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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박하 / 2015년 11월
평점 :
상처 입은 시간을 치유하는 사람들[종이약국]
뮈리엘 바르베르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추천하는 책방 주인이라면 믿을 만하리라.
멋진 하이힐을 신었지만 자신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남자들과 쓸모 없는 관계를 맺던 여자가 책으로 피신하려다 엉뚱한 책을 집어들었을 때 (단
한 순간에 이 많은 것을 간파해내는 책방 주인도 대단하다!) 그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추천했다.
책을 읽는 틈틈이 푹 쉴 수 있고 어쩌다 눈물이 치솟을 수도 있다.
자신 때문에, 지난 세월 때문에.
하지만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고 지금 곧 그 남자 때문에 죽을 것 같아도 지금 죽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추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책방 주인은 감정이 폭발해서 여자 손님에게 독선적인 말을 쏘아대고 그녀가 몸을 홱 돌려 나갔을 때 후회했지만, 그녀는 잠시 후 돌아와 그
책을 사 간다. 책방 주인의 조언이 그녀의 정곡을 찔렀고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몇 마디의 질문을 던지고 곧이어 처방을 해 주는 사람.
그는 병원을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의사가 아니다.
그를 만나려면 어디에 가야 하느냐고?
"종이약국"이란 서점으로 가면 된다.
이 종이약국이란 서점은 이름만 희한한 게 아니고 그 존재 자체가 특이하다.
센 강 위의 특이한 수상 서점, 종이약국. 그 곳에는 린드그렌과 카프카라는 이름의 고양이들도 있다.
책방 주인 페르뒤 씨는 의사들이 진단하지 못하는 감정들, 고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들을 치유하고 싶었다.
룰루라는 이름의 화물선 한 척을 사서 직접 개조하고 무수히 많은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인 '책'으로 채웠다.
"너는 대부분의 사람이 숨기는 것을 꿰뚫어 보고 들을 수 있어. 사람들을 근심에 빠지게 만드는 것, 사람들이 꿈꾸고 아쉬워하는 모든 것을
간파해 낼 수 있지."
페르뒤 씨의 아버지가 말한 대로 페르뒤 씨는 그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책을 처방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느날, 상처를 입고 자신의 동네로 이사온 카트린이라는 여인을 보고 슬픔을 뱉어내도록 울게 하는 책을 처방해주어야지 하는 자신을 보며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 페르뒤.
카트린에게 처방해 준 책 안에서 나온 편지 한 통을 읽은 뒤 페르뒤 씨는 영원히 정박해 있을 것만 같던 "종이약국"을 움직여 항해를
시작한다.
그는 무엇을 향해 항해하는 것일까?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 탱고를 정열적으로 출 줄 아는 여인, 마농을 찾아가는 길일까?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감동을 안겨준 유일한 책, <남녘의 빛>을 썼지만 베일에 싸인 작가 사나리를 찾아가는
길일까?
21년 동안 묵혀 두었던 편지를 다시 발견한 페르뒤는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의 자신을 벗어두고 해적과도 같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과거를 청산하러 나가는 길이라고나 할까.
[종이약국]은 [고슴도치의 우아함] 만큼이나 상처입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리게 하는 데 탁월한 효능을 지닌 책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픔, 슬픔, 고통, 열등감이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될 때 나 말고도 이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그 고통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본 적 있는지.
페르뒤 씨가 헤쳐 나가는 여정의 끝에는 그를 죽음과도 같은 삶에서 해방시켜 줄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황폐할 때조차 다른 이들의 아픔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페르뒤 씨는 항상 책과 함께 했고 남들을 위한 처방의 책을 언제
어디서는 한 번에 뽑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치유할 방법을 찾았을 때, 종이약국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신의 책을 만들기로 한다.
[감정의 백과사전]
그 백과사전에는 이런 내용이 실릴 것이다.
히치하이킹에 대한 두려움이나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한 자부심, 눈을 들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는 소심함, 내 발 모양새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그런 모든 감정에 대해 말이죠.-32
때로는 잿빛 구름의 음울함, 때로는 탱고를 추는 무희처럼 온몸을 내던지는 정열, 물에 빠진 노루를 보고도 구하지 못하는 무기력함, 붉은
포도밭에서 트랙터를 모는 톰보이의 활기참...
감정의 백과사전에 실릴 단어들을 미리 맛보기 하라는 듯, 종이약국과 함께 항해하는 동안 넘실대는 감정의 파도들을 경험하게
된다.
상처 입은 시간들을 치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내 과거, 현재를 실어 같이 울고 웃다 보면 가슴 언저리에 꽉 막혀 있던
덩어리가 쑥 내려간다.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