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 인생, 물고기의 눈으로 바라보다 [피시볼]
독특한 구성의 책을 만났다.
바야흐로 아파트 27층의 어항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며 탈출한 물고기 이언의 눈에 비친 "세빌 온 록시"라는 네모난 상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 생각도 없고, 기억도 오래 가지 않는 물고기는 그저 자신이 지금 자유낙하 중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 집중을 하고 있는 사이, 세빌
온 록시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을 살고 있을 뿐이다.
4초 남짓한 사이 가속도의 힘에 의해 좀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바닥에 철퍼덕 떨어져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물고기 이언과 여전히
복닥복닥, 지지리 궁상맞기까지 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명료하게 대비되어 보인다.
물고기 이언은, 그래,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가치관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과는 명확히 다르다.
이언은 딱히 자기성찰을 하거나 우울했던 적이 없다. 깊이 생각하거나 한탄하는 건 그의 천성에 맞지 않는다.-18
생각이 없다는 게 축복일 수 있다는 점. 이언이 물고기라서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어, 숨을 못 쉬겠어. 젠장, 지금 고층건물에서 떨어지고 있잖아! 그런데....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어......"-19
1976년에 지어진 세빌 온 록시는 공동주택이자 고밀도 고층 건물이다. 지하 주차장과 빨래방이 갖춰져 있는 방 한 칸짜리 임대 아파트. 이
곳의 각 칸들안에는 온갖 경험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인 이 곳을 물고기 이언의 눈으로 본다는 독특한 설정만으로도 이야기는
탄력을 받는다. 저자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통찰하지는 못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풍경이 훨씬 경이로워질 수 있다며 물고기
이언의 눈으로 관찰하는 데 대한 이유를 댄다. 인간들을 한데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로서 물고기를 택한 이유? 물고기의 지적 능력으로는 시간과
공간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리하여, 바람둥이 코너 래들리가 진실한 사랑의 불가능성과 확실성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파트 관리인 히메네스가 불난 엘리베이터를 고치고, 물이 새는 싱크대를 고치다 가스가 남장여자로서의 용기있는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함께하는
것도,
피튜니아 딜라일라가 혼자 아이를 낳는 순간에 기적적으로 은둔형 외톨이 클레어와 홈스쿨링을 하는 허먼의 도움을 얻는 것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물고기 이언의 눈으로 잠깐 들여다 본 '세빌 온 록시'라는 상자 속 이야기들은 그대로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이다. 물고기 이언은 단 몇 초
동안의 눈의 깜박임 속에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을 다 담았지만 금세 망각해버린다. 자신의 앞일도 알지 못하는데, 상자 속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무엇하나.
세빌 온 록시라는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경험은 상자만의 공기로 축적된 채 그저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흐름 안에서 그저 찰나의 깜빡임과도 같은 것일 뿐.
작가는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불교의 선과 같은 맥락을 전달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의 애달픈 달콤함, 가슴 찢어지는 증오, 음란한 육욕, 가족을 잃은 슬픔, 머릿속에 떠올랐던 온갖 생각, 입 밖으로 내거나 속으로 삼킨
모든 말, 탄생의 기쁨과 죽음의 슬픔,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이 하나의 통 안에서 경험될 것이다.-10
비록 남의 인생이나마 한바탕 들썩이는 소동처럼 요란하게 치러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이언처럼 그저 상관없는 일이려니 하고 넘기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만약 저런 상태에 놓여 있다면, 하고 감정을 이입해보려는 "나"가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한다.
물고기 이언이 될 것인가, 상자 속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할 것인가는 읽는 이의 선택이다.
다만, 인생에 이미 통달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후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게 될 것이다.
한 번 웃고 말 일이 될지, 시크한 썩은 미소를 날리며 코웃음을 치게 될지는 각자의 경험이 좌우한다.
다같이 어우려져 사는 세상. 마음의 문을 닫아걸지는 말고 웬만하면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슬금 슬금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