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인간의 악의 [모방살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투명한 액체와 같아서 무엇을 섞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투명한 그대로 놔두면 투명한 채로 눈부시게 환한 빛을 투과하며 영롱한 빛깔들을 선보이지만
반대로 걸쭉하고 찐득하고 탁한 무언가를 넣으면 금세 시커매져서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속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되고 만다.
그 마음에 선한 것을 담을 것이냐, 악한 것을 담을 것이냐는 마음의 주인, "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꼿꼿함을 지닌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 때문이든, 어떤 일 때문이든,부는 바람에 따라 흩어지고
모이는 구름처럼 마음이 살랑거린다.
제발 그 마음이 선의 쪽으로 많이 기울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악의" 쪽으로 다가가기가 쉽다.
수많은 유혹들 앞에서 당신은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악의에서 발전한 "살의"는 용서받기가 쉽지 않다.
이상하게 책을 덮고 나서는 작가의 트릭에 "당했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생겨난 악의가 살의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진다.
작가에게 너무 크게 당했기에 허탈한 나머지 트릭에 대해 항의할 기력조차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읽을 때는 그 트릭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천재적인 그 구성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다.
(오래된 이야기라 필름조작 카메라 알리바이, 전화공동접속장치를 활용한 알리바이, 열차시간 알리바이 같은 것들에서 가끔 실소를 터뜨릴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넘어가 줍시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 한 때 인기 많았던 드라마 촬영장에서 주인공인 것 마냥 사진을 찍어댈 때 느끼는
희열감과 같은 종류의 묘한 '데자뷰' 라고나 할까요...)
아마도 추리소설 작가인 듯 싶은 남자가 7월 7일, 오후 7시에 죽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
그가 살던 집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그의 죽음은 신변 비관 자살로 추정되었다....
짧아도 너무 짧은 프롤로그가 던지는 단순명쾌한 사건기록 하나가 이렇게도 놀라운 파동의 진원지가 되다니. 독자는 헨젤과 그레텔이 어두운
산길에서 달빛에 비치는 빵조각 혹은 조약돌에 의지해서 길을 더듬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신세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좁은
길 위를 위태롭게 따라나설 수밖에 없다.
작가 사카이 마사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캐기 위해 쓰쿠미 신스케와 나카다 아키코가 나선다.
쓰쿠미 신스케는 <추리원탁>이라는 동인잡지에서 함께 활동하며 사카이 마사오와 안면이 있던 사람으로 현재는 <주간
동서>에서 '살인 리포트'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사카이의 죽음과 관련된 원고 의뢰를 받고 취재를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누이동생의
일로 사카이에게 원한을 가질 수도 있을 법한 야나기사와 차장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나카다 아키코는 작가인 아버지 세가와 고타로로부터 문하생 격인 사카이 마사오를 소개받고 그과 가까이 지내는 중 갑작스레 그의 자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사카이가 우연히 언급했던 300만 엔에 의문을 품고 돈의 출처를 수소문하던 중, 도야마 오코우치 조선 사장댁 도련님의 행방불명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며 그쪽으로 조사를 하게 된다.
7월 7일의 죽음 이후로 7월 10일, 7월 11일, 7월 17일, 7월 18일...차곡차곡 쌓이는 날짜와 이들의 사건추리 기록은
프롤로그라는 진원지에서 출발하되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작가'라는 이미지는 부드럽고 깨끗하며 차분한 인상에도 어울리지만 음습하고 비굴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도 딱이다. 돈에 궁할 법도 하고
까짓거, 부유한 댁 사모님과 염문을 뿌릴 법도 하다. 하지만 추리소설 신인상도 받았던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추락할까...하는 의문이 든다.
뭐, 차기작에 대한 부담으로 괴로워서일 수도 있지, 여차하면 표절을 생각할지도...라며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사카이 마사오의 진짜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7월 7일 오후 7시의 죽음"과 같은 날, 같은 시에 죽고자 합니다.
그 제목을 붙였을 때는 딱히 그날 죽으려던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초고를 방치해두기 싫어 고쳐 쓴 작품이 유서가 되다니,
참으로 얄궂은 일입니다. -261
짧은 몇 문장으로 정리되는 사건이지만 저 행간의 이면에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모방살의'는 자의일까, 타의일까.
사카이 마사오라는 인물의 행적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두 사람이 추적하는 사카이 마사오에 대한 사연들은 '구루나 여관'이라는 장소에서 한 점으로 모아진다.
아, 이제 드디어 사카이 마사오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건가, 하는 순간.
빵! 터져 버린 사건의 진상.
사카이 마사오의 미스터리한 죽음은 여러 사람의 "악의"에서 비롯한 "살의" 때문인 것으로 판명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은 보이지 않는 '악의'를 가득 품은 채 살고 있었다.
돈과 명예.
그딴 게 뭐라고.
추악한 마음들로 인해 벌어지는 유괴, 사기, 거짓말, 모른 척, 표절...
조금씩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진상들은 오염된 물이 뻐끔뻐끔 피워올리는 거품처럼 썩은 냄새를 심하게 풍긴다.
추리의 기교로나 미스터리의 완벽함으로 보나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지만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트릭 이면을 받치고 서 있는 이야기들은 씁쓸한 미소를 자아낸다.
주술과도 같은 힘에 사로잡혀 단숨에 끝까지 읽고 말았는데, 그 주술에서 풀려나자마자
밀려오는 애잔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