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65세의 노부인, 조각은 오늘도 방역 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방역이란 쥐나 바퀴벌레를 잡는 일이 아니라 의뢰인의 요청을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살.인.청.부.업.을 말한다. 

  "그녀는 화장실 끝 칸에서 대량으로 푸러낸 휴지를 뭉쳐서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비수에 묻어 있던 독의 나머지를 대강 닦아내고 변색된 휴지를 변기에 버린 다음 물을 내린다." (p19)

 

  냉장고 한쪽 구석에 오래전에 넣어둔 복숭아가 보인다. 상당히 달고 맛있었던 기억은 있지만 언제 넣어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일은 손이 닿자마자 흐물거리며 녹아내린다. 맛과 향을 가득 머금은 탱탱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워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p222)

 

  조각의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은 살인청부업을 하는 동안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삐걱거리는 몸뚱이와 집안을 지키는 반려견(무용) 뿐...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치료해준 젊은 의사를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인간애나 가족애, 아니면 초코파이 광고에서 나왔던 사람 사이의 '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가슴 한편에 피어나기 시작한 따뜻한 온기는 그녀를 눈빛을 변하게 만들었다.

 

  살인청부업을 하는 노부인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삭막한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여느 킬러 못지않게 삭막해졌고, 온갖 사건과 사고가 비일비재한 현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비명횡사의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을 죽여야 하는 정글에 살고 있었던 것.

  하지만 조각을 변하게 했던 우리사회의 온기 역시 여전하다. 신문 모퉁이기는 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조건 없이 봉사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자신의 이득보다는 타인의 안타까움에 먼저 눈물 흘리는 '측은지심'의 마음은 그 어떤 해택이나 정책보다 우리의 마음을 밝게 만든다. 아직 우리 사회는 썩어 문드러져 버려진 파과(破果)까지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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