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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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밤도 있어 [애프터 다크]

 

잠이 오지 않는 밤.

밤을 어슬렁~ 가로질러 작은 불빛 덩그러니 켜져 있는 카페 하나를 찾아 든다.

낮은 조명 탓에 분위기가 꽤 조용조용한 그 곳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곤 향이 좋은 커피를 한모금, 그리고 달그락 소리마저 신경 써가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옆에서 중년 남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음악의 선율인 듯 들려온다.

"이제 겨우 11시 56분인가...있지, '데니스'라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여자애가 있었어. 고등학생은 아니지만 고등학생 분위기가 남아 있지. 짧은 생머리에 작고 갸름한 얼굴. 검은 테 안경을 썼어. 그 여자애는 담배를 피우면서 책을 읽고 있었어. 그런데 왠 남자애가 다가와..."

중년 남성의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톤이 재즈같이 엇박을 타면서 미묘하게 리듬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펫 샵 보이즈의 싱어 목소리와도 같이 사람을 홀리는 마성의 "미성"이 섞여 들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남성의 이야기는 잦아들 듯 이어지면서 "천일야화"를 이야기하는 셰헤라자데 처럼 밀어내고 끌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여기까지는 허구입니다~~)

 

자, 여러분~

그 중년남성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식물처럼 낮에 광합성을 해서 에너지를 축적해 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밤.

이런 솔깃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커피 몇 잔을  연달아 마시고서라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다, 싶다. 11시 56분에 시작한 하루키의 이야기는 새벽 1시를 넘어 3:58, 4:25, 5:24 이렇게 따박따박 무표정하게 찍히는 시각을 의식하게 하면서 6:25 이 되어서야 끝난다.

하룻밤의 길고 긴 이야기인 셈인데 하루키는 이 이야기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나, 그렇다면 한 번 지어보자~ 하면서 지어냈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의 여자 주인공이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Tante Zita(일본 개봉명: 어린 풀이 돋아날 무렵)]. 

 [애프터 다크]는 스무 살 무렵의 여자 주인공이 밤거리를 다니며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역시나 하루키의 소설에는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그가 소설 속에서 언급한 책이나 음악은 왜 꼭 찾아 듣고 싶어지는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기가 막힌 제목의 책을 읽었을 때부터 '하루키는 음악'이라는 공식이 딱 새겨져서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마는 것 같다.

 

11:56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여자아이 마리는 <파이브 스폿 애프터 다크>를 흥얼거리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는 2년전 여름 더블데이트에서 만난 마리와 마리의 언니 에리를 기억한다고 했다.  

소소한 얘깃거리를 나누는 보기 좋은 한 쌍의 모습에 취해갈 즈음,

11:57

느닷없는 장면전환과 더불어 "우리"라는 낯선 시점을 제시하는 공간 속에 발을 딛게 된다. 마리의 언니 아사이 에리. 어쩌다 누군가와 함께 훔쳐보는 신세의 독자가 되어 카메라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또 두 달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에리의 이야기에 마음을 두고 오게 된다.

12:25

데니스에서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에리에게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 가오루가 찾아와 "그럼 미안한데 나랑 같이 가 줄 수 없을까?"라고 한다.

 

...

 

하루키의 이야기에 홀려 에리를 따라갔더니 모두 잠들어야 하는 "애프터 다크"의 시간에, 밤에 잠들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이 하나씩 그 민낯을 드러낸다.

밴드에서 트롬본을 부는 남자, 러브호텔에서 매춘을 하는 중국인 소녀, 나른하고 관능적인 엘링턴의 음악을 틀어줄 줄 아는, 바 '스카이락'의 바텐더,  얼굴 없는 남자, 심야에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하는 남자...

 

"한밤중엔 한밤중의 시간의 흐름이 있단 말이지."

"그걸 거역해봤자 소용없어."-78

 

밤에 흐르는 시간은 나른하고 몽환적이기도 하지만

어둠에 가려진 채로 소리 없이 벌어지곤 하는 폭력이 난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낮에 광합성을 충분히 해서 에너지를 비축한 상태로 남아 도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밤을 활보하는 것이 아니라면,

심야의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 혹은 "문제가 있는"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들이 선사하는 기묘한 밤의 세계에 초대되어 색다른 방식으로 밤을 즐겼다.

역시 밤의 이야기라서 조용하게 시작하긴 했지만 번쩍! 하고 정신이 들게 한방 먹이는 재주가 하루키에겐 있다는 말씀.

 

어쨌든 밤은 낮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놓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새까만 배경이 어떤 말이든 다 흡수해 줄 것 같아서일까.

천일야화가 밤에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셰헤라자데의 창의와 기지에 밤의 특별한 힘이 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새까만 밤의 도화지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는 단 한 사람만이 밤에 쉬이 잠들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독여 줄 수 있다.

거기에 하루키라는 DJ가 잘 골라서 턴테이블에 얹어 주는 음악은 아메리카노에 뿌리는 시럽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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