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구원자 & 심판자 [아들]

 

구원이나 심판은 '구원의 날, 심판의 날' 등 대체로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법한 사건의 일어났을 때 주로 쓰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거기에 '자'를 붙이면 인간이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뉘앙스를 준다.

[아들]의 주인공 소니는 구원자이면서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해리 홀레 시리즈로 많은 이들을 홀릭시켰던 요 네스뵈의 스탠드얼론 [아들]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짐 빔에 찌들어 살고 매일같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비틀거리면서도 그는 경찰의 신분을 내던진 적이 없다. 자의인가, 타의인가...^^사건만 맡게되면 어떻게 해서든 이리저리 치이는 중에도,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서라도 해결을 해내고 마는 '연민의 영웅' 해리 홀레는 잠시 뒤로 하고 그보다 좀 더 젊고 신선한 인물 [아들]을 만나는 것이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기대하던 소중한 책을 막상 품에 안고 나면 한참을 뜸을 들이는 버릇이 생겼다.

택배를 받고 포장을 뜯자마자 휘리릭 넘기며 책 속의 몇 단어들만으로 간을 보고 맛을 음미하던 나였는데, 정작 유명세를 치르거나 입소문이 많은 책을 대하고 보면 쉽게 책을 펼쳤을 때 실망하게 될까봐 은연중에 책 열어보기를 미루는 것 같다.

과연 이 책이 소문만큼 기대에 부응할까?

그리하여 일 주, 이 주...묵혀두고 묵혀두었다가 내 안의 호기심이 부풀어오를대로 부풀면 그제서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아들]은 한 소년-실상 30살이면 소년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묘하게 어울린다-의 복수극이자 성장극이다.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자신의 부패 행각을 알린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어머니마저 약물중독에 시달리자 기댈 곳이 없어진 소니는 약물에 의지한다. 아버지처럼 경찰이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던 소니는 촉망받는 레슬링 선수였고 모범적인 학생이었으며 항상 남들을 돕는 아이였는데 ...약값을 댈 수가 없게 되자 감옥 안에서 약을 제공받는 대가로 범죄자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쓴다. 열여덟에 감옥에 들어온 소니는 12년째 복역중이었다. 교도소 목사 페르 볼란은 이번에도 소니에게 (아내의 머리 윗부분을 톱으로 절단한 남편 대신) 외출 중에 살인을 저지른 죄를 자백하라며 늘어난 형량과 헤로인을 선물삼아 두고 간다. 소니 역시 그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마약이 방부제 역할을 한 탓인지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자라는 동안에도 순결한 눈동자를 유지했다. 11평방미터의 직사각형 감방 안에서 소니는 가부좌를 하고 침대 위에 앉아 침묵을 지키면서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수감자들은 소니에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축복을 받으면 치유가 된다고 했다. 구원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들의 죄를 사해주던 소니는 어느날 죽음을 앞둔 한 남자에게서 뜻밖의 고백을 듣는다. 소니의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니었고 경찰 내부의 첩자가 누구인지 조사하고 있었다고.

소니는 그 날부터 약을 끊고 체력을 단련한 뒤 결국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했던 스타텐 교도소를 탈출한다.

그리고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그 죄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를 남에게 전가시키거나 아직 그 벌을 받지 못한 이들을 하나씩 찾아나서서 응징한다. 회색 후디를 입고 빨간 스포츠백을 둘러맨 채.

처음에는 무척 용의주도하게 총을 쏘고 난 탄피를 직접 수거하거나 핏자국을 닦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하지만 살인 전담반 형사 시몬과 카리 팀에게 꼬투리를 잡히기 시작한다 .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 라고 하는 듯이 작은 틈을 남기던 소니는 점점 더 큰 흔적을 남기며 그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한다.

 

 

 

소니가 수감되어 있던 스타텐 교도소 담당 목사였던 페르 볼란이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건을 맡은 시몬과 카리는 자살이 아니라 누군가 목을 부러뜨린 다음, 시신을 강으로 던진 타살로 추정하고 수사를 해나간다. 그리고 곧 소니가 감옥에서 탈출한 뒤 저지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모두 담당하게 된다.

외코크림에서 경정을 지내며 관리직으로 일하던 시몬은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인물들과 거액의 돈이 연루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하려다 쫓겨난다. 그에겐 도박 중독증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도박으로 인한 빚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눈수술을 해야 하는 아내 때문에 걱정이기도 하다.

시몬은 법의 집행자로서 소니를 잡아들여야 하지만 그는 소니에게 진 빚이 있다. 아내의 수술비를 챙기고 검은 세력과 뒷거래를 할 것인가, 소니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 것인가.

 

 

소니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서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던 이들을 찾아 깔끔하게 처리한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겨누고 흔적을 지우거나 자신이 살던 노란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약올린뒤 냉동고에 고이 묻어주거나, 그들이 했던 수법 그대로 사나운 개에게 몸을 물어뜯기게 한다.

 

개들은 망설였다. 그러다 고스트버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델은 하얀 개들이 네스토르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놈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조용한지 우적우적 씹는 소리, 살점이 찢기는 소리, 환희에 찬 으르렁 소리와 네스트로의 비명이 똑똑히 들렸다. 이상하리만치 순수하고 떨리는 음 하나가 북유럽의 환한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고, 하늘에서는 곤충들이 춤을 추었다. (...)

피델은 재킷 소매로 얼굴을 쓱 닦고는 눈을 돌렸다. 우리 밖에 있는 남자도 몸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389

 

북유럽 느와르의 느낌이 이러할까. "아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냉혈한이 되어 버렸다. 일부러 감정의 수도꼭지를 틀어막고 심판자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얼어붙은 마음은 첫사랑의 상대와 함께 있을 때 살짝 녹아버릴 뿐. 짧은 감정의 홍수를 경험한 뒤에는 다시 처절한 응징자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썩어빠진 부패경찰, 돈과 권력에 취해 세상의 선악의 기준을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 특히 '쌍둥이'라 불리는 우두머리로부터 가지치기는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한 스파이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면 그는 냉엄한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

 

"지상과 천상의 모든 신들이 너를 불쌍히 여겨 너의 죄를 용서하리라. 너는 죽지만 참회하는 죄인의 영혼은 천국으로 인도받으리라. 아멘."

 

착한 아들처럼 언제나 "고맙습니다."란 말을 하곤 했던 소니는 자신의 손으로 처분하는 죄인들에게도 친절하게 추도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들의 의무는 아버지처럼 되는 게 아니라...아버지를 뛰어넘는 것이다.-596

 

마침내 모든 일을 끝내고 아들, 소니는 아버지를 뛰어넘을까.

구원자와 심판자로서의 양극단을 오가는 그의 마음 속에는 이제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지켜야 하는 기관이 부패에 물들고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을 때, 개인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악에 대항하는 구도는 많이 행해져 왔다. 아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이야기도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작가 요 네스뵈의 손에서 유럽 특유의 절제된 감정 표현이 꽃피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심판자인 동시에 구원자의 역할을 해내는 "아들"이라는 캐릭터에 마음을 빼앗긴다.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아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진다.

오랜 동안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온몸에 주사바늘 자국이 수없이 나 있는 약쟁이에다  여러 명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살인자에 불과한데도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피하도록 마음을 쓰는 "아들"에게서 한줄기 불꽃과도 같은 희망을 찾아낸 그녀, 마르타.

마음으로 공명하는 이들에게도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파괴적이고 잔인한 묘사가 넘쳐나지만 시적이면서도 음울한 분위기 탓에 그 어둠이 상쇄된다. 붉은 핏자국이 흑백으로 처리된 듯한 화면에 어울리지 않게 흐르는 심금을 울리는 음악, 그리고 심판자이자 구원자의 눈물. 이것만으로도 이미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던 최고의 홍콩영화 <영웅본색>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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