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과 붉은 피와...시 [블러드 온 스노우]
온갖 들끓는 감정을 죽이고, 36.5도의 은근한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몸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피를 최대한 싸늘하게 식힌 채
남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지막 내쉬는 숨 한 끝을 애써 말아넣은 다음에야 방아쇠를 당기면 그의 일을 끝난다.
살인청부업자.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인 쓸쓸한 한 남자의 삶에는 일말의 동정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그저 살아낼 뿐인 남자에게 무슨, 일렁이는 감정 따위 실려 있을라고.
올라브라는 살인청부업자.
그는 자기 할 일을 꽤 냉철하게 잘 해내는 모양이었다.
4년을 섬겨 온 호프만이라는 보스가 자기 아내를 죽여달라는 명령을 내리는 걸 보면.
꽤 골치아픈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올라브는 보스의 입에서 그 명령이 떨어진 순간부터
생사의 갈림길을 휘젓고 다니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리라.
할 일을 하되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라는 자신만의 원칙이 깨질 때가 왔다는 것도.
올라브는 오슬로의 거물 마약상 호프만의 아내 코리나를 처리해야 했지만 대신, 호프만의 아내를 찾아와 괴롭히는 젊은 남자를 쏘아
죽였다.
젊은 남자는 호프만의 첫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즉, 호프만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제 올라브는 호프만의 아내와 숨어 지내며 호프만을 먼저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에 몰렸다. 자신의 손에 죽어간 아버지를
바라보며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남자 올라브는 사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코리나와 사랑을 나누고
'장발장'의 코제트와 마르코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어리석을만큼 순수한 영혼을 살짝 엿보게 해주었다.
하지만...
호프만과 경쟁 관계에 있는 뱃사람과 거래하여 호프만을 제거하는 과정은 영화로 만들면 정말 굉장한 액션 장면이 될 거라 장담한다.
교회 지하실에 보관된 호프만 아들의 시신.
올라브는 호프만을 불러들일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관 속에 매복하여 완벽한 기습 작전을 감행한다.
소리를 지르며 관뚜껑을 밀치고 뛰쳐나온 올라브는 놀란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 대담한 액션 장면을 연출한다. 산탄총 소리가 울리고 피와
뼈와 살이 튀는 전형적인 액션 씬! 호프만과 가족이 모두 와 있던 그 자리에 노인과 아이도 있었는데...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의
투철한 군인정신이 베어 있던 그 한 마디, "여자와 아이와 노인은 보호한다."는 그 말이 올라브에게서 실현된 순간! 올라브가 송중기와 겹쳐
보였다!!
올라브는 나쁘기만 한 놈이 아니었어~~
이제 겨우 올라브의 나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고 그 여리고 착한 속살을 보나 싶었는데, 배신 더하기 배신, 배신 곱하기 배신이 연거푸
올라브를 후려친다.
심장을 비껴간 총탄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올라브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 누구인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고이 숨겨두었고, 끝내 코리나에게 들키지 않고 싶어했던, 진심을 담은 편지를 전해주러 "그녀"에게 간다.
농아에 절름발이. 멍청한 약쟁이 남자친구의 빚을 대신 갚으려고 몸을 팔려고 온 "마리아"가 올라브는 안쓰러웠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 아버지의 나쁜 피가 자신에게도 스며들었다는 불안감.
이런 것들이 난독증을 짊어진 올라브를 한없이 위축되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제대로 씌어졌고 수신자에게 제대로 전해진 짤막한
편지 한 장이 나를 울린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고요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얼음 기둥.
아니, 자세히 보면 혈관이 들여다 보이는 눈사람인가?
그가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여자, 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불완전하고, 결함과 하자가 있고, 늘 스스로를 희생하고, 사랑의 한심한 노예가 되고, 그저 다른 사람의 입술을 얌전히 읽을 뿐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모르고,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굴복시키고 거기서 보상을 얻는 여자. -191
크리스마스를 앞둔 오슬로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희디흰 눈에 붉디붉은 피. 망토처럼 펼쳐진 피.
그리고
시와도 같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시리도록 투명한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