 여운이 책의 이미지와 많이 오버랩 되면서 그 혼란의 정체에 조금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의 전체 구성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나(와타나베)에게는 기즈키라는 오랜 친구가 있는데 그는 나오코와 연인 사이로 우리 셋은 늘 함께 만났다. 그러나 가즈키가 갑자기 자살하자 나오코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그녀와의 연락도 자연스레 끊겼다. 얼마 후 나는 시내에서 우연히 나오코와 마주친 후 그녀에게 가끔 만나게 되었고 점점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켰던 나오코는 요양원으로 떠나게 되고 함께 수업을 듣던 미도리를 알게 된다.  

  와타나베가 알고 있거나 만나는,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 둘씩 들려주면서 이야기는 점점 깊어진다. 꼭 집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심리적 갈등이나 사회에 대한 혼란스러운 인식, 남녀 간의 불확실한 사랑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성장'이라는 화두를 통해 하나씩 풀어놓는다. 그렇다고 명확한 해답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뒤엉켜 더 깊은 혼란과 갈등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나오코가 기즈키를 생각하며 와타나베 한 말 속에는 안개 가득한 <노르웨이 숲>이 그대로 함축된 것 같다.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우리는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가 이제 돌아온 거야. 그래서 기즈키는 그런 선택을 했고 지금 나는 이렇게 되었어. 우리는 무인도에서 자란 벌거벗은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어.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먹고 외로우면 둘이서 끌어 안은 채 잠들었지. 그런 사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잖아. 우리는 점점 커 갈 거고 사회 속으로 나가야만 했어." (p224)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 개개인은 결국 시간과 함께 성장해간다. 남들보다 돋보이거나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화려한 외형을 갖고 있든, 심오한 깊이가 있든, 설사 깨어지고 어긋난 모양일지언정 결국 성장해가는 것이다. <노르웨이 숲>은 그 성장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어딘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안개 속을 화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랑하고 슬퍼하며, 만나고 헤어지며, 기억하고 잊혀지며... 와타나베는 이렇게, 그렇게 성장한다.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 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p415)

 

  소설책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인상적이다. 클래식부터 비틀즈의 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이 등장하는데 특히 와타나베의 갈등을 현실의 문제로 끌어다놓으며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레이코의 기타선율이 잔잔하게 들려온다. 책을 읽으면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노르웨이의 숲)을 몇 번씩이나 찾아 듣게 만들었다. 바람이 흘러가는 듯한 그 기타소리가 무심코 지나쳐왔던 내 젊은날의 시간들처럼 아쉽게 느껴졌다.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그녀는 내게 자신의 방을 내게 보여주었어. 근사하지 않아? 노르웨이산 가구(목재)야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그녀는 내게 머물다 가라며 아무데나 우선 앉으라고 그랬어.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그래서 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의자 하나 없다는 걸 알았어.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난 그냥 방석 위에 앉았어. 그리고 시간을 보냈지. 그녀가 주는 와인을 마시며 말이야.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우리는 2시까지 이야기 했어. 그 때 그녀가 말했지, "잘 시간이야"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그녀는 아침에 일하러 가야 한다고 그랬어. 그리고는 깔깔거리기 시작했어.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난 일이 없어" 라고 그녀에게 말하고는 잠을 자려고 욕조로 기어갔지.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s flown.
그리고 깨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거야.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그래서 난 불을 붙였어. 근사하지 않아? 노르웨이산 가구(목재)야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우리는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가 이제 돌아온 거야. 그래서 기즈키는 그런 선택을 했고 지금 나는 이렇게 되었어. 우리는 무인도에서 자란 벌거벗은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어.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먹고 외로우면 둘이서 끌어 안은 채 잠들었지. 그런 사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잖아. 우리는 점점 커 갈 거고 사회 속으로 나가야만 했어.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 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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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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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님은 글은 언제나 라면같이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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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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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세의 노부인, 조각은 오늘도 방역 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방역이란 쥐나 바퀴벌레를 잡는 일이 아니라 의뢰인의 요청을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살.인.청.부.업.을 말한다. 

  "그녀는 화장실 끝 칸에서 대량으로 푸러낸 휴지를 뭉쳐서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비수에 묻어 있던 독의 나머지를 대강 닦아내고 변색된 휴지를 변기에 버린 다음 물을 내린다." (p19)

 

  냉장고 한쪽 구석에 오래전에 넣어둔 복숭아가 보인다. 상당히 달고 맛있었던 기억은 있지만 언제 넣어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일은 손이 닿자마자 흐물거리며 녹아내린다. 맛과 향을 가득 머금은 탱탱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워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p222)

 

  조각의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은 살인청부업을 하는 동안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삐걱거리는 몸뚱이와 집안을 지키는 반려견(무용) 뿐...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치료해준 젊은 의사를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인간애나 가족애, 아니면 초코파이 광고에서 나왔던 사람 사이의 '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가슴 한편에 피어나기 시작한 따뜻한 온기는 그녀를 눈빛을 변하게 만들었다.

 

  살인청부업을 하는 노부인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삭막한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여느 킬러 못지않게 삭막해졌고, 온갖 사건과 사고가 비일비재한 현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비명횡사의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을 죽여야 하는 정글에 살고 있었던 것.

  하지만 조각을 변하게 했던 우리사회의 온기 역시 여전하다. 신문 모퉁이기는 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조건 없이 봉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자신의 이득보다는 타인의 안타까움에 먼저 눈물 흘리는 '측은지심'의 마음은 그 어떤 해택이나 정책보다 우리의 마음을 밝게 만든다. 아직 우리 사회는 썩어 문드러져 버려진 파과(破果)까지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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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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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 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서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p107)

 

  춘천마라톤(2012년, 5시간15분)과 중앙서울마라톤(2014년, 4시간59분)을 완주했지만 마라톤은 여전히 두렵고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하나의 대회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 전부터 수 십, 수 백 km씩 연습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끈기와 자기 절재가 필요하다. 퇴근 이후의 나른한 몸은 오늘의 연습을 내일로 미루게 만들고, 모처럼 있는 회식자리에서도 마음대로 즐기지 못한다. 거기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쌀쌀한 날씨 속을 달리기 위해 집 밖을 나간다는 것 또한 상당한 고역이다. 이런 어려움들은 섣불리 마라톤 대회 참가를 망설이게 만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라톤 대회 신청과 출전에 상당히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부터 '5시간을 달릴 수 있을까', '무리하게 달리다가 다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하지만 어떻든 대회를 신청하고 나면 스스로를 단련하며 연습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 같은 초보 러너에게는 기록보다는 뛰다가 죽지 않기 위한(?), 완주를 위해 달리는 거리를 늘리는 것이 연습의 주목적인지라 이런 중차대한 행사를 '지름'으로 해서 운동의 필연성을 만들기도 한다. 풀코스 완주라는 하나의 목표의식은 나를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자의든 타의든 꾸준한 연습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대회에 출전해 수많은 사람들과 호흡을 섞으며 달리는 동안 살아있다는, 하나의 목표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에 매료된다. 물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골인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씩 내 딛는 것이다.


  최근 들어 수영에 빠지면서 달리기에 소홀해졌다. 하지만 트라이애슬론(수영+사이클+달리기) 완주이라는 또 다른 욕심이 생긴 마당에 달리기를 등한시 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 나의 다리를 자극할 뭔가를 찾게 되었고 이렇게 골라든 책이 바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풀코스를 뛰어보고 싶다는 열망를 키웠던 기억도 있는데다 달리기 과정에서 오는 심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놓았기에 상당히 공감하면서 봤었다. 이제, 하루키의 뒤를 따르면서 나를 채찍질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p187)

 

  하루키의 영향이 금세 나타났다. 일요일 새벽 백양산 산길을 한 시간 동안 달린데 이어 어제 퇴근 후에도 동네하천변을 10km 달렸다. 오랜만에 제법 먼 거리를 달려서그런지 움츠려버린 근육에선 난리가 났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당기지 않는 곳이 없고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는 잔뜩 긴장한 체 힘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뻐근함이 싫지만은 않다. 이런 상태는 이 삼일이면 없어질 테고 곧이어 이정도의 훈련강도에 맞추어 몸이 적응할 테니까. 내 몸은 잊어버렸던 러너의 기억을 서서히 되살리고 있는 중이다.

 

  책 표지에 난 사각형의 구멍으로 오아후 알라모아나 공원(하와이)을 달리는 하루키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하루키의 모습 위에 지난 2014년 중앙서울마라톤대회 때 골인장면을 붙여놓았는데 마치 내가 쓴 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해졌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루키가 썼지만 그 속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였다. 살을 빼기 위해 조깅을 시작했고 10km대회에 참가해 완주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거리를 늘려 하프코스(21km)를 완주했으며 2012년과 2014년에는 풀코스(42.195km)를 무사히 달렸다. 그리고 올해(2015년 9월)는 트라이애슬론에 출전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루키의 회고록인 동시에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아니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달림이들의 '완주기'인 것이다.


* 2010년 글 보기 :  http://freeismnet.cafe24.com/xe/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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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1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저는 새 판본이 나온 줄 알았어요 호호호

프리즘 2015-07-17 08:41   좋아요 0 | URL
오래된 책이지만 좋은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 개정증보판
이장희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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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 서울로 상경한 나는 한남동의 한 주택에 급조된 자취방에서 몇 년을 보냈다. 부산과는 달리 정신이 하나도 없고 엄청 복잡한 서울이었지만 한국의 수도답게 다양한 문화재며 건축물,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문화공연들로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고, 대학로 거리에서 우연히 록그룹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홀로 종묘나 명동성당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감회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렇게 3년간의 화려한 서울생활을 마치고 부산에 돌아왔지만 서울에서 받은 문화적 해택은 쉬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서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책방을 찾았다가 서현 님의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다>를 읽게 되었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서울의 도심과 문화가 세세하면서도 자상하게 담겨있었는데 내가 경험한 서울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내가 놀았던 종로거리와 대학로의 또 다른 모습을 알 수 있었고 종묘와 명동성당의 가치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읽은 이장희 님의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역시 서울의 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경복궁에서 시작해 명동, 광화문 광장, 종로, 혜화동, 인사동, 숭례문 등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그 누구라도 한번쯤은 지나쳐봤을 서울의 거리를 이야기한다. 오래된 고궁의 내력에서부터 개발의 여파에 갈 길을 잃어버린 우리 문화는 물론 길거리에 방치되다시피 한 표지석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도심과 골목길을 돌아본다.  

  특히 현장감 가득한 그의 스케치는 단순히 셔터만 눌러 찍어놓은 디지털 사진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대상과 오랜 시간을 한 공간에서 보내야 하고 주변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점 하나, 선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몇 번이고 대상을 쓰다듬어야 한다. 이렇듯 그의 그림에는 서울에 대한 애정이 점과 선으로 연결되어 면을 채웠고 여백과 '서울의 시간'이 되었다.

  그림 중간에 삽입된 글 또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렸거나 알지 못했던 서울 속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부드럽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일갈을 통해 서울이 놓쳐버린, 아니 우리가 놓아버린 소중한 것들을 아쉬워한다. 유홍준 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고 있을 때처럼 잔잔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구입한 책이지만 오히려 저자의 소소한 글맛에 더 반해버렸다. 자꾸만 책 표지에 적힌 '이.장.희'라는 이름 석 자에 눈이 간다.

 

  작년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내 주변의 모습을 조금씩 그려보면서 이와 관련된 블로그를 많이 찾게 되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는 이들의 그림과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너무 재미없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는 세상을 좀 더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세상과 나를 보살펴야지. 그러면 나도 언젠가는 부산의 시간을, 가족의 시간을, 나만의 시간을 멋들어지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 이장희님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tthat )

 

스케치로 서울을 담고자 한 첫번째 이유는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노트와 대상물을 수없이 번갈아 보는 일은 속사정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외형을 알게 되는 최선의 방법이다. 선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사물(혹은 인물)을 알아가는데 어떻게 가까워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일련의 행동 사이에서 평범한 골목길도, `내 스케치 속 골목길`로 바뀐다.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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