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는 머무르지 않는다 [은빛
물고기]
'주최측의 농간'에서 한 글자 빠진
'최측의 농간'이라는 출판사에서 [은빛 물고기]의 원본을 다시 되살려냈다.
1999년 한울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던
고형렬 시인의 [은빛 물고기]는 2003년 바다출판사를 거치는 동안 절판되었던 것을 2016년 2월 최측의 농간 두 번째 책으로 발간하는
것이다.
'최측의 농간'이라는 출판사 이름은
약간 삐딱하게 보일 수 있지만 확고한 독립출판의 의지를 가진다.
"이 책 좀 예전에 나오긴 했는데 꼭
읽어볼 만한 좋은 글들이 실려 있어요, 내가 정말 읽고 싶었고 마침내는 설레며 읽었고 결국에는 읽을 수가 없기도 했던 그런 글들이 실려 있는데,
당신들도 읽어봤으면 좋겠어요."라는...
절판되었지만 알음알음으로 소문난 좋은
책들은 고서점에서 고가를 형성하며 팔려나가기도 하고 끝내 구할 수 없어 독자의 마음을 애태우기도 한다.
눈밝은 이들 중 [은빛 물고기]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이제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의 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은빛 물고기]는 저자 고형렬 시인이
10년 넘는 시간 동안 연어의 일생을 추적하며 쓴 장편산문이다.
국내 오지 곳곳을 방황하던 작가가
태백선 열차 안에서 연어가 남대천에 돌아온다는 찢어진 신문 한 귀퉁이의 기사를 읽은 것을 계기로 오랜 시간의 추적을 써내려간
詩적 보고서라 할 만하다.
말이
산문이지, 글의 곳곳에 시적 향기가 짙게 배어 있고, 더 나아가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질문하는 선문답이 주를 이루면서 경전을 읽는 선승이 된 듯
마음이 허허로워지기도 한다.
베링해라든지
오호츠크 연안 같은 넓디넓은 대양을 누비던 연어는 자신의 삶이 잉태된 곳으로 돌아가 산란한다. 그리하여 누가 보아도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행위를 치러낸다.
저자는
어머니의 고향인 삼척의 오십천과 자신의 유년의 고향인 남대천이 연어가 돌아오는 대표적인 모천이라며, 이 두 하천을 마음에 두고 글을 써내려간다.
연어의
가계와 일생에서 한 성품을 느끼며 그들을 따라가는 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연어가 찾아오지 않는 산 속 마을을 찾아 한 노인의 회고를 듣는다. 물살과 싸워는 것만 같던 팔뚝만한 연어들을 작살로 찍어올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물속에 아무 것도 없어 심심한 세상이 되었다나...가을이 되어 어느 날 길을 나서다 보면 벌써 물밑에 와 있던 연어들은 그러나
알을 낳으면 죽고 만다며 노인은 연어의 생과 사를 서글퍼했다.
연어에
대한 이 시적 보고서는 연어의 생과 사를 두루 둘러보며 사이사이에 우리네 삶의 질서를 오롯이 투영해 낸다.
치어는
탄생해서 부화하고 봄이 되면 살랑거리며 대해로 나아간다. 그들의 유장한 한 삶은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새파랗다가
하얗다가 연어의 등짝 빛으로 변하는 남대천에는 처음 이 세상을 흘러내려오는 찬 산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작은 등엔 날개가 붙어 있는
것 같고, 그들의 턱에는 울음보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앙칼지고 무서운 것들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정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81
치어들이
저 컴컴한 하천의 뭍을 떠나 어떻게 무리를 지어 의지하며 이 광대무변한 바다를 건너갈까? 저들은 과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또한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동해안의 모든 밤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봄을 치장하였다. -106
읽어내려가는
내내 문득 문득 필사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문장들을 만나곤 멈춰서게 된다.
연어의
비늘, 코, 힘차게 퍼덕이는 꼬리는 생명력을 가득 품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 하늘과 바람과 물이 섞여든 그 굽이굽이의 도처에서 어쩌자고
팔다리를 갖춘 인간들의 살내음이 맡아지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에 무서움이 아닌 즐거움의 열반이 숨어 있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그 열반을 알 리가 없다. 열반이 추억이 될 때, 사람들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수평선 너머에서 나의 그리움은 보이지 않게 되고 나는 치마 같은 바람이 불어주는 바닷가에 앉아 인연을
회상한다.
'은빛
물고기는 머무르지 않는 바다의 나그네들이다.'-117
은빛
물고기들이 마침내 어른이 되어 모천으로 돌아온다. 사랑을 찾아 부부의 연을 맺고 새생명을 잉태하려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보아왔던 여느
물고기들의 산란을 전후한 장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작가의 붓끝에서 탄생한다. 새삼 숨을 참게 만드는 숭고한 아름다움이 거기 스며
있다.
'영원
속의 찰나적인 몸짓의 수정'으로 수정란들은 생명을 얻고 마침내 대를 잇는다.
치어에서
'파르'를 거쳐 '켈트'에 이르기까지 연어의 한살이는 정성스럽게 빚어낸 작가의 문장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은빛 물고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 생명의 고귀함과 자연의 위대함을 숨구멍 하나하나마다 가득 들이마시게 될 명문들이
넘쳐나는 만큼,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이 책을 꼭 남겨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