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멋진 작품 잉태의 꿈 [임신중절]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장편은 처음이다.

단편 속에서 빛나는 문장들을 접하고 황홀해 했었는데, 장편은 단편만큼 빛나는 문장에 더해 또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적절한 비유와 뜻하지 않은 비틀기는 너무나 멋져서  잠깐씩 숨을 멈추어 그 순간을 음미해야만 했다.

정말 천재 아닌가? 싶어 몇 번씩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품고 있는 상징을 찾아내서 진짜 뜻과 매치하는 과정에서는 재빨리 연결짓지 못하는 나를 놀리는 듯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면서도 사람을 빨아당기는 환상적인 면이 있어서,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끝나 있더라~

이야기 자체의 여운을 더 즐기고 싶었는데 뒷부분의 해설은 두 가지씩이나 이 책을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환상우화 한 편을 읽는 느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도서관이 있다.

어떤 출판사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 책이나 저작물을 받아주는 도서관이다. 사람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느 때고 도서관에 찾아와 친절한 사서에게 자신의 책을 맡긴다.

자기 집 고양이 잭에 관해 열두 살 여자 아이가 쓴 책, 일흔 살 중국 신사의 말 도둑을 다룬 서부소설, 고뇌 투성이의 여자가 두고 간, 프라이해야 할지 서가에 꽂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름투성이였던, 1파운드 베이컨같은  책,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쓴 <무스>같은 책들이 속속 도착한다.

 

아, 책들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너무도 좋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26

 

 

도서관에서 3년째 틀어박혀 책들을 기증 받는 주인공 '나'에게 어느날, 보티첼리풍의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육체적 아름다움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리려고 자신의 '몸'에 관한 책을 썼노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루저들이 자기 책을 가지고 오는 이상한 도서관에 사는 남자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영혼이 완벽하지 않은 여자 '바이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들에게 아기가 생기자 아직 세상에 적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임신중절'을 결심한다.

'나'가 유일하게 연락하며, 도서관의 책들이 옮겨지는 지하 저장고에서 일한다는 '포스터'의 도움으로 그들은 멕시코의 티후아나로 간다.

거기서 바이다가 수술을 하는 동안, '나'는 바이다를 포함, 세 번의 중절 수술을 목격한다.

도서관을 '집'이라 믿으며 다시 돌아왔지만 새로운 사서에 의해 '나'는 내쳐진다.

'나'와 '바이다', 그리고 '포스터'는 각자의 길을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보통의 '임신중절' 소재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눈물 따윈 없다.

감정 과잉을 불러오거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호소력 짙은 문장도 없다.

다만 사건의 나열들이 앞만 보며 직진하고 루저 같아 보였던 이들은 '임신중절'을 겪으면서 다시 힘차게 도약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해설에서 제시한 두 번째 방법처럼, 인간과 책의 관계, 또는 저자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출간되지 않은 모든 원고는 마치 장의사의 관처럼 도서관 선반에 나란히 놓여 있다가, 종국에는 지하무덤으로 옮겨져 묻히고 망각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35 (해설 중)

 

'나'가 목격한 세 번의 임신중절은 저자가 이 소설을 쓰기 이전 발표했던 세 권의 소설과 들어맞으니 '임신중절'은 저자의 작품이 태어나지 못하고 묻히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도서관은 원고들이 출판을 기다리며 모이는 곳, 지하 저장소는 원고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같은 곳이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에게  아름다운 '바이다'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과정이 낭만적 로맨스로 포장된 것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메마른 삶 속에서도 낭만을 바랐다는 증표로 보아도 될까?

 

브라우티건이 책 속에서 창조한 이 특이한 도서관을 기념해 실제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세워졌고, 거기서는 실제로 출판되지 않은 책 원고들만 받아서 보관했다고 한다. 실로 많은 이들의 꿈을 위한 도서관이 세워진 셈이니, 브라우티건의 낭만이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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