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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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책이라니...[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색다른 제본으로 만들어진 책을 보는 기쁨~

옛날 전집 혹은 사전에서나 보았던 책상자 안에서 이렇게 3권으로 나뉘어진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누드사철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은 책등에 실로 꿴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책 제본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한다.

왜 갑자기 이런 방식을?

의아해 하는 것도 잠시. 책장을 넘겨 보면 곧바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책장을 꾹꾹 눌러 가며 숨죽이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한 장 한 장 낱낱이  180도로 쫙쫙 펴지기 때문이다.

책에 어떠한 물리적 위해도 가하지 않고 그냥 넘겼을 뿐인데 이렇게나 아름답게 드러내는 완벽한 속살이라니...눕혀도 세워도 그렇게 책은 스스로를 허락한다.

 

 

 

우리나라 옛 책 만들던 방식이 떠오르면서 고전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책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자연스레 다소곳해진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거장 에도가와 란포의 책이기에 제책 과정에 공을 들이며 나름의 존경을 표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에도가와 란포는 <검은 고양이>로 어린 시절의 나를 이유 모를 전율에 떨게 했던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착안한 필명이라고 한다.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정식으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일본 미스터리에 정통한 이들이 모인 카페에 들러 눈동냥으로 읽은 글에 의하면 수많은 일본 미스터리 작가에게 영감을 준 작가가 바로 에도가와 란포라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요코미조 세이시, 시마다 소지 등이 란포에게 영향을 받았다.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창조하였으며 <괴인 20면상>, 속편인 <소년 탐정단 시리즈> 등에서 아케치 고고로는 '뤼팽 대 홈스'에 필적할 만한 대결구도를 선보인다고 한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에서는 <천장 위의 산책자>에서 아케치 고고로를 만나볼 수 있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은 2004년에서 2005년에 고분샤에서 기획 출간한 [에도가와 란포 전집]에 수록된 작품을 완역한 것이라고 한다.  각 작품에는 작가의 자작 해설이 실려 있다.

작품 앞에는 <읽기 전에>를 두어 각 단편의 발표 시기와 여러 판본들과의 대조 방법 등을 소개했다.

이런 전작들과의 완벽한 상호 연계가 누드사철 방식의 제본 방식과 더불어 이번 결정판의 소장가치를 더 높이는 것 같다.

 

 

<천장 위의 산책자> 에 덧붙인 자작 해설에서 란포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내가 쓴 작품에 대해서는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이 작품은 잘 썼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주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하죠. (겸손이 아닙니다. ) 그리고 발표한 뒤에 남이 칭찬해 주면 잘 썼나보다 생각하고, 비판을 받으면 좋지 않은 작품이라고 확신합니다. 즉 자신감이 제로인 셈이죠. 그렇다고 세상의 흐름에 영합하려고 쓰지도 않습니다. 늘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씁니다. 다만 잘 썼느냐, 못 썼느냐, 재미있느냐를 확실하게 모른다는 겁니다."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으면 항상 풀이 죽어 지낸다는 란포옹의 말은 엄살,투정이 섞인 어린아이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천장 위의 산책자>는 세상에 잘 섞여들지 못하는 한 남자의 엉뚱한 괴벽이 낳은 살인을 다룬 것으로, 란포가 낮에도 벽장 안에 누워지내던 경험과 벽장 천장의 판자를 벗겨내고 천장 위로 올라가본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창작의 뒷배경을 이렇게 진실되게 밝히는 란포는 천진난만하기 그지 없어보이는데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어떨 땐 도무지 이런 작가의 천성과 연결지어지지 않는다.

 

<애벌레>는 또 어떻냐면...전쟁에서 다친 남편을 돌보는 아내의 이야기인데, 세상 사람들은 정절의 표상인 듯 아내를 추켜올리지만 아내의 실상은 음란한 괴물이라고나 할까...머리와 몸통만 남은 살덩어리에 불과한 남편을 팽이처럼 돌리며 정욕을 채우는 아내의 모습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악마성을 보여주어 읽는 이에게 극도의 공포스러움을 심어준다. 한 번 보면 정말 기분 나빠져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책을 밀쳐버릴 수가 없는 것은, 극단의 고통과 쾌락이 주는 묘한 매력 그리고 비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나는 빠듯한 추리와 논리적 전개를 환영하는 입장은 아닌 듯하다.

기괴한 분위기와 환상적인 면을 오가는 단편들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가 그런 면에서 나의 취향을 단번에 저격했다고 할 수 있는데...

순서야 어찌되었건, 예전에 읽었던 교고쿠 나쓰히코의 <망량의 상자>와 시작이 비슷해서 심장의 박동이 두 배, 세 배는 더 빨리 뛰었던 것 같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짜릿함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인데...

기찻간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남자. 남자가 소중한 듯 가지고 있는 상자. 상자를 보며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하던 남자가  털어놓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천으로 만든 공예액자, '오시에'속 여인에게 반한 남자의 이야기는 장편 <망량의 상자>에 비해 길이도 터무니없이 짧고 덜 오싹했지만 아련하고 환상적인 느낌은 대단히 강렬하다.

일본 미스터리에 대한 식견이 짧은 나조차도 란포의 작품 하나를 읽고  곧바로 유사한 이미지(작품)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라면, 란포가 후대에 미친 영향력은 정말 어마어마하지 않겠는가.

 

<거미남>은 작품 길이가 꽤 길어서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는데, 앞의 단편들을 읽노라니, 이제는 능청스럽게 등장해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어떠한 성격인지를 알려주는 '변사'의 존재가 익숙해진 것 같다.

일본 아사쿠사록쿠에 실존했던 구경거리 '거미남'의 존재를 들먹이지만 실은 그보다는 포악하고 잔혹한 성격을 가진 '거미'의 이미지를 떠올려주시길...

잔혹하고 모질며 무시무시하기가 꼭 거미 같은 인물과 두뇌 회전이 빠르고 행동이 날렵한 아마추어 탐정의 원한 얽힌 끝없는 투쟁에 대한 이야기...기대하시라, 시라, 시라, 시라......

시대적 배경이 꽤 오래전이다 보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변사의 말투는 고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속속 이어지는 사건은 전개가 빠르고 무엇보다 놀랍다.

전대미문의 사이코패스 범인은 시체를 석고상에 감춘 채 6등분하여 각기 다른 곳에 옮겼고, 수족관에 인어처럼 시체를 담가 놓았다. 점점 대담해진 범인은 자신을 뒤쫓는 탐정에게 살인예고를 보내기에 이르는데...

잔인한 행적으로 '푸른 수염'이라 일컬어지는 이 범인과 탐정의 대결구도는 뻔한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이야기가 기대되며 한껏 심장을 조여온다.

 

 

일본 미스터리의 거장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들을 이제 맛보기만 보았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다음 작품들이 기다려진다. 다른 판본들도 많지만 검은숲의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를 기다려 보련다.

아!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1]의 멋진 누드사철 제본은 초판본이 아니면 만나볼 수 없다고 하니, 이 책을 소장하고자 하는 분들은 어서어서 달려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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