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영조 시대의 조선 9
이영춘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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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이 책은 조선 왕조 21대 국왕이었던 영조와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숙종 대부터 경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 많은 역사 속에서 숙빈 최씨는 상대적으로 세간의 이목을 많이 끌지는 못했다.

영조의 친어머니라는 휘광에도 불구하고 크게 부각되지 못한 이유는 천한 무수리 출신의 후궁이라는 꼬리표 때문이었으리라.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국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15년이 지났지만 아들을 갖지 못하여 애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남인과 가까웠던 후궁 희빈 장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원자로 삼는다.이후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기사환국)그러나 여성편력이 심한 탓이었는지,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었는지  숙종은 장희빈을 멀리하고 최 무수리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는 남인들의 정치적 실책과 결부되어 갑술옥사를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무수리였던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 등 3명의 왕자를 낳아 숙종의 총애를 받음과 동시에 희빈 장씨의 시기 질투를 받게 되었다. 인현왕후가 죽고 그것이 희빈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는 말이 숙종의 귀에 들어가면서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갑술환국이나 희빈 장씨의 옥사와 같은 커다란 정변에 숙빈 최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로써 숙빈은 연적이었던 희빈과 정적이었던 남인을 제거하고 아들 연잉군을 왕위에 올릴 기반을 다졌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명민하고 신중한 숙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82

 

인현왕후 다음에 들어온 인원왕후는 영조를 자신의 아들로 여겼고 그가 세제가 되고 대리청정이 결정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영조는 인원왕후를 평생 어머니로 받들고 의지하였다. 인원왕후는 71세로 죽자 숙종의 능인 명릉에 안장되었고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친어머니인 숙빈은 영조가 즉위한 후에 여러 차례 존숭 과정을 거쳐 시호를 받았고 사당과 묘소가 승격되어 왕후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렸다.

 

어느날 영조가 어머니께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 하니, "중누비, 오목 누비, 납작 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이후부터 영조는 평생 동안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 -70

 

 

영조에게는 여덟 살 때 돌아가신 인현왕후, 사실상 어머니로 모신 인원왕후, 양어머니인 명문 안동 김씨 출신의 후궁 영빈 김씨등의 어머니가 많았지만 친어머니인 숙빈을 마음 놓고 '어머니'라 부르지는 못했다. 17살이 되어 '창의궁'으로 분가한 영조는 이후 7년간 친어머니인 숙빈과 원 없이 살았다.

 

영조에게 어머니는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래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숙빈 추숭 사업을 시작했다.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어머니 숙빈에 대한 효도의 흔적은 서울의 육상궁과 파주의 소령원에 남아 있다.

 

이 책에서는 숙종의 여인들을 살펴보면서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회, 후궁과 궁녀 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숙종 대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알려주는 정변과 여인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숙빈 최씨의 생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궁원 제도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후궁의 시호와 궁원, 육상궁과 소령원, 칠궁의 성립과 운영 등을 통해 임금 뿐만 아니라 왕실 안 여성들의 지위에 따라 죽음 뒤의 절차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 수 있다. 숙빈 최씨의 자취를 따라 가다 보니 한 여인의 일생 속에서 조선 왕조에 드리운 명암이 한 눈에 보인다. 영조 대의 많은 자료 중에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관한 이야기는 그 어떤 곳에 들이댄 돋보기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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