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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1940, 세 소녀 이야기 [몽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노란 리본이 온 천지를 뒤덮었던 시절을 우리는 벌써 잊어가고 있다.
개나리가 피면 노란색을 보며 마냥 새로 태어난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는 봄을 생각하다가도 문득문득 서러운 그날의 일을 떠올려야 할 것이거늘.
비극적인 일들을 오래 간직하고 있어 뭐하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는 않아야 하는 일들이 있다.
국가가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힘없고 약한 자, 국민의 한 사람임에도 보호받지 못했던 일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하고 잊어가는 건
아닌가.
그 날의 일들은 그저 세월따라 바람따라 흘러흘러갈지라도 한 때나마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보면서 가슴 한구석 차지하고 있는 그늘을
어루만지며 잠시나마 고개 떨굴지니.
[몽화]는 1940년, 그 즈음 세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작가" 권비영이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을 펴냈다.
일본의 폐탄광을 살펴 보다 그 앞에서 무심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꽃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속 씨앗에도 꽃을 피운 저자는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꺾이고 짓밟혀도 희망을 꿈꾸는, 세 소녀의 삶을 그린 [몽화]를 썼다.
조금만 더 참으면 광복이 올 것이라고 지금의 우리는 소리높여 말해주고 싶지만 1940년의 소녀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암담한 현실에
발담그고 있었다.
주재소 순사를 두들겨 패고 야반도주하듯 만주로 떠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마저 떠나고 소녀 영실은 이모네 집에 맡겨진다.
단단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당부를 가슴에 새긴 소녀 영실은 국밥집 하는 이모네 집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기와집에 사는 갈래머리 소녀 정인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아버지에게 환멸을 품고 있었고, 은화는 어려서 기생집에 맡겨진 이후 기생이
되는 일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만 같은 처지였다.
이들은 동굴을 아지트 삼아 자주 만나며 열여섯 소녀들이 마주한 불안한 현재를 서로서로 보듬어 안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인은 불란서 유학, 은화는 일본으로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유학을 떠나게 되고, 은화는 기생이 되기 싫어 도망쳤다가 위안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들은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하지만 이들 앞에 펼쳐진 길들은 서로 달랐다.
짓밟힌 꽃이 되어버린 은화의 이야기는 그저 아리고 쓰라렸다.
그나마 셋 중 나은 편이라는 영실도 만주로 갔다던 아버지와 일본에서 재회하긴 하지만 위에서 찍어내리누르는 일본의 거대한 힘 앞에 스러져
가는 개인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며 안타까움을 더한다.
멋쟁이 모던 보이 태일, 힘 깨나 쓰는 일본군 앞잡이를 아버지로 둔 정태 대신 강제징용을 떠나온 머슴 칠복, 영실의 이모 을순과 살림을
차렸던 나카무라 등 세 명의 여주인공 외에도 다채로운 인물들이 그 시절의 모습을 대변하며 살아 움직인다.
결국 광복을 맞이하지만 이들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와 당위를 찾지 못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고향의 봄을 그리워하며 광복이 되면 당연히 고향으로 향할 것이라는 독자의 바람은
이들이 겪은 참담한 삶을 지켜보면서 한 풀 꺾이고 만다.
짓밟힌 땅, 짓밟힌 몸, 짓밟힌 꿈.
모든 것을 다시 예전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꽃이 되기를 꿈꾸었던 소녀들은 꽃망울을 활짝 피우기도 전에 너무도 거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들의 지나간 세월을 그 누가 기억해 줄까.
위안부 할머니들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 겹겹이 쌓아둔 이야기들을 풀고자 하면 너무 늦다.
지금, 바로 지금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그들의 이야기를 펼치기 가장 빠른 때이다.
흰 저고리, 까만 치마.
단정한 단발머리를 하고 얌전하게 두 손 모은 채 앉아 있는 소녀여!
그 눈망울에 원망의 눈빛을 담지 말지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당신들을 추억하는 이들이 다음 세대에, 또 다음 세대에까지
당신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