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그녀의 SF 단편들 [블러드 차일드]
이럴 줄 알고~
읽었더라면 그 충격과 전율이 좀 덜했을까.
SF를 흔하디 흔한 장르로 보아 쉽게 믿고 덤빈 게 패착 요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고 동네방네 좀 떠들고 다녀야 이 충격이 좀 가실 것 같다.
원래 단편이란 것이 짧은 분량 안에 기승전결이 확실히 드러나야 좀 읽을 맛이 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습작 같은 것,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 괴이한 상상력이 주는 생소함만으로도 충분히 놀람을 던져줄 수 있다.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어딘가에서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대담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쩌면 바로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단편 뒤에는 작가가 이 생각을 끌어오게 된 배경이랄지, 집필후기가 간략하게 들어 있는데
이 후기 속에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길길이 날뛰는, 생명력 넘치는 상상력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저기서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구해와 재미를 더해 꾸며낸다는 식의 창작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은 것들에서부터 발현된
상상력의 끄나풀들이 펑 터지면서 글로 직조된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놀라운 상상력에 놀라운 글솜씨다.
말파리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무엇인가를 상대해야 할 때, 그 대상에 대해 글을 쓴다는 작가.
글을 씀으로써 문제를 정리한다는 그녀는 예를 들면, 1963년 케네디의 암살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공책을 움켜쥐고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을
적어내려가는 식으로 골치 아픈 문제를 돌파하고 삶을 유지한다고 했다.
[블러드 차일드]는 '집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가 뻗어나간 상상력이 도달한 곳에서 태어난 이야기다.
원래 거주민이 있는 태양계 밖 행성에 존재하는 고립된 인류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
숙주에게 모종의 숙박료를 내는 인류라...
기괴한 생물체인 트가토이는 인간에게 알을 낳는다. [블러드차일드]속 주인공 남자아이는 개념을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누나 대신 자신이 숙주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다. 신선하다 못해 온몸의 털이 쭈뼛거릴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의 전개에 나는 할말을
잃는다.
생물학, 의학, 개인적 책임이라는 소재에서 자라난 이야기인 [저녁과 아침과 밤]
작가가 세 가지 유전질환의 요소를 가지고 만든 듀리에 -고드 질환이 지배하는 세상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미래에는 아마도 작가가 제시하는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움찔 놀란다.
"워싱턴 대로 버스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로 시작하는 [말과 소리]는
유혈이 낭자했던 짧은 싸움을 목격한 작가가 극도로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연결해 만들어낸 이야기다. 가망 없고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류의 미래에는 폭력 말고 다른 의사소통은 없는 걸까...생각한 끝에 첫문장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질병으로 인해
언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조금이나마 손상이 덜한 사람들이 우월한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 폭력적인 몸짓에 희생당하기
마련이다 . 말과 소리가 없는 세상은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출구 없는 비상
사태에 가깝게 파괴적이다. 수가 많이 적어진 남자들은 여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기도 한다...점점 퇴행되어가가는
사회에서 희망은 말과 소리를 되찾는 것 뿐...
몇 개의 이야기만으로도 끔찍한 미래상이 저절로 그려지면서 동시에 현재를 반성하게 한다.
과연 이런 글을 쓴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고 어떤 방식으로 작가가 되었나?
독자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 책의 뒤에는 작가의 자전 에세이 두 편이 실려 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난독증에도 시달렸지만 어려서부터 이야기 창작을 즐기던 작가는 열 살에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SF를 쓰는 거의 유일한 흑인, 여성 작가여서 부당한 질문을 많이도 받았지만 그녀는 긍정의 힘으로 편견에 대항했다.
그녀가 전해주는 글쓰기 규칙들은 쏙쏙 들어와 박힌다.
글쓰기 규칙을 배우는 것은 쉽지만 규칙들을 따르고, 몸에 밴 습관으로 바꾸는 것은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읽어라,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작가 워크숍에 가라, 매일 써라, 최대한 좋아질 때까지 글을 고쳐라...등등.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간 작가의 말이기에 좀 더 깊이 새기게 된다.
어쨌거나 대단한 SF 작가의 말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