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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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의 바닥을 걷다 [유리 갈대]

 

 

[유리 갈대]는 세 번째로 만나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이다.

[순수의 영역] 이라는 장편 하나와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이라는 단편집 하나를 읽었을 뿐이지만 작가가 표현하는  분위기는 밝은 편이라기 보다는 어두운 편에 속한다.

작가가 홋카이도 구시로에서 태어나 계속  그 곳에 살았기에 작품 속 배경은 거의 홋카이도다.

거센 바닷바람에 맞서는 대가 센 여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고, 음지 특유에 사는 사람들의 스산하면서도 음습한 기운이 문장 사이사이에 베어들어 있다.

 

<순수의 영역> 나의 리뷰 중.

질투의 감정을 다룬 소설이라면 좀 더 빠르고 적대적이고 불꽃튀는 드라마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없이 처연하고 스산하고 차갑다.

그래서 더욱 위험한 질투라는 감정의 성질이 잘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나의 리뷰 중. 

여자라서 여자의 이야기를 더 잘 쓸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또한 여자라서 관능적이고 섹시한 묘사, 올바른 몸가짐을 가진 진짜 무희의 삶을 진지하게 적어내려간 작가의 이야기에서 더 깊은 떨림을 맛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기 위해 두 권의 리뷰를 찾아 읽어보았다.

그래. 이런 분위기를 간직한 작가였어.

 

이번 [유리 갈대]는 작가가 창조한 기존 캐릭터와 견주어  인생 역정이 기구하기로는 비교할 데 없는,  세쓰코라는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세쓰코가 단가 모임에 나가 쓴 글 중의 하나다. <유리 갈대> 라는 제목의.

아마도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텅 빈 허무함, 가슬가슬해서 부드러움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메마른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 아닌가 한다. 읽는 내내 <유리 갈대> 구절이 되뇌어지니 말이다.

 

고작 서른 살인 세쓰코는 오랜 세월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남자를 가로채서 러브호텔 안주인의 자리를 꿰찼다. 이쯤 되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세쓰코의 인생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에게 얻어맞지 않으려고 감정을 죽이며 살아왔던 것이 이런 일에까지 이르게 한 것일 수도 있다. 스즈란긴자 골목에서 잔술집을 하던 세쓰코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이용해 돈을 벌었고 급기야 자신의 남자에게 딸을 주기까지 한다. 세쓰코가 남편을 "아빠" 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사정을 알면 이해가 된다.

 

 

멀쩡하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오자 세쓰코는 남편의 행적을 추적한다. 남편이 사실은 '직장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전 애인이었던 세쓰코의 어머니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살'격인 교통사고를 낸 것도 알게 된다.

 

"아빠, 어제 여기 왔었지?"

-72

 

돈으로 유혹받아 돈으로 맺어졌다고 믿었던 남편과의 사이에 "어머니"가 끼어들자 세쓰코는 마음이 아파온다. 애써 죽이고 덮어두었던 감정이 어딘가에서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세쓰코가 결혼 후에도 러브호텔의 재정을 맡아 주고 있는 젊은 세무사 사와키와 관계를 갖는 것을 들춰낸다.

 

사와키와 세쓰코 관계와 기이치로가 리쓰코와 끊어진 적 없었다는 사실이 과연 상쇄할 수 있는 일일까. 사람의 마음을 상쇄할 수 있기는 할까.-73

 

화가 난 세쓰코는 어머니를 밀쳤고, 어머니는 쓰러졌다.

 

 

한편 단가 모임에서 만난 우아한 부인 사노 미치코와 그녀의 딸 마유미는 겉으로는 '인형의 집'에 살고 있는 행복한 가족 같아 보이지만 안으로는 곪을 데로 곪아 "인간다움"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세쓰코는 남편이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은 다른 데 신경을 안 쓰려 하지만 꼬마 마유미의 유난히 맑은 눈동자가 괜시리 신경 쓰인다. 마유미의 걷어진 소매 속에 얼핏 보이던 얼룩덜룩한 멍자국!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키고 화도 못 내며 울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영혼을 그 투명한 눈동자 속에 투영시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겉과 속이 다른 어머니 미치코에게 맞은 건가, 했지만 곧 의붓 아버지의 짓임을 알게 된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마유미를 이틀간 보호하게 되고 마유미의 아버지는 그 이틀간 마유미가 유괴되었다 주장하고 세쓰코는 도마뱀같은 마유미의 아버지에게 돈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어떡하나...아이와 아이의 어머니는 "인형의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다 '유괴된 아이의 아버지는 자살' 하게 되는가. 짤막한 한 편의 미스터리 드라마가 솜씨 좋게 들어앉아 있다.

 

세쓰코는 혼자 러브호텔을 경영할 수 없다며 직원에게 호텔을 양도하고 마지막으로 사와키와 함께 어머니의 집을 찾는다. 잠시 후 세쓰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잔술집 '바비아나'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까맣게 탄 주검만이 사와키를 기다린다. 이른바 분신자살이라고 하는 건가.

이십대의 세쓰코와 관계를 맺는 도중 세쓰코가 러브호텔 사장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밝혔을 때 사와키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결혼이란 속박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였기도 했고, 세쓰코의 몸에 흐르는 처연함 때문이기도 했다.

세쓰코의 죽음에 망연자실해 있던 사와키는 유리 갈대같던 세쓰코를 자꾸만 곱씹는다.

그런다고 살아돌아오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안고 그녀의 흔적을 좇는 사와키만은 실낱 같은 빛을 보았으면 좋겠다.

 

 

속이 텅 빈 갈대 속에 모래가 흐른다고 했던가.

인생이 날개 달고 한 번 위로 솟구쳐 본 기억을 선사해주지 않아서, 이들은 자꾸만 공허함의 바닥을 걷는가.

그들이 끌고 가는 회색의 그림자가 오그라든다.

 

속이 비어 여린 것 같으면서도 한 번에 꺾어지 않는 갈대는 스산함 속에 강인함을 숨기고 있지만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면 또 한 번의 일격에 쨍 하고 깨져버릴지 모른다.

내면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인생의 반려를 제대로 만났더라면 깨지지 않고 손상되는 일 없이 살 수 있었을 텐데.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스스로 노래할 수 있었을 텐데.

웃고, 울고 , 화내는 어린 아이로 살았더라면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거센 풍랑에도 굴하지 않는 홋카이도 여자의 안간힘을 본다.

 

충격적인 막장 드라마로도, 관능적인 성애 소설로도, 으스스한 미스터리로도 손색 없는 [유리 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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