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오렐리 발로뉴 지음, 유정애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황혼녘의 시니어, 힘을 내요! [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이들어도 곱게 늙기란 참, 동서고금 막론하고 어려운 일인가.

여든 셋의 페르디낭 할아버지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이 칩거생활을 하면서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사서 얻고 다닌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사셨어요?

어쩌다 그렇게 되셨어요?

괴팍하고 톡 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인다.

자기 자신만 알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며 가가이 가기도 무서울 만큼 가부장적인 권위가 철철 넘쳤던 아버지.

어쩌다 칭찬 한 번 얻고 싶어서 죽어라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덤덤한 말 한 마디, "수고했다."뿐.

갈등이 불거져도 찬찬히 앉아 대화 한 번 나누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그저 잘못했다고 고개 숙이고 묵묵히 앉아 몇 시간이고 내게 쏟아지는 타박을 들어야만 겨우 놓여나는 것을,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게도 질려했다.

잘못 입이라도 떼서 반박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버지가 고된 역사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읊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용감한 바로 밑 여동생은 과감하게 쏘아붙이고 독기 있게 노려 보며 제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낸 후, 처절하게 맞았다. 나는...용기가 없어서 차마. 그리고 내게는 인내심이라는 미덕이 넘치고 넘쳤기에 그냥 기다렸다.

언젠가 당신이 나이 들어 늙으면 그 비참함을 어찌 견디시려고 그러시나요...되뇌이고 되뇌이면서.

내 또래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은근슬쩍 감정이입이 되기 시작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인가.

내 아버지를 닮은 페르디낭에 대한 연민인가.

내 아버지가 그래도 페르디낭이 가진 것만큼의 유머감각이라도 가지고 있었으면 하는 것은 너무한 기대인가.

 

 

지금 페르디낭 할아버지가 고독하게 늙어가는 것은 어쩌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와 쉴 새 없이 싸우고 그 사이에 하나뿐인 딸을 끼워넣자, 딸은 커서 부모로부터 멀리멀리 떠나려고 외교관이 되었다.

딸은 반항기 어린 한 때의 실수로 경찰관과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이혼했다.

딸은 가끔 페르디낭 할아버지에게 안부차 전화를 하지만 페르디낭이 딸에게 급한 전화를 할 때는 결코 제때에 받는 법이 없다.

 

고독, 노쇠, 권태를 잊기 위해 페르디낭이 찾아낸 유일한 활동은 못되게 구는 것이었고 이 모든 행동은 쉬아레 부인을 겨냥했지만 정작 겁먹은 것은 아파트 이웃 노파들이었다.

페르디낭은 이웃들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법이 없고, 거주 공동구역에서 시가 연기를 피우고 쓰레기를 결코 분리해서 버리는 법이 없으며 그의 개 데이지는 아파트 정문 앞에 보란 듯이 개똥을 눈다.

페르디낭의 이혼한 전부인인 루이즈가 죽자, 아파트의 노파들은 페르디낭을 쫓아내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민다. 물론 가장 앞장 서는 것은 아파트 관리인인 쉬아레 부인이다. 

어느날, 페르디낭이 애착을 갖고 기르던 데이지가 사고로 죽어 한 줌 재로 그의 손에 놓여진다. 일주일을 무기력하게 있던 페르디낭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외출을 감행하지만 버스사고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어찌된 영문인지 데이지가 죽은 후 바깥출입도 안 하고, 씻지도 않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만나는 아무한테나 까칠하게 굴고, 급기야 버스에 달려들었다는 것이 순순히 딸의 귀에까지 도달한다. 딸은 멀리서 페르디낭을 걱정한 나머지 양로원에 보내겠다고 한다.

"양로원에 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딸과의 협상 끝에 쉬아레 부인이 그를 관찰하기로 하고 양로원행을 미룬 페르디낭.

그는 아파트에서 살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웃들과 얽혀들 수밖에 없다.

마귀같이 생긴 앞집 이웃노파 꼬부랑 할멈은 아흔 두 살이지만 시대에 잘 적응하는 초활동적인 할머니이며 페르디낭에게 파출부를 소개해 준 것을 계기로 페르디낭의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게다가 위층에 새로 이사온 꼬마소녀 줄리엣은 막무가내로 페르디낭의 집으로 밀고 들어와 쉴새없이 수다를 쏟아내며 페르디낭을 무장해제시킨다.

결코 이웃들과 다정한 말 한 마디 나눌 것 같지 않은 페르디낭은 서서히 변화해가기 시작한다.

우아하고 가족 관계 원만한 앞집 노파와 새롭게 인생을 꾸려갈 장밋빛 미래를 꿈꿔보기도 전에 거절당한 페르디낭은 낙심을 곱씹고 있던 찰나, 관리인 쉬아레 부인 살해 용의자로 경찰에 끌려간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해프닝이란 말인가.

평소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앙숙이었던 것만으로 용의자가 되다니...

게다가 겨우 아파트의 이웃들과 왕래하나 싶었는데 다 늙어서 손자 병간호를 위해서 딸이 있는 외국으로 살러 가야하게 생겼다.

황혼녘에 와르르 쏟아지는 사건들.

페르디낭 할아버지는 튼튼한 심장으로 이 모든 일을 견뎌낼 수 있을까?

황혼녘의 시니어, 힘을 내요!

 

 

 

이 일을 계기로 페르디낭은 자신의 주변에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고, 결정적으로 가족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툴툴거리기를 멈추지 않지만 이런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노인에게도 마음 속에는 따뜻한 혈액이 퐁퐁 솟아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짜증내고 괴팍하기만 하던 페르디낭의 투박한 외면 속에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무조건 남들과의 관계를 차단하려고만 할 때는 완전히 어두웠고 답답하고 힘겨웠지만

한 발짝 걸음을 떼자,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인생의 황혼녘에야 장밋빛 인생의 진정한 묘미를 찾았다고나 할까.

속좁고 답답한 노인네라며 처음에는 그의 기이한 행동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는데

이제는 그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동감의 기운이 차오른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닫힌 마음이 열릴 텐데, 그 조금의 관심을 보내기가 힘들어서 괴팍한 노인네라고 치부하는 부족한 딸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이 책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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