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애월의 쪽빛 바다는 물색없이 푸르고 난리야..[봄날의 바다]
제주를 다녀와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너무 깨끗하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푸르고 ...결국은 다시 가 보아야 한다고.
제주는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낙원과도 같은 자연 풍광을 지녔지만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마고할멈의 설화 이래로 숨겨져 온 핏빛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제주의 쪽빛 바다는 그 이야기들을 날름 받아 먹고는 흔하고 흔한 바람에 실어 멀리멀리 보낸다.
[섬, 짓하다]의 작가 김재희의 손끝에서 봄날의 제주 애월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편의 잔혹 동화가 피어났다. 흑백이 분명한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듯 보인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남겨진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범인에 대한 단죄를 아주 간단하게, 너무도 분명하게 물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선명하게 드러난다.
희영은 열두 살 때부터 스물두 살 까지 제주도에서 살았다. 10년 전 제주를 뜰 때만 해도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희영은 동생 이준수의 사건 기록과 탄원서를 들고 제주에 닿았다.
동생 준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던 엄마의 유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생의 사건을 다시 한 번 되돌려보는 것은 분명 아픔을 동반하는 일이겠지만 어쩌면 쫓기듯 떠난 제주에 당당하게 돌아올 수 있게, 혹은
어디서라도 홀가분하게 살려면 과거의 꺼림칙함은 떨쳐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매일 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올린 문서들을 뒤지며 사건관련 글을 찾고 지워나가던 중, 희영은 '제주도 여대생 살인사건 범인은 김수향
사건과 동일한가?'라는 글을 읽고 제주행을 결심한다.
동생 준수는 10년 전 17살 나이에 김수향 살인사건 용의자로 잡혀간 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그런데 그 글에서는 새별오름 근처에서 발견된
여대생 사건을 김수향 사건과 상세하게 비교해 놓고 동일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써 놓았고, 인근 게스트하우스 'B'의 주인이 용의자일
것이라고 특정해 놓았다.
정말 동생이 범인이 아니었다고?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며 강하게 부인한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 희영은 심하게 마음이 동요한다.
인터넷을 뒤져 그 곳이 '바다 게스트하우스'임을 알아낸 희영은 그 곳에 묵으면서 용의자로 지목된 주인장 오영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다.
그는 '체 게바라'를 닮은 외모와 독특한 행동 때문에 '체 형'이라 불린다고 했다. 그에 대한 것은 게스트하우스 스탭인 현우가 전해주는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첫날부터 이상하게 희영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선한 인상의 현우. 새별 오름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게스트하우스는
어수선했고 형사마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오영상을 의심하는 듯했다. 희영은 현우에게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게 되고 현우와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더욱
마음을 놓게 된다.
희영은 현우와 함께 어린 시절 친구 소정을 찾아갔다가 동생에 관련된 뜻밖의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그 와중에 바다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묵었던 오수경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것 또한 주인장 오영상이 벌인 일일까?
언론에서는 유명 프로파일러를 대동하고 제주에 내려와 10년 전 준수의 일과 현재의 새별 오름 여대생 살인사건을 엮어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면서 희영에게 접근한다.
희영은 '살인자'의 누나로 비칠 것인가, 아니면 동생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새로운 증거를 내놓아 동생의 결백을 주장할 것인가.
10년 전과 동일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과연 준수의 결백을 입증해줄 수 있을 것인가?
동생 준수는 결코 범인이 아닐 것이라 믿었던 희영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동생에 관한 감추어진 진실, 알면서도 덮어두었던 진실을 하나하나
대면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보통의 추리소설에서는 사건의 추이를 좇거나 미묘한 심리 묘사를 통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봄날의 바다]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 추리소설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그 후'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 가족 못지 않게 가해자의 가족 또한 상처 받으며 괴로워한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범죄가 일어나게 된 과정에도 주의를 기울여 가족간의 틈새를 잘 살펴보라고 경고한다.
도미노처럼 하나가 넘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주루룩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은 가족, 친구를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마음에 난 상처는 무릎이 까지고 손가락이 베이는 상처에 비하면 엄청 깊고도 넓다고.
제주 애월의 쪽빛 바다는 아무 것도 모르고 물색없이 푸르고 난리야...
애월 봄바다가 지켜 본 그날의 진실은 그렇게 아리기만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