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미로운 초콜릿처럼 부드럽게 녹아든다 [초콜릿 우체국]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해결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고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는
일.-95, <DOLL'S BAR > 중
[초콜릿 우체국]의 짧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바로 내 옆집의 사연, 너와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이어지는 까닭이 밝혀지는
것만 같다.
뭐지, 이건? 하면서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마는 것은 왜일까?
분명 낯선 세상을 보는 것 같은데도 우리의 자질구레한 일상에서 겪는 일과 한쪽 끝이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감미로운 초콜릿이 혀에 닿을 때쯤엔 형체도 없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처럼 이야기의 각 장면이 품고 있는 불가해함이 사라져버린다.
초콜릿 제딴엔 아무리 단단하게 제자신을 똑바로 붙잡고 있는다 해도 입 속의 침과 열기를 당해낼 수는 없는 법이다. 황경신의 펜끝은 그렇게
날카로우면서도 짐짓 무딘 척하며 다가와 톡 쏘고 숨어버린다. 흔적도 없이.
[초콜릿 우체국] 속에 담긴 수많은 작은 초콜릿들은 제각기 다른 맛을 선사한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는 곰스크행 기차표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남자가 어쩔 수없이 현실에 발이 묶인 이야기가 담담하게
쓰여져 있다. 남자는 일을 하고 팁을 모으며 기차표를 살 돈을 모았지만
여자는 여행가방을 풀고 옷을 옷장에 넣고, 소파를 들이고 의자와 테이블을 얻어오고 하면서 마을에 정착하려고 한다. 결국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서 마을 학교에 눌러 앉은 남자에게 퇴직한 교장이 말한다.
"나도 곰스크로 가고 싶었다네. 결국 이 곳에서
삶을 마치게 되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들을 살아가게 하는 희망은 곰스크로 가는 기차인가.
<오 분쯤 느린 시계>
원하는 날씨를 파는 여자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사월 사일 오후 네 시. 눈부시게 맑은 날만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
이별을 예고한 남자의 주문이 남자의 아픈 추억을 건드리는 것만 같아서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런 젠장, 역시 이별은 눈이 부신 날엔 안되는가봐. R.E.F 의 노래가사처럼 말이야.
피식. 통속적인 노래가사는 진리라며 쓴웃음 지어본다.
다음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계속 살아가는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동화인가 싶다가도 아니, 이건 어른들의 일이야 싶은 깨달음이 매단편의 끝마다 찾아온다.
스윽, 스르륵, 감겨드는 초콜릿의 달콤함에 이끌려 [초콜릿 우체국]을 읽다 보니 인생의 다양한 맛이 밀려든다.
바람이 밀어주는 파도에 놀라 밑단 적시지 않으려고 팔딱팔딱 뛰는 명랑함이 있는가 하면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뒤에 남는 우스꽝스런 하얀 수염거품처럼 터무니없이 너털웃음 짓게 하는 실없음도 있고
먼지 쌓인 책을 더듬다 책갈피에 적힌 글 한 구절에 가슴 철렁하는 당혹스러움도 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 말처럼 한없이 긍정하고 싶어지는 기분에 빠져 하는 일 없이 씨익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