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안의 어두움. 이해할 수 있을까. [다크]
[다크]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읽는 것이고, 무라노 미로 시리즈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예전에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따로 읽고 나서 여성 작가의 소설 치고는 과감한데~ 하고 한마디 하고 넘어간 것이 다였는데, 한참 후에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읽게 되었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가장 먼저 읽었어야 했는데...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막을 올리는 첫 번째 작품[얼굴에 흩날리는 비]에 이어, 어두운 길을 내내 헤매고 다니는 미로를 만날 수 있는
[다크]를 연달아 읽었더니 어쩌나...제목의 [다크]가 너무 약한 표현이지 않았나, 싶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는 첫 번째 남편이 자살한 후 두 번째 남자 나루세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나루세를 자기 손으로 고발해서 감옥에 갇히게 한 후 그 역시 자살하고 마는데...
미로는 남자 복이 없는 여자인가, 싶어 제발 행복한 장면을 많이 볼 수 있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작가는[다크]에서도 그 바람을 무참히 짓밟아 뭉갠다.
시리즈 첫 번째 책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미로의 의붓아버지인 무라노 젠조가 [다크]에서는 핵심 인물로 나온다.
전설적인 탐정 무라노 젠조, 무라젠은 미로가 동성애자가 득시글거리는 험한 골목인 신주쿠 2초메의 사무실에서 한동안 기거하다 사설탐정 역할을
맡게 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다 알게 된 남자 나루세와 사랑하다가 미로가 뒤통수를 맞고 그 남자를 고발하여 감옥에 갇히게 한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녀의 정은 아내가 죽었을 때 싹 사라진 것인지 무라젠은 미로에게 얼굴을 비치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는다.
[다크]의 앞부분은 미로가 나루세의 자살을 한참 후에 알게 된 이야기로 시작된다.
죽음은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엄청나게 폭력적인 분노를 폭발시킨다. 슬픔이 깊으면 분노 또한 크다. - 55
무라젠은 나루세가 자살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미로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사실에 분노한 미로는 탐정 일을 그만두고 오타루에 가서
시각장애인 안마사 히사에 동거하고 있는 무라젠을 찾아간다.
무작정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고 심장병 발작을 일으킨 무라젠의 약을 걷어참으로써 무라젠의 죽음을 방조한 채 그 자리를 뜬다. 이 광경을
보았지만 보지 못하는 히사에는 정황상 미로가 무라젠을 죽였다며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미로는 그 길로 재산을 정리해서 한국으로 도주하지만 그 과정에서 돈을 빌린 게이 도모베와 무라젠의 동료 야쿠자 데이의 비호를 받는 히사에가
그녀를 뒤쫓는다.
그리고 미로에게 다가온 세 번째 남자, 서진호.
나이 마흔이 되면 죽어야지, 하며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미로는 여권을 위조해서 한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서진호는 미로에게 호감을 표하며 다가오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미로는 서진호와 함께 살아간다.
서진호 또한 미로 못지 않은 어두운 과거 이력을 가진 남자다.
1980년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젊음을 불살랐지만 '학생'이 아닌 '양아치'로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고 얼굴이 뭉개지는 따위의 처절한 광경에서 살아남은 사람 특유의 달관한 듯한 인생관이 짙게 배어 있으며 쉽게 사람을
믿지 않지만, 미로에게는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빠져 나와 한국으로 와서 아무도 모르게 살고 싶었지만 부산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미로는 또 다른 구덩이에 빠져 짝퉁위조 사기단의
일원으로 일하게 되고 자신을 뒤쫓는 도모베와 히사에와의 악연은 끈질기게도 그녀를 쫓아다닌다.
질척질척한 구덩이는 한 발을 빼면 곧 다른 한 발이 빠져드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미로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들로부터 끝까지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며, 세 번째 남자인 서진호에게는 헌신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따스한 한 줄기 빛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디까지 타락하고 어디까지 추악해질 것인가.
무자비하고 사악하다고 생각해야 마땅하지만 미로의 선택은 그 상황에서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자꾸만 동조하게 된다.
부모를 죽이고 스스로를 죽였다고 자조하며 어두운 세계로 침잠하는 미로가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기를 내내 빌었다.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 암시하는 마지막 구절의 여운이 꽤 오래 남는다.
뱀은 밤에 잠에서 깬다. 내 안에도 독사는 분명히 있다. 그 모습을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한다. 이 거리에서는 어떨까. 다크엔젤.
(...)살아서, 서진호를 기다리기 위하여. -547
비열한 거리. 하드보일드의 상징과도 같은 구절을 떠올리며 마지막 구절을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