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환상적인 '밤' 이야기 [야행]

 

'국경의 긴 터널을 통과하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이다.

무심코 넘겼을지도 모를 이 첫 문장은 [야행] 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어지고 곱씹어지면서

환상적인 '밤'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사물을 다 집어삼킨 깜깜한 밤과 대비되는 하얀 밤의 밑바닥.

스르륵 스쳐 지나가는 밤의 풍경 너머로 보이는 그 밑바닥이란 것이 설국에서는

하얬지만 책 속 주인공의 경험담에 의하면 밤의 밑바닥은 숲의 어둠에 불씨를 흩날리며 멀어져 가는 거대한 화염이기도 했다.

정적일 것만 같고 고요하기만 할 것 같은 밤의 이미지는 날름거리는 화염의 옷을 입고 마구 날뛰기도 한다.

하나로만 가두어두기엔 '밤'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역동적이고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주인공 '나(오하시 군)'는

10년 전 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과 '구라마 진화제'에서 축제를 즐겼는데, 거기서 하세가와 씨가 실종되었다.

나는 10년이 지난 후, 그 시절의 동료들을 다시 교토로 불러들인다. 약속 시간까지 좀 남아 거리를 걷던 그는 문득 눈앞을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화랑에서 화가 '기시다 미치오' 개인전을 보게 된다. 검은 배경에 하얀 농담으로 그린 풍경 동판화 '야행'연작들이 걸려 있었다.

작품들에는 한 여자가 그려져 있다. 눈도 입도 없이 매끄러운 하얀 마네킹 같은 얼굴을 기울이고 있는 여자들. <오노미치>, <오쿠히다>, <쓰가루>, <덴류쿄>, <구라마>...작품 속에 펼쳐진 밤은 신비한 느낌을 전달한다.

 

"왜 야행일까."

"야행 열차의 야행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백귀야행의 야행일지도 모르죠."-15

 

이 대화 덕분에 앞으로 펼쳐지는 다섯 명의 경험담 혹은 고백은 묘하게 으스스한 분위기의 띠를 두르게 된다.

각각 다른 곳에서 따로따로 들었다면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 이야기들은 '야행'이라는 제목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하나로 모아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연결성을 가진다.

숙소에 모인 옛 동료들이 실종된 하세가와를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기이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데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기시다 미치오의 동판화 '야행'과 관련된 여행이엇다.

나카이 씨의 경우 가출한 아내를 쫓아간 것이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어."-225

 

화랑 주인 야나기 씨는 화가 기시다에게 수수께끼의 유작이 있었다고 말한다.

<야행> 연작으로 모두 48개의 작품을 제작한 기시다에게 미발표 연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야행>과는 대칭을 이루는 일련의 동판화로, 제목은 <서광>이라고 했다. 야행이 영원한 밤을 그린 작품이라면 서광은 단 한 번뿐인 아침을 그린 것이라고...

 

때론 섬뜩하고 때론 으스스한 각자의 여행담이 동판화 <야행>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것이었다면, 끝에 가서 나타난 <서광>의 존재는 또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서광>의 비밀이 밝혀질 즈음에는 온통 혼란스럽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결말을 가리킨다.

밤의 세계가 품고 있는 마력은 우리의 오감을 뒤흔들어 동공을 확장시키기도 하고 심박수가 빨라지게도 한다. 숨을 죽이고 그 세계에 안겨 있는 동안은 밤이 뿜어내는 어두움에 완전히 빨려들어가게 된다.

 

묘하고 신비스럽고 충격적이며 불안한...

다 읽고 나면 납량특집도 아닌 것이 이상하게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느낌을 던져준다.

백귀야행의 야행인 것은 아닌지, 어깨를 털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털어내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밝은 대낮에도 괜시리 눈을 들어 환하게 빛나는 태양을 한 번 더 쳐다보고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온전한 '나'가 살아가는 세상인지,

어둠 속으로 뚫린 구멍 속으로 한 발짝만 내디디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건 아닌지...

환상적인 밤의 작가가 펼쳐내는 이야기 속에서 잠시 몽롱하게 내 자신을 놓고 있다

허우적거리며 손 발을 더듬어 본다.

부모가 갓 태어난 아기의 눈코입 손발을 신경 써서 확인하듯이

이제는 내 몸을 쓰다듬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해보게 되는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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